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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여우 Oct 02. 2021

무기력을 누릴 수 있는 여유

집돌이의 자기변호

군중 속에는 위계질서가 있고 위계질서는 상호 간의 행동을 규정한다.* 완벽한 통제가 이루어지는 사회주의 체계에서도 위계질서가 없어질 수는 없다, 우리는 비이성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관리자를 요하고, 관리자 또한 인간이기 때문에 비이성적이기 때문이다.


이 위계질서 속에서는 오뒷세우스든 노예든 모두 속박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고 경직된다. 그래서 인간들은 상호 간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좁혀 나가면서 평등의 환상에 빠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 속에서 무기력을 느낀다. 군중 속에서 평등해지려는 노력에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지워내는 과정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제한적인 이타성을 위해 자발적으로 주체성을 지워내는 과정을 지나 군중 속의 무리들과 같은 뜻을 표출하기를 강요받고, 동일한 사상과 구호를 외친다. 막스 피카르트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침묵을 잃게 된다.


소통 수단이 너무나도 발달해버린 지금의 세계에서 인간은 물리적 군중에서 벗어나더라도 단체 채팅 방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며, 재택 근무와 원격 회의의 활성화와 함께 집은 침묵과 휴식의 장소의 역할을 잃기 시작했다. 이렇게 우리는 능동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기회도 함께 잃어버리고, 코기토는 아침부터 밤까지 끊이지 않는 카톡 알림 소리의 심연 속으로 사라진다.


끊이지 않는 타인과의 연결고리는 무기력을 즐길 기회를 주지 못한다. 진득하고 지겨울 정도로 무기력 속에서 헤엄치는 호사를 누릴 수 없게 한다. 무기력은 해소되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축적된다.


이렇게 밀도가 높아진 무기력은 억눌린 주체성과 결합하여 타인에 대한 혐오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이방인의 주체성은 인정할 수 없다. 완벽하게 객체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헬조선 담론 속의 평등이 완성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시끄럽다. 시끄럽기 때문에 목청만 높아진다.

세계는 스마트폰의 발열과 함께 너무도 격앙되어 있다.

입 다물 시간이 필요하다.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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