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무요원 여우씨의 일일 - 15
죽음에 대한 어느 책에서 노인의 성욕을 짧게 언급한 부분이 있었다. 치매에 의해 비로소 자유로워진 자아가 교양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욕망을 해방시키고, 그래서 요양원에는 요로 감염 환자가 제법 많다고 한다. 노인의 성욕은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상 범죄 사건이나 특이한 페티시즘의 예시 외에는 접할 길이 없기에 제법 흥미로웠고, 임종을 맞이할 예정인 사람의 자위 행위는 무언가 혁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개인적인 층위에서의 소소한 위반과 일탈, 진득한 체액만큼 녹진하게 농축된 세월의 회한. 그래서일까, 점심시간에 한 할아버지가 건낸 쪽지가 기억에 유난히 남는다. 내용은 별 게 아니었다, 핸드폰 연락처에 저장할 번호와 이름뿐이었다. 그러나 ‘혜란눈아’는 이미 할아버지와 영상 통화까지 한 기록이 있었고, 나는 그저 ‘혜란누나’로 바꿔준 후 연락처에서 이름을 찾는 방법만 다시 알려드리고 서툴게 적힌 글자들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쪽지 위에 유난히 단단한 고딕체로 진하게 적힌 문구, 발기부전 치료제.
성욕이란 무엇일까, 피투성이로 출생해 핏기가 사라질 때까지, 은은하게 숨어서 신경을 자극하는, 과잉된 에너지라고는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데도 신음을 뱉으며 몸을 떨리게 하는 오르가즘이란 무엇일까. 일찍이 발기를 거슬려하고 에로티즘은 그저 길티 플레저로 주지적으로만 받아들인지 오래인 나에게는 이제는 거의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감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노인의 사례들이 묘한 귀여움(+내 젊음에 대한 간질거리는 죄책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왜일까.
과거와 현재가 착종된 시대착오성을 인정하고, 단절과 계승이 혼합된 동시대성을 인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정 경험에 직접 참여한 사람과, 목도한 사람과, 사후에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보고 들은 사람이 하나의 마음을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윤리적 차원의 파시즘일 것이다. 게다가 컨템포러리라거나 독사(doxa)라거나 에피스테메라거나, 이런 건 언제든지 바뀌기 마련, 나조차도 이현령 비현령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세대 초월적 태도로 변덕스럽게 선택적으로 모순된 말들을 늘어놓는다, 내 기억의 트랜스포손. 신경 가소성은 얄궂게도 기억의 편린들을 마음껏 매듭지었다가, 풀었다가, 어려우면 싹둑 잘라버렸다가,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와 똑 닮았지만 묘하게 뒤틀린 ‘ae-나’가 그리는 환영과 같이 기억을 안개에 휩싸이게 만든다, 아니, 기억 자체가 안개처럼 떠다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섹스는 하기 싫지만 가끔 섹스어필은 하고 싶은 것처럼, 사정감을 느낀지는 오래되었지만 노인들에게 공감한 것처럼.
이 글 어딘가..
홍영아(2022). 『그렇게 죽지 않는다』
김홍기(2022). 『지연의 윤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