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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치욱 Apr 19. 2021

<노매드랜드>에서 읽어낸 윤회

<윤희에게>와는 무관합니다.

헐리우드에서 윤회(輪回) 사상을 소재로 한 영화를 꼽으라면 대표적으로 워쇼스키 자매의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있다. 인간이 죽어도 그 업에 따라 육도(六道)의 세상에서 생사를 거듭한다는 불교의 교리인 윤회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6개의 에피소드가 나열되어 있다. 그러나 동양의 사상을 다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극중 가상 도시 ‘네오 서울(Neo Seoul)’에 일본풍 양식을 섞어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서양의 동양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태도)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 해외 포스터(출처=다음 블로거 '잠용')


반면 영화 <노매드랜드>는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쓰인 동명의 원작 서적에 동양인 감독이 동양적 사상을 접목한 작품이다.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클로이 자오(Chloé Zhao)는 미국에서 영화를 배운 중국계 감독이다. 그가 기존에 연출한 영화들은 유수의 영화제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미국 인디 영화계에서 주목 받았다. 또한 마동석 배우가 출연하여 화제를 모은 마블의 <이터널스>의 감독으로 지명되어 다시금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번 <노매드랜드>를 통해 베니스 영화제와 골든글로브 등 각종 시상식을 휩쓸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이번에 골든글로브 감독상을 수상하셨다. Wow.(출처=연합뉴스)


원작은 미국에서 고정된 주거지 없이 자동차에서 살며 저임금 떠돌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삶을 한 노년 여성을 중심으로 밀도 있게 묘사한 논픽션이다. 책은 주로 2008년 금융 붕괴의 여파로 타격을 입은 이들의 삶의 형태가 어떻게 무너지고 변화되었나를 조명한다(네이버 [노마드랜드] 책 소개 참조).


원작 서적. 하단의 부제에서 벌써 사회문제를 고발하려는 의도가 느껴진다.(출처=yes24)


그러나 영화는 원작의 소재를 거의 그대로 가져오지만 이야기의 방향성은 크게 다르다. 주인공 '펀'이 밴을 타고 다니며 아마존 물류센터, 캠프 지기 등의 일터에서 노동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것, '펀'과 '데이브' 외의 원작 속 등장인물(조연인 ‘린다 메이’가 원작에서는 주인공이다)이 그대로 등장하는 것과 같이 외형은 원작과 거의 흡사하다.


영화 속 아마존 물류센터. 쿠팡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해서 소름돋았다.(출처=폭스 서치라이트 픽쳐스)


반면 원작에서 드러난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영화에서 흔적만 찾아볼 수 있는 수준이다. 아마존 물류센터에서의 노동은 그저 평범한 일상처럼 여겨지고(이 점에서 영화가 비판을 받고 있다) 부동산과 금융시장에 대한 비판은 순간순간의 대화로 지나칠 뿐이다. 영화는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에 집중한 원작의 거시적 관점을 미시적으로 환원하여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윤회가 이야기를 관통하는 핵심이 된다.




이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는 영화 초반에 언급되는 '펀'의 결혼반지다. 남편을 사별로 떠나보냈지만 반지를 낌으로써 그와 이어져있다고 느끼게 되는데 그 정서로 보나 반지가 가진 원형의 모양새로 보나 ‘순환’이라는 동양적 관점을 읽을 수 있다.


흔히 서양의 사고방식은 직선적인 반면 동양의 그것은 순환적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죽음에 대한 관점이 비교되는데, 서양에서 사람은 죽어서 천당이나 지옥에 가고 그것으로 끝이 난다. 반면 동양에서 사람은 죽어도 다시 환생하며 삶과 죽음은 이어져 반복된다는 순환적 사상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윤회다.


극중의 대사에서도 윤회의 코드를 짚어낼 수 있다. 노매드 커뮤니티를 이끄는 ‘밥 웰스’는 “이 생활을 하면서 가장 좋은 건 영원한 이별은 없다는 거예요. 늘 ‘언젠가 다시 만나자(see you down the road)’고 하죠.”라는 말을 한다. 또한 '펀'은 “기억되는 한 살아있는 거다.”는 말을 한다. 이는 극중 동료 ‘스웽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도 노매드들이 죽음을 삶과 이어진 것으로 여기며 '스웽키'를 추억하는 태도와 맞닿으며 윤회의 코드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역시 실존인물 '밥 웰스' (출처=The Guardian)


이야기의 순환적인 구조 역시 윤회의 코드를 드러낸다. 주인공 '펀'은 자신이 지내던 도시 네바다를 떠나 떠돌이 생활을 시작하며 여러 여정을 거친 뒤 다시 자신의 도시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목적지로 다시금 출발하며 영화가 마무리되는데 이것이 큰 틀의 순환이다. 그리고 '펀'은 네바다에서 출발하여 캘리포니아, 사우스다코타, 네브래스카, 아리조나 등을 거치는데 한 곳에서의 여정이 끝나면 다른 곳에서의 여정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작은 순환구조가 나열된다. 큰 틀의 순환구조 속에 작은 순환구조가 담겨있는 모양새인 것이다. 재밌는 점은 영화 속에 다섯 장소가 등장하고 마지막에 '펀'이 네바다에서 다시 새로운 목적지로 출발하게 되는데 그 미지의 장소까지 합하면 여섯 개의 장소가 된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윤회의 육도에 대한 상징이 완성된다.


티저 포스터 속 번호판 이미지. '펀'이 머무는 장소마다의 번호판을 콜라주한 형태. 마지막의 'AND'에서도 영화가 강조하는 연속성이라는 주제가 엿보인다.(출처=imdb)


영화 <노매드랜드>가 제시한 윤회의 코드와 유사한 영화를 고르라면 비슷하게 윤회를 다룬 영화보다는 <컨택트(원제: Arrival)>를 고르고 싶다. 테드 창(공교롭게도 대만계 미국인이다)의 SF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지구로 온 외계 생명체와 언어학자의 교류를 통해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외계의 관점으로 표현된 순환적 사고는 사실 이 글에서도 계속 언급한 동양적 사고와 유사하다. 그리고 외계의 언어가 원형으로 표현되는 점에서 이를 뚜렷하게 읽을 수 있다.


영화 <컨택트(Arrival)> 스틸컷. 주인공인 언어학자 '뱅크스'가 외계와의 소통을 위해 들고 있는 문자의 모양도 원형이다.(출처=네이버 영화 DB)


<노매드랜드>와 <컨택트(Arrival)>가 <클라우드 아틀라스>와 다른 점은 대놓고 동양적 사상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문화의 융복합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현대에 들어서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서양에서 제작된 작품에 동양적 사상을 자연스럽게 녹여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굳이 동서양을 구분하지 않고도 그 의미를 받아들이게 하는 방식을 채택한 듯하다. 동양인 감독이 만든 작품이라서 동양적 코드를 연상한 사고과정이 다소 편견에 의한 것일 수도 있으나 작품의 흥미로운 감상 중 하나로 봐주었으면 좋겠다.


신뢰의 이름. 프랜시스 맥도먼드. 짱짱!!(출처=네이버 영화)


+) 영화는 감독의 취사선택으로 인해 원작과 달리 '삶'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는데 내 취향에 꼭 맞지는 않았다. 다만 미국의 대자연과 실제 노매드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낸 점에서 영화는 '노매드랜드(Nomadland)' 그 자체였다. 그리고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연기는 역시나 압권. <파고>의 주체적 여성이 <쓰리 빌보드>에서의 상실을 거쳐 <노매드랜드>로 당도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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