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함께하고픈 영화로 먹고 살다가 어정쩡한 시기에 쫄딱 망해버린 부산 말씨의 사랑스런 전직 영화 프로듀서 '찬실'.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던 2020년 3월의 텅 빈 극장에서 홀로 스크린 속 그를 마주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의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를 좋아하던 타입이라 그런지 재미를 못 느껴 실망했는데 지금은 이 영화에서 해소되지 않는 서운함을 느꼈다.
공식 포스터(출처=네이버 영화 DB)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는 영화를 찬미하는 순간들이 녹아있다. 그 중 시작과 끝을 언급하려 한다. 우선 '찬실'이 실직하게 된 원인인 '지감독'의 사망사건. 영화의 도입부에 나오는 이 장면에는 4:3의 화면비가 사용되었다. 도입부의 그 장면이 끝나고 영화는 종일 16:9의 화면비를 유지하는데 이는 '찬실'의 상황을 함축하여 표현한다. 16:9의 화면비는 1950년대 TV의 보급으로 영화 산업이 위협받을 때 등장했다. 기존의 4:3 화면비보다 가로가 넓어서 TV와는 차별화된 몰입감을 줄 수 있었다. '찬실'에게 '지감독'의 죽음은 자신의 실직으로 이어져 생계는 물론이고 삶의 방향성마저 위협받는 사건이다. 그러나 '지감독'의 죽음 이후 오히려 '찬실'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게 된다. 기존의 삶(4:3 화면비)이 위협받을 때 오히려 새로운 길(16:9 화면비)을 찾는 것을 묘사하는 방식은 무척 영화적이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 컷(출처=네이버 영화 DB)
영화의 결말은 '장국영'이 스크린 속 영화를 보고 하염없이 박수를 치다 극장을 나서는 장면이다. 이때 나오는 영화는 여러 모습의 선로를 달리는 기차의 모습이다. 아니, 사실 기차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영화의 시초는 너무나도 유명한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이다. 에디슨은 뤼미에르 형제에 앞서 1891년 영상 시청기구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발명한다. 그러나 키네토스코프는 혼자서 장치 속의 영화를 들여다보는 형태다. 반면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발명한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는 영사 기능이 있어 하나의 화면을 여러 관객이 모여서 볼 수 있었다. 비로소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기차의 도착>에서 기차는 화면을 바라보는 관객을 향해 다가온다. 반면,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마지막 장면 속 영화의 기차는 관객의 시점 상 앞으로 나아간다. 즉, <기차의 도착>의 기차와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기차의 도착>은 영화라는 매체의 도착이자 과거인 반면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기차는 영화의 새로운 출발이자 미래를 상징한다. 또한 뤼미에르의 기차는 화면 속에 드러난 특정한 기차의 모습인 반면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기차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기차는 특정한 영화가 아니라 미래의 모든 영화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장국영'이 영화의 미래를 향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극장을 퇴장하는 것. 역시 무척 영화적이다.
다만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영화에 대한 찬미가 가득하지만 영화인에게 사소한 서운함을 남겼다. 극중 영화사 대표는 실직한 '찬실'을 만나 대화하다 이런 말을 남긴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 컷(출처=네이버 영화 DB)
“(지감독의 영화는)막말로 찬실이같은 피디가 없어도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는 영화라고. 알지?”
영화사 대표는 이전에 '찬실'과 일하면서 어쩜 그렇게 일을 야무지게 하냐며 한국영화의 보배라고까지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결국 감독은, 의도치 않았겠지만 영화 프로듀서가 아무리 일을 야무지게 한들 영화 제작에 큰 의미는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아픈 말을 듣고 돌아온 '찬실'은 살고 있는 주인집 할머니의 영화 프로듀서는 뭐 하는 직업이냐는 물음에도 "저도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해버린다. 이후 '장국영'의 진심어린 조언을 듣고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던 '찬실'은 영화 프로듀서가 목이 말라서 꿨던 꿈이었고 이는 행복이 아니었다고 결론짓는다. 그러고는 시나리오를 쓰며 영화를 만드는 일을 시작한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 컷(출처=네이버 영화 DB)
영화는 그게 끝이다. 그럼 영화 프로듀서는 정말 영화 만드는 데 별 의미 없는 직업인가? '찬실'은 그 생각에 동의하고 영화를 직접 만드는 ‘의미 있는 일’로 뛰어든건가? 심지어 이 영화는 홍상수 영화의 프로듀서를 도맡아 온 김초희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여서 더욱 사실성이 부여된다. 감독은 정말로 영화 프로듀서를 비롯해 감독과 작가를 제외한 영화 산업의 수많은 종사자들이 사실 영화 만드는 데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하려는 건가?
이는 영화 마케터로 일하면서 부리는 약간의 투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섭섭함은 사소할 때 더 오래 남는 법이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영화에 대한 찬미를 가득 보낸 만큼 영화인에게도 조금의 격려를 주었다면 어땠을까. 영화 프로듀서로서의 좌절을 영화감독(작가)가 되는 방식으로 극복하는 일은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영화 프로듀서에 대해 영화 속에서 내린 야박한 평가를 회수하지 못한 채 끝낸 것을 지적하고 싶다. 영화를 만드는 데 모두의 노력이 절실한 것을 본인이 제일 잘 알면서. 그렇게 가시면 어떡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