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마지막 공부, 마음을 지켜 낸다는 것, 정윤중
장마가 시작된 7월은 마지막이 참 많은 달이었다. 새드엔딩은 아니지만 7월과 8월은 장마라는 장막이 하늘을 덮어서 마지막이라는 단어와 어울린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9급 국가직 공무원 시험을 끝으로 올해에는 더 이상의 시험은 없다. 점수가 괜찮게 나와 마음은 편했지만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들 때문에 마냥 개운하지는 않았다.
"점수만 잘 나온다면..."
이란 조건을 걸고 얼마나 바보 같은 약속들을 했는지 셀 수도 없다. 개중에 말의 무게에 따라 몇 가지 약속들은 여전히 남아 나를 괴롭혔다. 그 약속들을 잊을 수도 없었고, 지키기도 귀찮은 상태. 약속은 꿔다 놓은 보릿자가 되어 버렸다. 똥 누러 갈 적 다르고 올 적 다르다는 속담처럼, 이제 내가 처해진 환경이 달라지니 나의 마음도 변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뒤를 닦다 만 것만 같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변해버릴 거면 모두 영영 변해버릴 것이지. 마음은 뻔뻔하지 못한 것일까, 이런 불편한 상황을 즐기는 것일까. 내 마음은 똥보다 못한 듯하다.
내린 비와 함께 저 밑에 잠수 해 있었던 채팅방이 반갑게 가장 위로 올라왔다. 4년 전 겨울 만들었던 독서모임의 단톡방이었다. 학생이었던 회원들 대부분이 취업 준비와 직장 일에 치여 참여율은 아주 저조했고, 거기에 코로나까지 더해 올해 모임은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인 1월이 마지막이었다. 여느 모임처럼 그렇게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런 중에 회장님은 마지막 모임을 제안하셨다. 신선했다. 대부분의 시작은 진하게 찍히지만, 마지막은 기여코 옅어져 사라져 갔다. 수업을 제외하고 내가 참여한 모임에서의 시작과 끝을 보는 최초의 모임인 셈이었다.
p212, 사람이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마지막 모임의 마지막 책은 <다산의 마지막 공부, 정윤중, 청림출판>이었다. 마지막이란 키워드를 이용해서 책을 선정하신 듯하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정약용의 고백을 발췌한 부분 빼고는 그다지 눈에 띄는 내용은 없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거부감을 일으킨 부분은 제목 선정이다. 전체적인 내용이 마음공부에 관한 것이고 다산이 마지막 공부로서 선택한 것이 심경인 점을 빼면 다산에 대한 이야기는 극히 적다. 솔직히, 아무나 마음공부하신 분의 일화를 가지고 와서 [땡땡(세종, 퇴계, 율곡, 충무공의 마지막 공부]로 바꿔 써 놓아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다산에 대한 이야기가 주될 것이라고 생각한 나의 기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누가 보아도 정약용 선생님의 내용이 주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을 것이다.
p193, 스스로 보지 못한 다면 눈을 감고 걷는 것과 같다.
또한 이 글에 작가의 생각이 무엇이 담겨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삼장법사의 삼장은 경, 율, 논에 통달한 사람을 일컫는 대명사이다. 경은 가르침이고, 율은 규칙, 논은 가르침에 대한 해석인데, 경은 하나지만 논은 논사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가질 수 있다. 그 해석에 따라 학문이나 종교는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되는데, 작가가 한 것은 그냥 다시 쓰기 +다 아는 소리라는 면에서 신선함이 없다. 이미 첫 번째 이유에서 마음이 상한 이유가 크지만, 아무리 읽어봐도 그래서 어쩌라고 이후로 진전이 되지 않는다 최소한 각 쳅터에서 마음공부 자세에 대한 다산의 접근방식을 소개했더라면 이렇게 아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제목을 버리고 각 쳅터의 제목으로 신문 칼럼으로 연재한다면 이런 거부감 없이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흡수했을 수 있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았다.
p53, 우리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지만 시대가 나를 휘감고 내가 시대에 살고 있는 한 삶에서 비겁해질 수밖에 없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생의 비겁함을 인정하고 화해하는 것이다.
