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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Aug 16. 2020

알란의 신념 속에서 바라본 나의 신념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0. 책 소개


가볍게 재미있게 읽었다. 개인적으로는 판타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5개 만점)


1. 신념, 부모의 유산

그리고 알란에게는 <세상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 그 자체일 뿐이란다.>라고 다소 철학적인 어조로 말했다

 -알란의 어머니가 그에게 남긴 유언,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신념이란 어떤 사건이나 행위와 같은 환경적 자극에 대해서 각 개인이 갖는 태도를 말한다. 그렇기에 신념에 따라서 같은 환경적 자극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반응을 이끌어 낸다. 그렇기에 신념의 수만큼 인식의 세계는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은 결국 여섯 가지 인식만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자극과 그 반응이 동시적이므로 실제의 세계는 인식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를 돌이켜보아도 부모님은 나의 신념을 만들어 준 가장 큰 환경이었다.  어머니가 알란에게 말한 것이지만, 사실 아무 말도 없이 죽은 아버지에게도 저 유산에 대한 지분이 있다. 그것이 작용이든 반작용이든,  어머니가 저러한 유언을 남길 수 있던 배경에는 그의 아버지가 있었으니 말이다. 어린 알란도 어머니의 다소 철학적인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그의 아버지의 삶을 돌아보며 그만의 신념을 만들어 갔으리라. 


2. 이미 일어난 일

노인은 자기가 왜 트렁크를 훔칠 생각을 했을까 자문해 보았다. 그냥 기회가 왔기 때문에? 아니면 주인이 불한당 같은 녀석이라서? 아니면 트렁크 안에 신발 한 켤레와 심지어 모자까지 하나 들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서? 그것도 아니면 자신은 잃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정말이지 이 중에서 무엇이 정답인 지 알 수 없었다.

 -5,000만 크로나가 든 가방을 훔친 뒤,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라는 그의 믿음은 선택에 대한 후회를 만들지 않았다. 일어난 일이니 그냥 받아들이는 것, 그가 돈이든 가방을 훔친 일도 그뿐이었다. 어차피 그러한 일이 일어난 일의 이유나 원인을 생각해 보아도 현실에 도움이 될 것은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이므로. 이러한 태도는 알란이 100년이라는 시간을 살아오며 겪은 일들에 대한 일관성이었다.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신념은 행동으로만 증명될 수 있다. 아무리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더라도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위선일 뿐이다. 그는 과연 그의 삶의 일관성을 지켰을까?


 알란의 신념에 빗대어, 내가 가진 신념은 "일어난 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반드시 원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며, 내가 인식하는 현실 또한 내가 만든 원인의 결과라는 것이다. 알란과 나의 공통점은 일어나 버린 일에 대한 받아들임이다. 알란에게 사건은 그저 그와 관계없이 어떤 사건은 발생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고, 나에게는 어떤 사건이라도 그 발생원인은 나에게 있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차이점은 무엇일까.

 

3. 바라고 바라는 것.


알란 칼손은 인생에서 많은 걸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누워 잘 수 있는 침대와 세끼 밥과 할 일, 그리고 이따금 목을 축일 수 있는 술 한 잔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이것들만 갖춰진다면 그 무엇이라도 견뎌 낼 수 있었다.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차이점은 알란의  삶이 바라는 것에 과한 욕심이 없다는 것과 나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바란다는 점이다. 알란은 큰 욕심이 없기에 일어난 일들을 불연속적으로 바라본다. 불연속적인 사건 속 인과 관계는 없으며, 그렇기에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적극적인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의 삶이 워낙 다이내믹하게 펼쳐졌지만, 그것은 우리의 입장이며 그의 입장에서는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일어난 일일 뿐이다. 나에겐 삶은 연속적이다. 그러니 과거엔 미련을 가지며 내일은 더 좋아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지금을 놓친다. 하지만 "나"라는 자의 개념적인 속성상, 만족하는 것의 완전한 실현이 가능한지에 대해선 의문이다. 솔직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기준에서 오로지 그 상태에 대한 끊임없는 시도만이 가능할 뿐이다. 


4. 나의 신념이 옳다.

그러고 나서 그 계획의 정치적 의미들에 대해 길게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알란은 잘 듣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기는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듣지 않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반사작용이다.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친구 옆에서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한편 알란은 에스테반을 따뜻한 눈으로 보았다. 에스테반은 좋은 친구였다. 그가 빌어먹을 정치에 중독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요즘 세상에 이렇게 된 사람이 어디 그 하나뿐인가?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신부는 칼손 씨 같은 불신자는 무엇이 광기이고, 무엇이 광기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을 삼가는 게 좋다고 대꾸했다.

-감옥에서 만난 신부가 알란에게 하는 말,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누군가의 신념에 대한 가치판단은 역설적이다.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고함이 생기는 순간 자신이 가진 신념에 위배되는 신념 모두는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신념은 세계를 받아들이는 인식체계이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다른 신념이 인정되기 위해선 자신의 신념 자체에 대한 불확실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 불확실성 속에서만 진정한 의미의 다양성은 성립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다름을 인정하는 척"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도 남들 앞에서 "다름을 인정하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보통 신념과 신념 사이의 마찰력은 적게는 다툼이나 크게는 전쟁까지 일으킨다. 소설 속에서는 알란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 대부분이 신념의 차이로 일어났다.  그렇다고 알란이 그의 신념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다만, 적극적으로 피했을 뿐이다. 그는 솔직했다. 그도 자신의 신념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남도 그 신념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마지막 신부의 말을 들으면 그대로 빡쳤을 것이다. "너나 잘하세요."


5. 의문점 : 알란은 도대체 왜 화가 났을까.

알란은 태어나서 그런 아픔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슬픔음 맹렬한 분노로 바뀌었다. 왕년의 폭약 전문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테라스에 나가서 시커먼 겨울밤을 향해 고함쳤다. 「그래 네놈이 원하는 게 전쟁이냐? 좋아, 해주마, 이 빌어먹을 여우 놈아!」

- 알란의 고양이가 여우에게 물려 죽은 뒤,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알란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같이 여행을 하던 친구들이 죽었을 때도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라고 생각하며 큰 아픔을 느끼진 못했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자기가 키우던 고양이가 여우에게 물려 죽자, 극대노한다. 내가 기대한 알란의 반응은 이것이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상 고양이의 죽음은 양로원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므로 이후 알란의 삶에서 그 이전과 다른 변화를 보였다면 모를까, 이 사건 전후의 알란이 삶을 대하는 방식에는 큰 변화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반응에는 특수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전의 나열된 사건들과 이번 여우 폭파 사건과의 차이점은, 갈등의 원인이 동물에게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차이점은 그것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알란이 동물들과의 사건에서 진정으로 아픔과 화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보통의 사람과 알란은 반대로 행동했다. 알란은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는 크게 화를 낸 적이 없지만 99살이 되어서 동물들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해선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동물에게는 신념이 없기 때문에?  동물들이 본능을 따라서 행동했기 때문에? 모르겠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에게 신념은 본능과 다름없기에. 도대체 왜 그는 화가 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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