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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여우 Dec 26. 2022

쉿.

사회복무요원 여우씨의 일일 - 9

올해는 초단위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시간들이었다. 끊임없는 물리적 폭력의 비통함과 참담함 앞에서 정제된 언어는 힘을 잃고, 집단적 우울감이 형성된 후의 포스트-트라우마적인 담론의 공간을 채우는 것은 사건에 대한 분석 욕구와 정동의 분출 욕구 사이의 갈등이다. 말이 불가능해지고, 언어가 지위를 잃는, 이성도 감성도 악마화되는 시간.


거칠게나마 당위성을 지닌 표현들의 나열은 무너진 세계를 사회적 의미에서 복구하려는 치료적 시도지만, 이와 동시에 나타나는 자극적인 보도와 자료화면, 전략적인 신자유주의적 책임 인정과 회피, 사건의 정치화를 둘러싼 색깔론적 논쟁의 반복재생은 주권 상실의 기억을 세대초월적으로 공유하는 민(데모스)에게 대의민주주의의 무력감을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정동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도덕적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반의 주권인민'은 함께 선포된 애도 기간을 위해 애도의 심리적 토대와 윤리적 규준을 마련해 나간다,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 채 지껄이는 중이다.


사건의 정치화는 실증론과 실재론의 대립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필연성과 우연성의 양 극단 사이 어디쯤 자리 잡을 것인가. 집단적 외상은 어디까지 의학적으로 결정되어 있고, 어디까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외상은 전자의 경우를 중점적으로 다루지만, 국가(문화)적으로 커다란 트라우마적 사건의 경우  그 심각성과 전파의 정도를 결정하는 서사는 실재(리얼리티)를 어떻게 구성하고, 어떤 방식의 어휘와 문법을 택하고, 어떤 방식을 활용할 것인지, 즉, '수행 집단의 재현 과정'(김명희, 2016)의 산물이며, 이것이 언론이 중요한 수행 집단의 일원에 포함되는 이유이고, 보도 지침과 윤리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변화와 동요는 모욕적인 발언을 조장한다(조르주 바타유). 현대의 수행 집단들은 착실하게 이 조장에 힘을 보태면서 끊임없는 분열과 경계 짓기를 꾀한다.


물리적인 폭력과 희생이 자명하게 드러났던 혁명의 시대를 지나 위법이나 소요가 없도록 내부적으로 암묵적인 통제를 지키는 시위가 익숙한, 평화적 집단의식을 동질적으로 공유하는 국민들은 한때 당파에서 벗어난 '순수(로 대표되는)'한 이미지를 형성하며 정치적 열망을 구가했었다. 그러나 '정권 교체=민주적 도약'이라는 단순한 도식화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건설적인 논의까지 이어지지 못하게 되었고, 세계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극단주의와 맞물려 음모론과 팬덤 정치, 맹목적인 혐오:애정 대결 구도의 사상적 기반인 반지성주의가 여론을 지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동시에 세계 질서의 변동은 뜨거워지는 지구의 온도와 함께 증폭되면서 군수 자본주의의 힘을 빌려 물리적 잔인성을 다시금 드러내고 있다.


소모가 생명의 재생가능한 부분보다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잠식해 버렸다(폴 발레리). 국내외적으로 지나친 호전성과 희생들이 매일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는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회고적으로라도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지조차 모르겠는 단어 그 자체로의 광기의 연속. 물리학자이자 성직자인 존 폴킹혼은 모든 고통과 악은 신이 아닌 다른 피조물들이 고유한 존재로 존재하도록, 창조 세계가 신의 엄격한 통제만을 따르는 데서 벗어나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치르는 불가피한 대가라고 한다. 그러나 자아 실현을 목표로 한 인간은 자기 보존을 위해 주체성과 자율성을 버리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는 중인가.


클레어 칼라일에 따르면 키르케고르는 스스로를 무한한 긴장 아래에 밀어 넣어 육체적 연약함을 느끼고, 그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고 한다. 대단한 인류의 구원자나 영웅도 아니면서 끊임없는 부조리한 죽음들을 보며 죄의식을 두려움으로 체현하는 나는, 정신의 자연적 법칙을 너무나도 착실하게 지켜 나가면서도 길들여지지 않으려고 반항하고, 끊임없이 나를 갉아 먹는다. 나는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것 그 자체로 책임 의식을 느낀다, 코나투스는 비관적이다.




이 글 어딘가..

김홍중.<<사회학적 파상력(2016)>>., 폴 발레리.<<정신의 위기(2021)>>., 클레어 칼라일.<<마음의 철학자(2022)>>.,존 폴킹혼.<<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2021)>>., 조르주 바타유.<<죄인/할렐루야(2022)>>., 김명희.<고통의 의료화와 치유의 문법: 세월호 이후의 지식정치학(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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