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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여우 Sep 24. 2021

사이보그가 된 철수를 위해*

- 푸코의 장애학을 중심으로

 글은 수업 시간에 다뤘던 임상 증례를 바탕으로  에세이로, 제출본에서 일부 내용을 수정하였다.


   대퇴골에서 골육종이 발견된 15살 철수는 성공적으로 절제술을 받고 의족을 착용하였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신체의 일부를 기계로 대체하게 된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생존 욕구보다 강력한 새로움 편향을 나타내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익숙하지 않음에 대한 두려움을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이 당장의 생존 방식의 변화와 관련된 상황에 놓여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철수가 평소 신체에 대해, 장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의료인은 철수에게 의족이 족쇄가 되지 않도록 돕는 사회적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푸코에 따르면 장애학은 생명·노동·언어의 3요소를 주축으로 한 인간학의 관점에서 출현하였다. 생물로서의 기능과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 노동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존재, 그리고 언어를 통해 상징 세계를 구성하여 지식을 구축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주장**한 푸코는 사회가 이러한 총체적 능력의 일부가 손상되었거나 결핍된 인간을 ‘장애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하는데, 장애학은 이러한 측면에서 의학과 다소 시각 차이를 보인다. 의학이 (굳이 따지자면) 형이하학적 관점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어 장애란 무엇인지, 장애의 종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치료법을 시행해야 하는지를 다룬다면, 장애학은 장애를 구성하는 에피스테메(episteme)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둔다. 즉, ‘장애’라는 지식이 구성된 사회에서, 그 자체의 구성 방식이 어떠하였는지, 그로 인한 권력관계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 바로 (푸코적인) 장애학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피스테메에 관심을 가진다는 점에서, 장애학은 철수의 치료 후 처치 및 관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이러한 부분은 의학과 학문적으로 공동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장애의 의학적 측면(생물학적 손상)만이 아닌 사회적 측면을 함께 고려해야만 철수의 케어를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의학은 신체기능에 이상이 없다는 개인적인 차원의 건강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 에서 ‘정상’과 병리학적 상태까지 고려해야만 한다. (미셸 푸코, 『임상의학의 탄생』, 홍성민 옮김, 이매진, 2006, 77쪽.)


      뻔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문제는 과학적 의학의 계몽주의적 산물의 딜레마이다. 임상적 범주화를 통해 치료의 편의성과 효율성을 위해 설정된 정상성은 자연스럽게 비정상성을 낳았고, 이러한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는 사회적인 분열 수단으로 악용되어왔다. 대부분의 학문이 그러하듯이, 의학 역시 역사적으로 정상의 범주를 지정할 때 (여성 의학을 제외하면) 주로 ‘젊은 남성 성인’이 기준이 되었다. (지금도 특별히 상황은 다르지 않은데, 우리는 체액량(혈장량, 혈액량 등)을 계산할 때 70kg의 남성 성인을 디폴트로 배우기 시작하며, 여성의 체수분량이 남성보다 적다든지, 아동이나 노인의 체수분량은 어떠한지에 대한 내용은 기준값으로 설정된 젊은 남성 성인과의 차이점을 중심으로 언급된다.)


  즉, 이는 곧 장애인을 넘어 여성과 아동이 사회 속에서 '남성 성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로 정의되는 것으로 이어지며, 이렇게 '설정된' 신체적 결함은 소수자성과 결합하여 새로운 권력관계 및 사회적 낙인을 생산할 수 있다. 이러한 의학의 역할을 생각해 보면, 그 의도와 관계없이 종래 사회적 분열이 지속적으로 나타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결국 철수와의 상담을 통해 철수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철수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고 전달하는 등의 의례적인 해결 방식은 철수 개인의 문제 해결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무책임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철수 개인의 문제도 해결해 준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정상성으로의 회귀는 결국 개인적 차원의 건강 상태만이 아니라 사회적 건강 상태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되는데, 철수의 사회, 그러니까 철수와 철수 이외의 사람들 모두 의학이 만들어 둔 틀에 따라 철수의 '비정상'을 '비정상'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삶에 장애가 들어왔을 때, 이미 변화된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대응할 힘을 환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그 역시 또 하나의 권력 관계에서 비롯되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애의 범위와 그 특성을 정의 내린 학문이 의학이고, 그렇기에 정상성이 악용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학문 역시 의학이다. 전문가의 권력으로 '장애'를 범주화한 것 또한 장애를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점에서 의학은 장애학과 함께 사회적 정의justice를 위해 비장애와 장애의 경계를 재고해야 하며, 의료인이 장애의 사회적 인식 변화를 가장 이성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집단 중 하나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신체적 손상이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사회적 차별 자체가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지 타자에 대한 감성을 잃어가는 근대 사회에서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전문 지식의 보유 역시 크나큰 권력이다. 이 권력을 남용하자, 이 땅의 수많은 철수와 사이보그들을 위해.



*제목은 사계절 출판사의『사이보그가 되다』(김초엽, 김원영 공저)에서 차용하였다. 저자 소개에 따르면 김초엽 작가는 후천적 청각 장애와 함께, 김원영 작가는 휠체어와 함께 생활한다.

**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 468쪽. 일부 어휘는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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