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1. 여기에 없다는 걸 잊어먹으면 돼. 우리는 기승전결에 너무 익숙해져 있고 주어진 인과성에 대한 신도들이다.
2.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은 대안 현실을 상상한다. 대안 현실이 그대로 실현된다면 차라리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예상을 초과한다. 다시 말해 음모론은 현실의 일관성을 어지럽힌다.
3. 음모론을 신봉하는 극단주의자 집단은 자기 기만 전략을 통해 세력을 확장한다. 그것이 질적으로 어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여론 형성은 곧 질보다 양이기 때문에 부피 생장은 곧 그들이 추구하는 인종적 우수성의 전파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유전자 검사를 신봉하는 동시에 불신한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은 순수 백인 혈통임을 인증하고 싶어하지만, 그들이 다민종이라는 결과를 받았을 때 그들은 검사 방식과 결과 산출에 문제를 제기하고 뉴비를 포섭한다.
3.5. 그러나 모르는 것도 참으로 희구되어야 그럴 수 있다. 이파리들은 비로소 멍청해짐으로써 순도가 없는 영악한 상자 여는 법을 하나씩 실현한다.
4. 이해되지 않는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음모론은 매우 편리하고, 그 음모론이 개인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 우리는 그것을 자기계발을 위한 긍정적인 주문과 동일시할 수 있다. 특별히 다른 점이라면, 자기계발에는 유전자 검사에 대한 불신이 굳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점이 있겠다.
5. 그러니까 애초에 우연이라는 가능성 자체를 생각하지 않고 만물인과성론을 펼치는 것도 피로한 일이다. 그렇다고 있음직하지 않은 일을 있음직하게 꾸며 내는 일도 어렵다. 이성의 야망은 상상력의 능력과 양립되지 못한다. 우리는 다들 칸트가 아니고, 세계를 명료하게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지식인의 등장을 기대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인간의 독주로 이룩한 문명 세계는 항상 발달과 퇴보를 동시에 생산해내고 있고, 빨라진 인터넷 속도만큼 떨어진 리터러시는 압도하는 지식인의 등장을 그저 무용하게 만든다. 그저 야부리 터는 코딩도 못하는 꼰대 새끼, 정도로 치부되지 않을까 싶다.
6. PC주의와 쿨찐의 대결 구도는 가슴을 웅장하게 만든다.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고 했던가, 인종이고 성별이고 세대고 나발이고 결국은 물질적 이해관계 속에서 국민으로 묶이기를 강요당한 사람들이고, 집단주의 도덕에서 벗어나는 속도와 과정이 달라서(혹은 틀려서, 혹은 다름당해서, 혹은 틀림당해서) 전부 메다르도의 사악한 반쪽이 되어있는 것이다.
7. 갈등과 전쟁의 위협 속에서만 살아가는 것을 보면 인간은 순수 행복보다는 행복과 불행의 공존 상태인 숭고미를 지향하는 것 같고, 이러한 부분에서 다들 모더니즘에 중독되어 있기는 한가보다, 어쨌든 현대의 반대가 꼭 야만은 아니니까. 즉흥성과 타락적 쾌락, 모더니즘은 마조히즘이다.
8. = 너는 나를 때려야 돼!
이 글 어딘가.
조연호.<<유고>>.<아리스토텔레스의 나무-시인의 악기>(2020)., 정지돈.<<...스크롤!>>(2022)., 닉 맨스필드.<<마조히즘>>(2008)., 율리아 에브너.<<한낮의 어둠>>(2021)., 이탈로 칼비노.<<반쪼가리 자작>>(1997)., 홍찬숙.<<한국 사회의 압축적 개인화와 문화변동>>(2022)., 이창동.<버닝>(2018)., 전주국제영화제.<<영화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