사회복무요원 여우씨의 일일 - 4
요 며칠 무언가를 계속 잃어버리고 잊어버렸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나에 대해 잊은 게 많았다. 잊거나 잃는 건 쌍방 과실이라도 기분이 더러워지는 건 일방적이다. 잃어버렸음을 알아차린 그 순간부터 그 물건을 다시 되찾든, 똑같은 걸 새로 사든 더러운 기분은 절대 나아질 수 없는 건 현재의 일부가 떨어져나갔기 때문이고, 그 차이는 결코 메울 수 없다. 현재에는 속죄의 여지가 없고 이성의 사적 사유는 늘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물론 그것이 개방된다고 해서 더 나아질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작은 실수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실수란 허용되지 않는 것이고, 그에 따른 자기 혐오감 역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성의 공적 사유가 잘 보장이 되어 있는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18세기나 지금이나 여전히 계몽된 시대가 아닌 계몽의 시대인 건 다름이 없는 듯하고, 여전히 반계몽의 유령들과 전쟁 중인 건 다름이 없다. 아감벤은 기독교 신학을 해석하면서 창조 - 구원 사이의 중간기인 현세가 삼위일체론을 통해 신에 의한 통치기로 정당화되면서 구원 전 시간의 무의미함이 말소되었다고 보았고, 성부와 성자의 분리 및 통합이라는 난점은 '텅 빈 신의 자리'를 가시화할 수 있는 찬양을 통해 해결되었다고 보았다. 난 오이코노미아 신학이든 메시아주의든 사실 큰 관심은 없고 결국 누군가에든 통치만 당하는 인간이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는 거다.
물론 제정신이 어디까지 제정신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세계보건기구는 건강의 정의를 'A state of complete physical, mental and social well-being and not merely the absence of disease or infirmity'로 내리고 있는데, 참으로 신적이라고 생각한다.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가 건강이라니, 그렇다면 인간은 생후 반드시 건강하지 않아야만 한다, 건강하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이다. 아무튼 확실한 건 제정신이 건강한 정신이라면 나는 분명히 지금 안녕하지 못한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더 확실한 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측면의 안녕을 모조리 책임져 줄 수도 없고, 그러기를 바라는 것 역시 기만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결국 건강이란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안녕한 상태 정도라고 하는 게 조금 더 인간적이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전부 마지막 지옥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배신자이자 기만자이자 이 생에 대한 배교자이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는 이미 마지막 지옥에 있다.
지옥에서 살아야 한다면 역시 죽음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렇다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닌데 왜 죽고 싶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다. 여한이 남았다기보다는 죽음 자체가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을 지우는 일이라 미안해서 그런 건지, 꼭 슬퍼할 사람만이 아니라 혹여나 내 잘못에 복수를 다짐하며 칼을 갈던 사람이 나의 죽음을 보면 잠시동안이라도 얼마나 분노가 치밀어오르고 허무할지, 물론 이런 사람을 위해 살아있고 싶지는 않지만 죽고 싶은 정도도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고,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주절주절 적어보려고 케이건의 책을 꺼냈다가 이조차도 귀찮아서 다시 책장에 꽂아 넣었다. 어쨌든 지금은 죽고 싶지는 않지만 딱 그만큼 살고 싶은 마음도 그다지 없고, 아무도 안 만나고 그냥 혼자 있고 싶지만 약을 받아 오려면 병원은 가야된다는 것이고, 상담 받다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집 앞에 타지에서 온 차들이 넘쳐서 주차장에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딱 지옥에 걸맞는 좀비 사회다.
이 글 어딘가
조르조 아감벤.<<왕국과 영광>>(2007)., 임마누엘 칸트.<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1784)., 미셸 푸코.<계몽이란 무엇인가>(1994)., 김항.<<종말론 사무소>>(2016)., WHO.<Preamble to the Constitution of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as adopted by the International Health Conference>(1948)., Reiss et al.<Philosophy of Medicine>(2016).URL=<https://plato.stanford.edu/archives/sum2016/entries/medicine/>., 셸리 케이건.<<죽음이란 무엇인가>>(2012)., 단테.<<신곡>>(1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