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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여우 Jan 08. 2023

산독기 독기야

사회복무요원 여우씨의 일일 - 11

선듯하다 못해 섬뜩한 기분까지 들게 했던 칼바람의 기세가 줄어들면서 미세먼지의 불쾌한 따스함이 검은 토끼와 함께 찾아왔다. 털이 뿌예진, 빛바란 교활한 토끼는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고 매캐한 과거의 실책을 좇는 지금, 여기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다. 독한 향수로 뒤덮인 향수를 기다란 두 귀에 걸고 찾아오는 토끼. 태양광보다는 폭발물과 전자기기의 빛에 익숙해 귀로 눈썹차양을 만들고 바닥을 우러러보는 토끼. 귀를 접어서 눈을 가리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수 있는 영악한 토끼. '뉴진스의 하입보이요!'를 외치고 길거리 포토그래퍼에게 사진을 찍히던 호랑이는 엘리자베스 2세와 고르바초프를 태우고 수많은 김불이들과 함께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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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표지에 쓰인 문장이 마음에 들어 집어들었다가 나와는 너무나 맞지 않는 문장들의 나열에 읽기를 중도포기한 에세이(『아무튼, 메모』)의 초반부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나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면? 타인은 많아도 내게 중요한 타인이 없다면? 기억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다면, 그래서 메모의 고통조차 느끼지 않는다면, 그날은 새처럼 날아가 버린다. (27쪽)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는 것을 좋아하는 작가의 태도는 나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활자들이 지나가는 내내 불편감과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의 '이야기에 홀려 있지' 못해 딴생각을 멈추지 않았고, '그날은 새처럼 날아가 버린다'에서 2020학년도 수능을 떠올렸다.


당시 국어 영역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윤동주의『바람이 불어』와  김기택의『새』가 등장했다. 문항들 자체는 전혀 난해하지 않았고(실제로 정답률도 높은 편에 속하는 평이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능은 수험생들에게 <보기>를 통해 시를 해석할 수 있는지를 요구하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도가 없더라도 문제는 맞힐 수 있도록 출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뭐 아무튼, '그날은 새처럼 날아가 버린다'에서 새장 밖을 나가지 않고 나가지 못하는 새를 떠올렸다가, 곧이어『바람이 불어』가 수능에 등장하기에는 꽤나 특이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국어 교육과정이 학생들에게 원한 '윤동주'의 이미지는 무엇이었는지 아주 조금,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사소할 정도로 궁금해졌다.



먼저 수능식으로 문제를 풀어보자. 정말 지극히 평가원스럽게 해석해 보자.


보통 문학 영역에서 이미 알고 있는 배경지식을 활용해 문제를 푸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자의적인 해석을 통해 출제자와 다른 관점으로 작품에 접근하면 오답을 고를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지양하라고 가르치고, 이것을 기본적인 태도로 훈련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동주 시인은 모든 문학 교과서에서 소개하고, 특정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뚜렷한 문학관을 지닌 작가이기 때문에 매우 편협한 (거의 고정관념에 가까울 정도의) 배경지식이  요구된다. 딱 두 가지, '일제 강점기 저항 시인'이라는 점과 '자아성찰의 태도'.



43. (가)에 대한 이해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불려 가는’이라는 피동 표현을 통해 자신이 처한 현실에 순응하려는 화자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X)

윤동주는 저항시인이기 때문에 자신이 처한 현실에 순응하려는 태도를 보일 리가 없다. 방금 이승우의 「선고」가 떠올랐다. 하루에 한 번씩 왕을 뽑는 것은 왕이 하루에 한 사람씩 새로 태어나야 할 확실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루에 한 번씩 왕을 새로 뽑는 것입니다.(38쪽). 매우 비슷한 관계처럼 보이고, 이런 생각을 수능에서 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집중력을 잃고 점수를 잃는다.


② ‘이유가 없을까’라는 물음의 형식으로 화자의 정신적 고통에 타당한 이유가 없음을 단정하고 있다. (X)

물음의 형식은 '딱 잘라서 판단하고 결정하는' 단정과 거리가 멀다. 우리는 여기서 출제자의 소심한 친절을 느낄 수 있다. 만약 '이유가 없다'가 화자의 정신적 고통에 타당한 이유가 없음을 단정하는 것이 맞는지를 물었다면, 조금 더 어렵고 평가원스럽지 못한 문제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③ ‘사랑한 일’과 ‘슬퍼한 일’을 병치하여 화자의 개인적 불행이 시대에 대한 무관심의 원인임을 암시하고 있다. (X)

'사랑한 일'과 '슬퍼한 일'은 조사 '도'와 형용사 '없다'의 공유를 통해 대구 형식을 이루고 있다. 이 경우, '사랑한 일'과 '슬퍼한 일' 역시 유사한 의미이고, 따라서 개인적 불행('사랑한 일')이 시대('시대를 슬퍼한 일')에 대한 무관심이 될 수 없다.


