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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여우 Jan 18. 2022

사회복무요원 여우씨의 일일

사회복무요원 여우씨의 일일

  뇌에서 브로드만 영역 41번과 42번은 일차청각피질이다. 청력이 있는 사람의 경우 여기에서 입력된 청각 자극이 처리되는데, 농인의 경우에는 시각 자극에 반응하여 이 부분이 활성화된다. 그리고 시각 정보를 전달하는 시각신경유두는 농인이 비(非)농인보다 농인이 더 두껍고 그만큼 시야도 넓다. 나는 나보다 시야가 넓고 시각 자극에 반응하는 부분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하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 역시 업무 도중 쉬는 시간에 읽은 책(1)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내내 해부학 수업을 영어로 듣다가 시각신경유두라는 말을 보고 optic disc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보통 '유두'라는 말은 'mammillary'라는 단어가 붙은 용어를 해석할 때 활용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optic disc, 그러니까 시각신경유두가 정말 '유두'라고 부를 만큼 젖꼭지같이 생겼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작은 동그라미의 형체와 비슷하기만 하면 되는지, 한자 교육이 필수가 아닌 세대가 도래하고 있고 도래했는데 영문 의학용어 대신 한자가 섞인 한글로 바꾸는 행위가 합당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역시나 유두와 디스크를 연결짓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유두를 디스크같이 생겼다고 한다면 그 편이 차라리 조금 더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사실 이미 'disc = 유두'를 학습했기 때문에 기만적으로 넘겨짚어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글을 읽은 사람들 역시 optic disc를 보자마자 '와, 유두같이 생겼다!'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회를 놓쳤을지도 모르겠다.


  앞 문단을 쓰기 위해 별로 읽어 볼 필요는 없지만 생각난 김에 검색해서 찾아본 시각 자극을 통한 일차청각피질의 반응과 관련된 한 논문(2)을 읽어보는 동안 엄마랑 아빠가 들어와서 내 뒤에서 구내염을 이야기하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다, 별로 긴 대화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연스럽게도 말싸움 직전으로 끝났고,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 잠깐 슬프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면 이 슬픔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불편감으로 바뀌었고, 약 2시간 전 디지털 OTP 발급 문제로 청약 공모주 신청이 불가능한 것 때문에 혼자 시간을 버리고 화를 내다가 구역질을 했던 것이 다시금 생각났고, 위가 쓰려오면서 동시에 유두 부분을 누군가 안에서 밖으로 찌르는 것이 느껴졌고, 그 통증을 응원한다는 듯이 히터가 윙-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도 엄마는 씻고 난 후 샤워볼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구경하는 고양이를 위해 화장실 바닥을 닦을 것이고, 회사에서 짜증나는 전화를 주고받은 아빠는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또다른 고양이에게 말을 걸다가 잘 것이고, 결국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는 속담은 어쩌면 부부싸움을 지켜보는 자식을 두고 나온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고래들이 새우를 건들지 않더라도 새우는 고래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기만 해도 무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새우는 바퀴벌레 친척이라 먹지 않는 나라가 있다는 인터넷 정보를 떠올렸고, 우리집 어딘가에 살지도 모르는 바퀴벌레가 바다에 빠진다면 과연 먹을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았는데 굳이 새우를 먹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바퀴벌레가 그레고르일지도 모르고, 그레고르는 어디에나 존재할 것 같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레고르가 아닌 사람은 바퀴벌레보다도 이상할 것 같다.


  내가 바퀴벌레가 되면 가족들이 나를 잊어버릴까, 아니면 나와 바퀴벌레를 당연하게도 같다고 생각할까? 원래의 내 모습을 얼마나 기억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희미하게 떠오르는 이미지 말고 선명하게, 마치 인간이었던 나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정도로 확실한 기억이 언제까지일까? 기억하지 않든, 기억하지 못하든 간에, 어쨌거나 기억이 없는 상황 속에서 인간은 습관을 따르기 마련이고, 습관에 이골이 난 옆 사람은 습관적으로 습관의 답습을 막기 위한 답습을 하고, 또 똑같은 반응이 이어지고, 기억의 부재 역시 답습의 대상이 되고, 고쳐주려고 하는 것조차 어쩌면 악습이 아닐지, 어느 한 편이 꼭 포기해야 하는 것이라면 포기할 생각이라도 있는 사람이 포기하는 게 정말 맞는 것인지, 이런 식으로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이게 바로 가스라이팅이 아닌지, 어쩌면 당하는 사람은 스스로 더 당하게 만들어버리는 사람이 아닐지, 이런 식으로 가스라이팅은 끊임없이 번식하는 게 아닌지, 가스라이팅은 마치 바퀴벌레같다,고 생각했다.


  아까 일하고 있는 동생한테 내가 갑자기 잠적하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다. 우리는 습관처럼 매일 일어나서 잘 때까지 틈만 나면 연락을 하는 사이이고, 하루이틀만 하지 않아도 어색함을 느낄 정도로 연락을 자주 한다. 실제로 얼굴을 본지 오래되었지만, 나랑 같이 학원을 다녔던 당시의 동생 얼굴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땀 때문에 젖은 티셔츠 등판까지도, 그리고 엄지발가락이 얼마나 동그랗게 생겼었는지도. 동생은 걱정될 것 같다고, 심심할 것 같다고, 그리고 코로나 걸렸을지 궁금할 것 같다고 했다. 쇼펜하우어와 존 듀이를 다룬 지문에 대해 학생이 남긴 까다로운 질문의 답변을 고민하던 사람이 나 죽으면 어떨 것 같냐는 말과 유사한 뜬금없고 불편한 물음을 들은 상황 치고는 꽤나 명쾌했고, 이것보다 더 좋은 대답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내가 바퀴벌레로 변하면 걱정하고 심심하긴 하겠지만 코로나에 걸렸는지 궁금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집 고양이들은 내가 바퀴벌레로 변하면 고양이답게 나를 앞발로 던지고 가지고 놀면서 서서히 죽여갈지, 아니면 나라는 걸 기억하고 꼬리에 힘을 주고 더듬이에 이마를 부벼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바퀴벌레로 변한 나보다는 내가 가지고 다니던 가방의 지퍼가 열린 틈으로 머리를 집어 넣는 것에 더 관심이 있을 것이고, 내가 다가가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지만 가만히 있는 내 가방에는 먼저 다가가는 것을 보면 나는 지금 바퀴벌레보다도 못하구나,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바퀴벌레에게 실례가 아닐지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1) 모헤브 코스탄디, <<신경가소성>>(2019), 김영사.

(2) Whether you hear it or see it, it’s the same. Marcin Szwed, Łukasz Bola, Maria Zimmermann.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Aug 2017, 114 (31) 8135-8137;

DOI: 10.1073/pnas.1710492114

제목의 배경으로 사용된 사진 출처 역시 위 논문과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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