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자유 Oct 04. 2020

편지를 보낼게

윤희에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써본 것이 언제인 지 모르겠다.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는 과거라는 확신만이 선명할 뿐,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흐릿하다. 썼던 편지보다는 받았던 편지가 기억난다. 간혹 가다가 정말 예쁜 글씨체로 단정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전해주던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편지 쓰기를 좋아하던 아빠의 편지가 있었다. A4용지에 큼지막한 글씨들이 가득 채워진 어른의 편지였다. 나는 몇 해 전 아빠에게 전할 편지를 썼었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볼품없이 쓰진 않았을 거라고 항상 생각한다.



쥰이 윤희에게 보낸 편지(정확히는 쥰의 고모가 몰래 부친 것이지만)는 영화의 발단이 된다. 대학에 들어가고, 핸드폰의 노란색 대화창에는 소모적이고 단발적인 대화들이 넘쳐났지만, 그중에 깊게 오래가는 마음은 없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서 편지의 종말은 그 노란색 대화창 때문인 것도 같다. 윤희와 쥰은 중년이므로 노란색 대화창이나 얼굴책 같은 sns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세대이다. 어쩌면 연식이 있는 주인공들 덕분에 편지라는 매개체가 동작하고, 이야기는 울림을 갖게 된다.


윤희는 이혼하고 조리사로 일하며 딸 새봄을 홀로 키우고 있다. 그녀의 삶은 특별히 고달프게 묘사되고 있지 않은데도, 어딘가 지치고 피로해 보인다. 윤희는 공간 속에서 생기 있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외롭게 하며 스스로도 외로운 사람이다. 윤희는 쥰의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린다. 내내 무표정함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녀는 직장을 관두고 딸 새봄과 쥰이 살고 있는 오타루로 여행을 떠난다.


쥰과 윤희는 사랑하는 사이였다. 윤희 부모님은 여자인 쥰을 사랑한다는 윤희를 정신병원에 다니게 했고, 어리고 여렸던 둘은 헤어진다. 윤희와 헤어진 쥰은 일본으로 돌아갔다. 아버지 대신 다정한 고모와 함께 지냈고 대학을 갔고 지금은 수의사로 일하고 있다. 아프게 추억해야 하는 사랑의 기억을 제외하면 그녀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삶을 살고 있다. 반면 윤희는 대학을 가지 못했으며 오빠가 소개해준 남자와 떠밀리듯 결혼했고 행복하지 않았다.


윤희의 딸 새봄과 쥰의 고모는 끊겨있는 둘을 연결시킨다. 쥰의 고모는 부치지 못한 마음을 윤희에게 보냈고, 딸 새봄은 오타루까지 왔건만 가닿지 못하는 윤희와 쥰을 다시 만나게 한다. 영화에서 윤희와 쥰이 함께하는 씬은 기껏해야 두 장면이 전부이나 울림이 상당하다. 몇 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화면에는 부족하지 않지만 넘치지도 않는 오래 익은 사랑이 곱게 담긴다.


한국으로 돌아온 윤희와 새봄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한다. 영화에서 장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에서 윤희가 살던 곳은 윤희의 과거를 의미한다. 원하는 대로 살지 못했던 과거의 공간에서 윤희는 겉도는 존재였다. 윤희가 새로 이사 간 장소는 윤희의 미래이다. 그녀는 새봄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수줍게 고백한다. 윤희는 식당에서 일을 배워 조그만 식당을 차릴 계획이다. 식당에 이력서를 제출하려는 윤희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설렘이 보기 좋게 섞여있다. 줄곧 윤희를 카메라에 담던 새봄의 렌즈에 처음으로 윤희의 웃는 얼굴이 담기는 순간이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아직 부치지 않은 윤희의 편지가 내레이션으로 흐른다. 줄곧 속을 내보이지 않던 윤희가 자신의 속내를 담담하게 얘기한다. 쥰에게 전하는 고백이자 윤희의 이야기를 지켜본 관객에게 쓰는 편지이기도 하다.


“나는 더 이상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

이만 줄여야겠어. 딸이 집에 올 시간이거든.

언젠가 내 딸한테 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용기를 내고 싶어.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야.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동성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지만, 그 사랑이 어떤 종류인지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마음들 사이에 선을 긋고 구분 짓기를 좋아하지만 그 마음들은 결국 하나로 묶일 것이다. 때로는 사랑의 모양이 그렇게 된 것에 그럴듯한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만, 무의미한 일이다. 내가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 나는 왜 이런 모양인지 이유를 알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랑들은 그냥 그렇게 태어났다. 저마다 고유하고 아름다운 모양을 지닌 채로.


내가 보낸 시간들 속에 존재했던 편지들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기억에서 흐려진 소중한 마음들을 떠올렸다. 부치지 못해 놓쳐버린 마음들은 없었는지, 용기를 냈다면 달라졌을 이야기가 있었을지 상상했다. 편지가 사라져 가는 세상에서 마음을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담는 나를, 머릿속에 피어 올린다.


소중한 이에게.
기다려줘.
내가 편지를 보낼게.



매거진의 이전글 02.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