④ ‘없다’의 반복을 활용하여 자신의 삶과 내면을 응시하는 화자의 반성적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 (O)

수능적으로 완벽한 선지이다. '없다'의 반복도 활용되었고, '자신의 삶과 내면을 응시하는' '반성적 자세', 즉, 윤동주의 자아성찰 코드까지 들어가 있다.


⑤ ‘흐르는데’와 ‘섰다’의 대비를 통해 변함없는 자연에서 깨달음을 얻으려는 화자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X)

'흐르는데'는 자연('바람'과 '강물')의 유동성과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변함없는 자연'은 틀린 설명이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하게 읽고 넘어가기에는 조금 아까운 시라는 생각이 들었고, 1연의 피동 표현을 보자마자 어렴풋이 슬쩍 언급만 하고 넘어가는 윤동주의 중요하지만 시험이나 학교에서는 간과되는 경우가 많은 '기독교적 특성'이 떠올랐다.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시적 화자에게 가까워질 때는 주체적으로 다가오지만, 떠나갈 때는 수동적으로 '불려' 간다. 프네우마pneuma가 바람, 생명의 근원, 영(혼) 등을 의미했음을 고려해 보았을 때 시인의 바람 역시 단순한 자연 현상에 그치지 않고 이면에 감춰진 어떤 근원적인 힘으로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영적인 힘 앞에 괴로움을 느끼는 시인은 존재하는지 아닌지 모를 이유를 탐색하기 위해 노력한다. 종교적인 자아성찰의 과정에서, 그는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과 '시대를 슬퍼한 일'이 없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광수가 아니다, 그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저항적인 시인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뻔한 반어법을 활용했을까? 어쩌면 이 반어적 표현이 사실은 시적 화자 혹은 시인이 자신의 내적 모순을 인지하고 고백하는 부분이 아닐까?


키르케고르는 인간 실존을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족 실존의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시인은 욕망과 쾌락에 도취되어 순간만을 살아가는 심미적 실존으로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타자(세계)와의 관계를 맺으며 보편적 윤리를 추구해 나가지만 인간이 '자기'의 절대적인 결단 능력을 믿어 절대자와의 관계를 도외시하는 윤리적 실존으로서의 자신의 한계 역시 인정한다. 윤리적 실존은 이상주의적인 오만함이다.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이행할지는 내가 찾지 못하노라. / 이는 내가 원하는 선은 내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악, 그것을 내가 행하기 때문이라. (로마서 7:18-19.) 죽음에 이르는 절망을 느낀 시인은, 기압 차만 있다면 존재하는 바람의 영원성 앞에서, 자기로부터 절망의 원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신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 놓는 '종교적 실존'으로 나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실존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으며,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한 태도로 신 앞에 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결국 1-4연의 갈등과 5-6연의 갑작스러운 종교적 실존으로서 자아의 기립 사이에 해명될 수 없는 간극은 감히 인간의 가시적인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신에 대한 외경심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반석'으로 대표되는 보호자이자 피난처임 하나님(구약) 혹은 그리스도(신약)에 순종하고, 종교적 실천으로 진정한 '자기 되기(개별화)', 즉, '인간에 대한 영원성의 요구'를 충족한 그는 언덕 위에서 영원히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절망적 시대의 소명, 저항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을 겸허히 돌아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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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키르케고르의 세 가지 실존 단계를 이 시를 보고 떠올린 순간 이는 가능한 가장 간편한 해석일 것이고, 실제로 나 역시 이런저런 의미를 떠올리며 시어 사이를 기워 나가다가 이런 시도를 한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논문을 검색해 보았고, 역시나「바람이 불어」를 종교철학적 관점에서 해석한 논문(유양선, 2014)을 발견했고, 나 역시 나의 부족한 문장력과 말주변보다는 학자의 결과물이 낫다는 확신이 들어 해당 자료를 요약한 뒤 몇 마디를 덧붙였지만, 낯선 글을 낯선 시각으로 접근하다가 유사한 사례를 발견하는 경험은 꽤나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낯선 기계에는 익숙하지만 낯선 말에는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 시는 상당히 매력 없고 불편한 장르처럼 보인다. 말의 부정확함이 의견 대립, 차이화, 반박, 모든 지적 투쟁가의 시행착오를 낳고, 언어가 주는 느긋하고 기다란 피로감의 깊이에 관심을 가지기에 현대 사회는 너무 바쁘고, 우리 정신은 릴스와 숏츠에 길들여져 있어서 올해도 여전히 지나간 짜장면은 돌아오지 않고, 학교 폭력 복수극 속 대사들의 가볍고 명확한 포인트에 감탄할 것이다. 적확함에 교요되어 사이다 결말로의 순치에 열광하는 문화는 저급한 것이 아니라 환상적 권선징악희 허울과 번복을 거치지만 마이너스로 달리는 사회 고발에 나름대로 무기력하게 참여하는 것 아닐까, 어느 대사의 말마따나, 자기비하는 고급 유머가 된 것처럼.