<정약용의 고해> 중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기간 동안 내가 잃었던 것은 질문하는 법이다. 한국사, 전공 공부에서도 가장 필요 없었던 것은 의문을 갖는 것이었다. 궁금해하면 그만큼 시간을 잃고, 시간을 잃으면 떨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웃긴 것은 시험에 대해 가지는 태도에도 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시험이 끝난 지금도 그 힘은 여전히 나에게 작용한다. 이 책 자체의 위선적인 면도 있지만 책 자체를 읽기 힘들었다. 마지막 모임을 준비하면서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려 해도 이전과 같은 의문과 질문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드디어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인가. 마땅히 가져야 할 의문들이 의심들이 귀찮아졌다. 이 귀찮음은 분명히 비겁함 이다. 정약용이 말한 비겁함에 대한 인정과 화해는 더 이상 이 불편함을 껴안고 살아가기를 포기한 것에 대해서 듣기 좋게 포장한 소리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솔직하지 못했다. 비겁해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실제로 그 불편함을 가지고 살아왔고 살아간다. 인정과 화해는 자기 합리화를, 자신의 위선을 좋게 표현한 것뿐이다. 이제 더 이상 그 불편함을 등에 이고 갈 힘도 없는 초라한 자신을 애써 변호하는 것이다. 그가 내린 어른에 대한 정의에 나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 어른이 되는 가에 대한 나의 답은 항상 바뀌었었다. 그리고 바뀔수록 단순하고 뚜렷하게 변하였다. 이제,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에는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질문에는 거리낌이 없지만, 어른의 질문에는 불편함이 쫓아온다. 그 불편함을 사랑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이가 어른으로서 나아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건이다. 그 이외의 모든 변화는 그저 또 하나의 비겁한 사람일 뿐이다. 어떻게 또 바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렇다. 이제 마지막 아이가 사라졌고, 비겁한 사람과 어른만이 남아 있다.
마지막을 지켜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세 가지의 마지막에서 난 모두 마음을 지켜내지 못했다. 시험에서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독서모임에서는 찾아야 할 질문을 잃었고, 아이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비겁한 사람만이 눈만 멀뚱히 뜬 채 날 바라보고 있다. 유리잔 안의 붕어가 된 기분이다. 유리잔을 깰 용기도 의지도 없다. 잔 밖을 바라보는 금붕어나 유튜브를 켠 채 부러워만 하는 나나 그놈이 그놈이다.
불교에서 삶은 끊임없는 윤회 속에 있다고 한다. 보통은 윤회를 생각할 때 전생이나 내생을 생각하지만 멀리까지 갈 필요는 없다. 똑같은 생각, 행동, 말을 반복하는 것 역시 윤회에 포함된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한 숨 한 숨의 윤회 속에 갇혀 버렸다. 같은 실수를 끊임없이 반복해오며, 지치고, 지치다 결국에는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잘못된 그 행동과 말과 생각들을 그냥 나로 받아들여 유리잔 안에서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모임에도 자주 나오려고 했었던 것 같다. 잠시나마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자극을 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여전하다. 아마 나는 다른 선배님들을(독서토론 회원 상호 호칭) 찾아 나갈 것이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그 전만큼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끝없는 반복의 정체가 '나'인 이상, 더 이상 나로써는 유리잔 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과, 무엇이 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잘 살아가는 법을 연습하기 위해서 또 다른 선배님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뿐이다.
이 불편함을 사랑하고 싶다.
어른이 되고 싶다.
더 이상 반복하지 않고 마지막을 지켜내고 싶다.
다시 장마가 오더라도 이렇게 원하고 싶다.
2020.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