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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치욱 Sep 18. 2021

그래도 너는 좋아하는 일 해서 좋겠다는 친구들에게

내가 영화 보는 걸 좋아하지 영화 관련 허드렛일을 좋아하는 건 아니잖니

이번 추석은 영화마케터가 되고 나서 맞는 첫 명절이다. 어느덧 5개월차 영화마케터, 이제 수습 기간도 뗀 어엿한 사원이 되었다!(늠름) 고작 5개월차가 무슨 할 말이 있기에 글을 쓰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영화마케터의 5개월은 아마 다른 직업의 5년 쯤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물론 과장 조금 섞었다) 다사다난했다.


입사 후 첫날, 나는 회사에서 지금 진행하고 있고 곧 진행할 영화 세 편을 몰아서 온라인 스크리너(내부 관계자를 위한 영화의 견본)를 관람했다. 첫 출근으로 긴장되는 마음을 한켠에 지닌 채 세 편의 영화(그것도 한 편은 극영화, 나머지는 다큐멘터리)를 내리 보느라 졸음이 쏟아졌지만 눈을 부릅뜨고 완주하는 데 성공했다. 첫날은 그렇게 순조롭게 흘러가나 싶었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 순도 100%의 햇병아리에게 이것저것 업무가 주어졌고, 마치 훈련소에 처음 발들인 훈련병마냥 엄청난 긴장 상태로 실수를 연발했다.


더구나 입사하자마자 회사는 기존 라인업 대비 큰 사이즈의 영화를 맡고 있었고, 업무에 합류한 나는 말 그대로 오줌 눌 새도 없이 마냥 일만 했다. 게다가 업무를 배우는 데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날의 업무와 매일 참조되는 업무 메일을 퇴근하고도 복기하면서 어떻게든 프로세스를 익히려고 노력했다. 또한 내가 메모하는 습관이 좀체 없는 것도 업무 적응에 어려움을 겪게 한 요인이었다. 평소에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도 선생님이나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그저 멍 때리듯 듣고 머릿 속에서 이해하고 넘기는 타입이었다. 친구들 중에는 펜에 불이 나게 필기를 하는 유형도 있었지만 나는 내가 귀찮고 내키지 않는 건 좀체 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은 시건방지지만 팔짱 끼고 수업을 관전하곤 했다.


아무튼 훈련소의 약 1개월은 민간인에서 군인이 되는 과정이듯이 입사 후 3개월의 수습 기간은 대학생에서 직장인이 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롭게 생활했던 습성이 조직이라는 틀 속의 개인으로 재단되고 성형되는 시간이었다. 다만 내가 오판했던 점은 영화마케터는 다른 직업과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영화 일이라고 다른 산업군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직업의 세계 중 하나였고 나는 그 세계 속에서 아주 작고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적은 돈을 벌어도, 워라밸이 좋지 않아도 영화마케터가 되기로 결심한 데에는 그래도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였다. 하지만 일을 한다는 것, 특히 조직 속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절대 즐거울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혼나거나 잔소리 듣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라 남에게도 절대 화내고 잔소리하지 않는다. 물론 그 덕에 학원 알바를 하면 학생들이 나를 만만하게 보고, 군대에서도 간부에게 후임에게 관심 좀 가지라(필요한 업무를 알려주고 인간적인 관심은 충분히 가졌다. 여기서의 관심이란 적당히 기강을 잡는 '관리'를 뜻한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어쨌든 내가 실수를 하거나 지시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대표님에게 혼나거나 잔소리를 듣기 일쑤였고, 그덕에 일을 하면서 내가 또 실수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긴장 상태였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장이 말썽인 나는 직장을 다니면서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장염에 걸렸고, 최근에도 새벽에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다 온몸에 열이 나 오전에 반차를 하고 오후에 재택 근무를 했다(회사 규모가 작아서 사원 한 명이 빠지면 업무에 차질이 큰지라 연차도 못 냈다). 돈을 버는 일이 아니라면 누가 혼을 내고 잔소리를 하겠냐마는 영화마케팅도 결국 노동의 대가로 돈을 벌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상사나 고용주로부터 질책이 뒤따른다.


또한 영화마케터는 다른 마케터 직군의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챙겨야 할 게 워낙 많다. 영화마케팅에서 제법 비중이 큰 업무는 기자들에게 보낼 메일링 글자료를 작성하는 일이었는데 이 부분은 내가 평소에 글 쓰는 일에 어려움을 격지는 않아서 괜찮았다. 그러나 예고편, 포스터 등의 선재 일정을 관리하는 일이라든가 개봉일이 다가오면 기자 혹은 영화프로그램 담당자에게 전화를 돌려서 시사회 참석이나 매체 노출 등의 검토를 부탁하는 전화를 돌린다든가 언론/배급 시사회 때는 직접 현장의 세트를 설치하고 표를 배포하고 배우들 동선을 체크하는 등... 아마 ai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시대가 온다고 하더라도 AI에게 영화마케팅 업무를 맡기면 "하기 싫어요!" 외치고 도망가지 않을까? 하는 웃픈 상상을 해본다.




그래서 요즘 나는 만나는 친구들마다 허튼 생각 말고 성실히 준비해서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 가라고 당부한다(물론 이들 직장이 성실하게 준비한다고 해서 쉽게 덜컥 갈 수 있는 직장은 아니다). 직장에 유토피아는 없으니 확실하게 담보되는 조건이 있는 곳을 택하라는 것이 요지다. 즐거움을 찾아 떠난 영화마케팅에는 즐거움은 없고 적은 돈과 낮은 워라밸만 남았다. 반면에 '공'자 들어가는 직장은 워라밸이나 정년이 어느 정도 보장될 것이고 대기업은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니까.


최근에 다양한 직업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서 대기업 배급사의 영화마케터가 출연해서 직군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그 영상을 유튜브 클립으로 보면서 영화마케팅 업무의 아주 밝은 면만 나오는데도 트라우마가 발동되는 느낌이었고 언론/배급 시사회 장소로 많이 사용되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의 등장씬은 킬링 포인트였다. 언론/배급 시사회 장소 투 톱,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와 CGV용산아이파크몰은 마치 출신 군부대 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는 것처럼 절대 영화 보러 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영화마케팅을 하면서 하나 확실하게 얻는 것은 바로 보람이다. 아마 이 보람 때문에 계속 스트레스 팍팍 받아가면서 영화마케팅을 하지 않을 까 싶다. 특히 내가 다니는 회사는 독립영화를 전문으로 마케팅하는 회사인데, 나는 지금 고르라고 해도 상업영화 마케팅 회사에 가지 않고 독립영화 마케팅 회사에 갈 것이다. 영화마케팅을 하면서 얻은 것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더 자세히 풀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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