그러나 황현산 평론가의 말처럼 안정된, 따라서 더이상의 반성이 필요 없는 주체의 말로 제도가 현실을 은폐하고 가둘 때, 사물의 현실이 지닌 다른 가능성의 조각난 얼굴이자 알레고리인 타자의 말이 억압될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21세기를 비판하는 영락없는 말들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통용되고 보편화된 의미에만 의존하는 경우 이 억압된 말의 한 뜻이 공유되는 세계에서만 힘을 얻게 되고, 여전히 소외된 일부가 남기 마련이다. 마치 음성 언어를 바탕으로 한 문자 언어가 농인을 타자화하고 자신의 권위를 제어하지 못해 오해할 여지가 없는 비난적 말장난으로 의도적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과잉된 주체성을 잠재울 수 있는 수단으로 나는 수어를 제안했었고(현재 복무하는 곳에서 발행하는 회지에 세계농아인대회 축문을 작성했었다..), 황현산은 시가 추구하는 순수언어를 언급한다. 순수언어는 현실 속에서 또하나의 현실에 닿기 위해 어떤 길도 가로막지 않은 언어이자, 아무에게도 약속되지 않았기에 일상을 전혀 다른 측면에서, 마치 프리즘에 비춘 듯이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주체와 타자가 계속해서 뒤바뀌는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언어이다. 단순히 n분법을 추구하는 억압된 말과 달리, 자유로운 말의 흐름은 그만큼 자유로운 상상력과 끊임없는 해결책을 생산하는 끝나지 않은 언어이다. 오만한 앎과 성급한 질서가 반성하지 않는 현실의 우둔함을 더욱 두텁게 할 때, 자각된 모름과 품 넓은 혼란이 명석성에 이르는 길을 더욱 넓힐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안정과 자유를 구가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불행의 가능성은 자본주의의 승자들 역시 흔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필요를 창출하며 낭비에 취해 있었고, 이 낭비는 기계의 지배력에 의존한 인간의 야욕과 충돌을 창출했다, 인간이 그것을 필요로 만들었고, 이것이 만족스러워야만 했기에. 그래서 낭비되는 만큼 불균형하게 쌓이는 잉여 에너지가 파괴욕으로 분출되어 소모될 수 있다는 불안감과 공포감이 나를 휩싼다. 장 아메리의 처절한 글이 보여주듯이, 정신적인 활동은 물리적인 폭력과 고문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고 무능한 것인가. 형이상학적 죽음과 신체적 빈사 상태에서 사회성이란, 악의 평범성이란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지. 사회적 계약을 통한 자기보존의 약속에 기댈 수 없는 시간을 보낸 뒤 원한 감정을 곱씹다가 '자유 죽음'을 택한 그의 삶이 무색하게 핵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재편성되고 있는 세계는 감히 몰역사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리화되고 기계화된 말들에 중독되고 남용하면서 당장의 혼란과 소요가 두려워 자유로운 말들을 억압하고, 결국 반성할 수조차 없는 현실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미세먼지로 애써 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야스퍼스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여전히 힘과 폭력은 인간세계를 실제로 결정짓는 현실이다. 다만, 유일한 현실은 아니다. 이러한 현실의 절대화는 인간 상호 간의 신뢰 관계를 완전히 파괴한다. 이 현실의 유일화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해묵은 이데올로기에 의존하고 과거의 유사한 사례를 찾아 비판하기 바쁘지만, 그것이 자성의 목소리로 이어지기보다는 여전히 정쟁의 수단으로 남으며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강물의 흐름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리며 무력감에 적응한다. 그러나 타인과의 단절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경쟁의 질서에 경도된 사회에서 집단적인 죄책감이나 형이상학적 죄의 존재를 상정할 수는 있는가? 역사는 그저 보편화된 시대착오의 연속 아닐까, 무언가 공동으로 추상적으로나마 꿈꾸는 사회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나치에 대한 반성과 각성의 언변이 지금의 위기 상황에서 진정으로 유의미한 말장난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사회가 복잡다단하게 파편화된 만큼,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지만 사적이고 시대적이고 특수화된, 알레고리의 힘 역시 건재하게 남아 있다. 지성의 남용이 지성의 상실을 낳았다면, 전복적인 언어들을 통해 파멸 직전에 봉착한 인류의 지성을 다른 측면으로 구축하여, 다른 상상력으로, 다른 필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희망의 끈이 더 삭아 떨어지기 전에 붙잡는 해가 되었으면, 집단적 책임이 꼭 보편의 언어로 해명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 독기 가득한 토끼가 되지 않았으면.



이 글 어딘가...

이승우(1994). 「선고」.『미궁에 대한 추측』. 문학과지성사.

정혜윤(2020). 『아무튼, 메모』. 위고.

황현산(2019). 『잘 표현된 불행』. 난다.

유양선(2014). 「윤동주(尹東柱)의 「바람이 불어」에 나타난 자아(自我) 이해(理解)」.『어문연구』.

쇠얀 키르케고르(2020). 『죽음에 이르는 병』. 세창출판사.

장 아메리(2022). 『죄와 속죄의 저편』. 필로소픽.

카를 야스퍼스(2014). 『죄의 문제』. 엘피.

폴 발레리(2018). 『정신의 위기』. 이모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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