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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여우 Dec 31. 2022

갈무리

사회복무요원 여우씨의 일일 - 10

떠들썩한 서점은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다. 도서관의 소란스러움조차 견딜 수 없을 때, 현실과 동떨어져 있고 싶지만 불가항력적으로 다시 삶과 부착되어버릴 때, 발버둥이 통하지 않음을 인지하는 것이 고통스러우면 공간의 교집합에 발을 놓게 된다. 경계란 무언가 허물어야 할 것 같은 단어라서, 침범이 정당화되는 개념 같아서, 위안을 얻고 안정감에 파묻히고 싶을 때 몸을 맡기는 곳이라면야, 교집합이 조금 더 푹신하게 뭉개지는 느낌이지 않은가.


그러나 연말연시의 서점은 공간적 경계에 가까웠다. 교집합을 공집합이 채우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1년이라는 시간의 경계가 촘촘하게 투명한 벽을 가득 세웠다. 왜 들썩이는 소란의 먼지들은 내 눈과 귀를 오히려 더 밝히는지, 어엿한 현대인의 무관심으로 침잠한 공간이어야만 하는데 왜 시점과 종점의 근접은 나를 더 창백하게 만드는지. 새파래진 피부와 함께 새까매진 눈을 들킬새라 급히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빠르게 했다가, 불안이 튀어나온 것을 인지하고 다시 느리게 기었다가, 그렇게 좀비같은 자세로 걷다 보면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 지하주차장의 음습함과 아주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에 혼자 피식거리고, 수상하고 우울한 사람은 갑자기 '보이는' 어떤 것이 되면서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게 만드는, 낙인에서 비롯한 힘을 갖는다.


좀비는 속도 조절을 할 수 있다. 아마 할 수 있을 것이다, 좀비의 목표가 전염을 통한 성적 접촉이 부재한 번식인지, 그저 식욕을 채우기 위해 예비 좀비들을 찾아다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좀비가 되어보지 않고 좀비가 아닌 입장에서 좀비를 이해하려면 그의 정체성에 이 정도 능력이 있다는 가정 한 스푼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정체성은 규정하기 나름이니까,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야기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이야기의 형식은 언어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 역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진다. 이렇듯 인간의 정체성은 허상이다. 하지만 이렇게 규정하는 것도 언어이므로 허상은 더욱 강화된다.(1)


결국 나도 언제든지 좀비가 될 수 있다. 사람을 뜯어먹는다는 게 아니라,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방식으로, 일종의 메타포야, 메타포. 공백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명한 벽을 넘지 못해, 극단적 형태의 괴물이 되는 좀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기적거리면서, 기는지 걷는지 모를 정도로 서서히 다니면서 마지막으로 대처할 시간의 간극을 주는 사자들에게 예외 상태에서도 비판적 사유의 가능성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열려있다는 것을, 비가시적인 존재가 가시적인 존재가 되었을 때 일말의 공백을 남겨둔 친절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보이는 것을 우선 두려워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더 두려워(2) 하는 것처럼. 아니 정확히는, 우리는 우리가 견딜 수 있을 정도로만 두려움을 인정한다. 우리는 원하는 걸 다 볼 수 있지만, 그것을 보는 눈만은 볼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그 눈이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을지를 결정하며, 다 본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 눈의 한계를 보고 있는 셈(3)이다. 결국 '보이는 눈'과 '보이지 않는 눈'의 경계에서, 우리는 비가시성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여전히 시각중심주의에 머무른 채 구체적인 형상에만 의존하고 있다. 정치가 더 이상 대안적인 사회를 보여주지 않고, 인격화된 대상으로 제시되는 것(4)도 미래를 기억할 수 없다는 두려움을 가리기 위함일 것이다.


좀비는 이견을 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우리의 존재론적 공포감은 시대적 위기를 선언한 뒤 인류를 지키기 위해 바틀비처럼 '아니오'를 말할 있는 권리를 빼앗아갔다. 이 교환 덕분에 좀비는 금새 관리될 수 있었고, 우리의 죽음 역시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관리의 대상은 오로지 우리의 가시권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제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의 자리를 보이지 않는 유령이 채우기 시작했다. 


눈의 특권에서 벗어나볼까? 어차피 보이지 않는다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배회하는 유령은, 어쩌면 기억하고 싶거나 기억되고 싶은 의식의 운동이 아닐까. 인간의 한계로, 차마 다 담아내지 못하고 망각된 것들이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 것이 아닐지. 모든 악은 예외 없이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5)고 했었나, 우리도 설명할 수 있는 악의 유령들만 좇아 실의에 빠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복잡한 현실의 연속에 적응하지 못해 우리의 언어처럼 단순함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잊어버린 것들 중에는 희망이, 희망이 상상하기 어렵다면 노스탤지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려고 노력하자. 도시를 감싸고 있는 노스탤지어는 사사로운 추억이 아니라고. 안온한 후일담이나 애수 어린 감상도 아니라고. 그것은 오래전의 그것과는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허공에 섞여 들고 다른 형태의 미래를 암시하며 도시를 떠돌 뿐이라고. 그것은 침울하고 뾰족하며 위태롭지만 또 그리운 것이기도 하다고.(6)




이 글 어딘가..

(1), (3) 김연수(2022).<<이토록 평범한 미래>>.

(2) 조무원(2022).<<우리를 바꾸는 우리>>.

(4) 지그문트 바우만(2022).<<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기>>.

(5)임레 케르테스(2022).<<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6) 이장욱(2022).<<트로츠키와 야생란>>.

김형식(2020).<<좀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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