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무요원 여우씨의 일일 - 8
요즘 사진을 잘 찍지 않는다, 정확히는 개인적인 나를 위한 사진을 찍지 않는다. 회사 프로그램 일지 작성을 위해 필요한 자료들만 지겹게 촬영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폰 셔터 소리는 귀에 딱지가 입을 정도로 많이 들었고, 무엇보다도 매끈한 렌즈와 마주하는 것은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니다, 없는 죄도 불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지고, 플래시는 모공과 함께 수치심을 가리기 위해 터트리는 것이 분명하다..
아이폰은 최근 삭제된 항목에 버려진 정지된 시간들을 한 달이 지난 후 반영구적으로 없앤다. 게으른 나는 바로 사진들을 지우지도 않고, 어차피 용량이 부족할 만큼 데이터를 많이 쌓고 살지 않아서 내버려 두어도 사는 데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다. 오히려 내가 만드는 데이터들은 내가 다시 확인할 수 없는 곳에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더 많이 산재되어 있을 것이고, 이런 기분에 소름이 끼치는 날에만 메일함에 접속해서 대기업과 나의 물욕의 흔적들을 닦아낸다.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환경 오염을 줄이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들었고, 물론 내 탄소 발자국을 더 줄이기 위해서는 지금 작성하고 있는 쓸모없는 문자들도 전부 없애고 당장 노트북을 덮고 불을 꺼야 한다.
아니 에르노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고 나서야 그의 글을 읽어 볼 작정을 했고, 출판사의 소개글이 마음에 들어서 <<사진의 용도>>를 첫 책으로 골랐다. 자기 전에 침대에 엎드려서 허리의 건강과 절반의 분량을 맞바꾸었고, 나머지는 <생로병사의 비밀> 내레이션이 은은하게 울리는 병원 대기실에서 읽었다. 10분의 만남을 위한 1시간의 기다림 속에서 아니 에르노와 마크 마리의 널브러진 속옷들이, 사고의 자국들이, 유방암이, 정액이 나를 채웠다. 읽다가 며칠 전에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의 상태에 소스라치게 놀라 핸드폰으로 반쯤 가리고 찍었던 심란한 사진이 떠올라서 급히 삭제했다, 에르노가 사진에서 '육체의 소멸'을 느낀다면 나는 '육체의 충일'을 느끼고 이건 제법 거북한 일이다..
띠지에 적힌 '섹스 후 남겨진 흔적들'이라는 말이 앞에 앉아 있던 어린이의 눈에 들어오면 혹여나 그 옆에 있던 보호자로 보이는 동반자가 곤란함을 겪지 않을까 싶어 책갈피로 사용하기 위한 척을 하면서 띠지를 책의 아무 곳에나 꽂았다. 사실 더 정확히는, ‘섹스가 뭐야?’라는 질문이 나오는 순간 나를 원망할 것 같아 죄 없는 홍보 문구를 숨기고 접힌 부분들을 다시 읽으면서 여전히 불릴 생각 없는 내 이름을 하릴없이 기다렸다.
매사에 죄책감이 든다, 즐거워서 웃을 일이야 없지만 억지로 웃을 때의 그 불편감, 환경의 압박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압박에 의한 행위 자체의 구역감, 몸을 가르지 않아도 심장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 때와 미소를 지을 때는 일치한다. 잠깐의 헛웃음도 마찬가지다. 언PC하고 기괴한 희극적 요소에 대한 반응도 아니지만 요즘 같은 때에 감히 사소한 즐거움을 잠깐이라도 느끼는 건 말이다, 그것도 내가? 그래서 최소한의 기계적인 사회적 행동으로만 남겨 두었고, 이 점에서 나는 베르그송의 생철학을 까버렸고, 나의 강락은 참을 수 없지만 나와 물리적으로 근접해 있는 사회가 경직되는 것은 피하고 싶어 하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서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타인의 웃음까지 통제하고 싶은, 아니 해야만 할 것 같은 그 욕구.
그러나 아직 이것이 당랑거철임을 인지할 정도로만 비정상의 상태에 부유 중이기 때문에, 죄장감은 나의 것인데, 왜 남의 것까지 훔쳐 오려고 하는 것인지, 고해성사로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숭배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죄를 우상화한다는 것이 또다른 죄가 되고,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은 고통 속에 놓인 상황이 곧 안정적인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이것은 형벌의 과정이고. 그렇지만 곧이어 또다른 강박과 불안감이 다시 몰려온다, 이 정도가 고난의 과정이라면, 지금도 아무런 이유 없는 죽음들은 대체 어떤 목적의 형벌일까? 동종 요법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런 죄의식으로부터의 탈피는 무언가 변화와 설득의 가능성을 기대조차 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인간이 되는 도피가 아닐까. 넘치는 배려심으로 모든 것들을 수용하고 무개념적으로 실천하는 것, 이것은 프로파간다처럼 수단이 목적으로 대체되는 과정의 중심에 나를 두는 것이 아닐까. 술이 나에게 그런 것처럼. 알코올이 바래다주는 황홀경을 맛보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용인된 술의 역할(도구적 알코올)을 위반하고 전복하는 환경이 필요하고, 그것은 박형신(2022)이 지적한 대로 '혼술'이다. 그러니까, 죄의식의 상실은 곧 '자기통제의 상실, 자기 탐닉, 탈억제'와 다름없고, 혼자만의 도착적 상태에 빠져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영영 부당하리만큼 커다란 스트레스의 더부살이를 자처해야 하는 것이다. 아, 맥주 먹고 싶다.
아니 에르노. <<사진의 용도>>(2022). 1984books.
김문조 외. <<탈사회의 사회학>>(2022). 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