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 더 스킨 (Under the skin, 2013)

영화는 솔직한가?

by 늘픔

Under the skin : 솔직하게, 속마음은

비록 지금은 자주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 표현이지만, 제목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숙어다. 굳이 찾자면 To be honest와 비슷한 맥락을 가진 이 구어를 굳이 파헤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포인지 행성인지 모르는 동일한 색의 비정형적 물체가 포개어지는 순간, 한 여성의 목소리는 F로 시작하는 일련의 단어를 읊는다. Feel, Film, Filmed, Films, Girls, Fail, How, Now, Fall, Falls, Cell 까지.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단어들의 집합체는 눈동자의 정면을 카메라 초점에 맞춘 채 서사의 시작을 알린다.

현악기의 찢어지는 소리가 고조되며 오토바이 사내의 모습을 숏은 비춘다. 그리곤 길가에서 한 여자를 들쳐 매고 나온다. 이윽고 알 수 없는 여자(스칼렛 요한슨)가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여자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옷을 잃은 여자의 눈에선 눈물이 흐른다. 우리는 이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여기서 비공식적인 공식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옷을 빼앗긴 여자를 문자 매체 혹은 이전 세대의 영화로, 옷을 빼앗은 여자인 스칼렛 요한슨은 영화 혹은 현대의 영화로 치환할 수 있다. 즉, ‘옷을 빼앗아 입는다’의 개념은 시대에 따른 매체의 주도권이 이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옷을 갈아입은 여자는 커다란 밴을 혼자 이끌고 사람이 많은 쇼핑몰로 간다. 그녀를 잡는 숏의 앵글은 그녀의 몸매가 드러나는 뒤태를 잡는다. 숏은 그녀의 정면을 잡지 않는다. 이후, 여자는 새로운 옷들과 화장품을 산다. 그녀는 화장품을 이용해 변신하기 시작한다. 거대 복합 쇼핑몰은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그곳에서 현대 과학 기술의 발전인 화장품을 이용한 화장을 한다는 것. 영화에 자본주의가 개입되고 새로운 색깔이 입혀지기 시작한다. 자본은 영화에 색채를 입히고 다양성을 입힌다. 이전 시대의 영화에서 거대 자본이 헐리우드에 투입되어 흑백 영화에서 컬러 영화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영화에 스킨이 씌워진다.

이 영화의 주요 숏은 알 수 없는 그녀인 스칼렛 요한슨이 남자들을 유혹하는 것이다. 커다란 벤을 혼자 이끌고, 남자는 유혹하는 이 숏들 중 실제 배우가 아닌 일반인들이 섞여 있다. 그럼에도 영미권인 스코틀랜드인들은 미국인인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전 세계적인 배우인 스칼렛 요한슨을, 그것도 같은 영미권 문화에 속해있는 스코틀랜드에서 알아보지 못한다는 숏을 보여주는 이유는 분명하고 자명할 것이다. 영화의 가장 큰 시장이자 주체는 헐리우드다. 전 세계 다른 나라 영화관에도 헐리우드 영화가 걸린다. 하지만 각자의 문화가 강한 나라에선 대규모 헐리우드 영화도 힘을 쓰지 못한다. 영화는 미국의 거대 영화 시장이 스코틀랜드라는 작지만 지역색이 강한 시장에서 힘의 우위에 있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반증으로 이 영화를 찍을 때, 특히 이 장면을 찍을 때 실제 일반인들에게 몰래카메라 형태로 촬영을 했다고 한다. 만약 이 일련의 숏들이 불필요한 장면이었다면 삭제되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인들에겐 셀틱이라는 축구팀이 눈 앞에서 길을 잃고 차를 운전하는 헐리우드의 여배우보다 중요한 것이다.

인정 많은 체코 남자가 자연에 휩쓸려가는 가족을 구하려 하지만,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가족과 함께 몰살당한다. 하지만 인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알 수 없는 여자는 오히려 남자의 머리를 돌로 내려쳐 데리고 간다. 그리고 그의 남은 물건들을 오토바이 사내가 수거해 간다. 남겨진 아기는 자연의 외풍을 맞은 채 실종된다. 미국 헐리우드 영화는 지방색이 강한 지역에 침투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서로 연대를 하려 하지만, 외국 영화의 거대한 자본(자연)에 굴복당한다. 헐리우드발 미국 거대 자본은 그들의 고유 영화 산업까지 쓸어가 버렸고 남은 노동자들은 길거리에 나앉아 자연의 찬바람을 맞으며 시대를 탓하며 실종 뉴스에 이름을 올릴 뿐이다.

그녀가 남자들을 지속적으로 유혹해서 데리고 가는 곳은 어두컴컴한 방이다. 이곳에서 그녀는 남자들을 알 수 없는 바닥 아래 심연 속에 가둔다. 남자들은 피부(스킨)만 남은 채, 그녀의 먹잇감이 된다. 캄캄한 곳에서 여자를 따라가는 남자. 어딘가 익숙한 공식이 다시금 떠오른다. 영화관이라는 심연의 공간에 영화라는 매혹적인 것을 보는 관객. 그리고 그들 산업 깊숙이 침투하여 그들을 지배한다. 그리고 피부 밑에 있는 정신을 미국 문화의 틀 속으로 끼워 넣고 강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헐리우드발 미국 문화의 지배의 시작인 문화 침투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다 만난 병을 앓고 있는 남자는 심연에서 꺼내 놓아준다. 마치 그는 최초 인류의 모습을 보이지만, 오토바이 사내가 다시 납치한다. 그리고 그 반대에서 한 할머니가 애처로운 광경으로 이 모습을 지켜본다. 이 남성은 일반적 남성들과 다른 ‘비정상인’으로 치부된다. 관객의 비정상은 무엇을 의미할까. 관객의 탈헐리우드화? 관객의 탈극장화? 지배적 헐리우드 영화에 반대하여 극장을 뛰쳐나가는 사람들을 납치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헐리우드와 관계되어 있지만, 헐리우드 영화를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지켜보는 이. 이들은 자본가다. 헐리우드 영화에 자본을 대는 자본가. 그들은 끊임없이 헐리우드 영화가 끌어온 관객들의 정신과 물질을 바탕으로 생명을 연장한다. 결국 태초의 인간을 표방하던 남자는 자본에 의해 납치당해 잠식당하고, 다시 극장으로 끌려갈 것이다.

여자는 혼란을 겪은 듯,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혼자 떠난다. 상실을 겪은 여자는 한 남자를 만난다. 지금까지 육체적 만남을 이루고자 했던 남성들과는 달리 정신적 교류가 이뤄진다. 모든 일련의 사건을 뒤흔들 듯 판을 뒤집는다. 그리고 깊은 고성으로 들어가 여성과 육체적 관계를 가지려 한다. 하지만 남성은 힘겨워 보이고, 여성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표정을 지은 채 성기를 확인한다. 그리곤 숲으로 떠난다. 여태껏 육체적 관계를 빌미로 남성을 유혹하던 여성은 정서적 교감을 이룬 남자와 육체적 관계를 앞두고 상실을 겪는다. 이는 정서적 상실이 아닌 육체적 상실로 보인다. 성기의 상실. 인간 본연의 상실. 여성 본연의 상실. 결국 헐리우드 영화는 영화라는 본질의 속성을 잃어버린 채 화려함에 의존한다. 본질은 화려함이라는 스킨에 매몰되었다.

여자는 모든 것을 상실한 채, 울창한 침엽수림으로 떠난다. 그리고 도움을 주는 듯한 남자는 여자를 강간하려 한다. 이윽고 피부가 무너지며 본 실체가 드러난다. 드러난 실체는 강간하려던 남자에 의해 소각된다. 오토바이 사내는 관망하고, 소각되는 실체는 하얀색 눈 위에서 연기만을 내뿜은 채 사라진다. 연기는 상승하지만, 눈은 하강한다. 헐리우드 영화는 영화라는 실체와 본질이 드러나지만, 이내 소각된다. 결국 영화는 헐리우드의 속성을 버리지 못한다. 자본은 영화를 지배하고, 관객에 의해 영화의 본질은 매몰되고 소각된다. 세상을 보여주는 영화는 자본에 의해 움직인다. 그것이 거대 헐리우드일지라도. 진실한 영화는 없다.

영화는 진실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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