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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Dec 30. 2021

서른 앞에서

이회영, 강우규, 정약용

세상의 풍운은 많이 일고
해와 달은 급하게 사람을 몰아 붙이는데
이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어느새 벌써 서른 살이 되었으니

소년삼십세시, 이회영


1. 서른은 두려움이다.


나이는 숫자일 뿐일까.

그것은 나이에 대한 기대감을 더 이상 질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허울 좋은 변명이다.

출생신고에 의해 주어지는 나이라는 숫자는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어떠한 성장도 보장하지 못한다.


어떤 나잇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떠한 대표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지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와 문화 속에서

특정 나이대의 사람들에 대한 기대와

그 기대에 대한 대부분의 개인의 동의와 순응에 의해서 형성된다.


자연히,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 개인들은 그 나이에서 낙오된다.

낙오는 배를, 실패를, 주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준다.

한 번의 낙오는 보통 연속적인 도태를 일으키고

연속적인 도태는 부적응을

부적응의 악순환은 생존을 보장하지 못한다.

나이가 단순한 숫자라는 사람들은 일종의 적응에 성공한 기만자들인 것이다.


육체적으로 더 이상 젊어질 수 없음을 자각하는

정신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온전한 책임을 요구하는

소위, 사회가 개인에게 어른에 대한 기대를 합당케 하는

서른은 그러한 위협을 자각하는 표준 분포 상의 평균값이다.


그렇게, 서른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2. 두려움은 선택의 결과이다


이대로 먹어가는 나이에 대한 최후의 기대 값은 죽음이다.

결국에는 육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개인은 죽음에 대한 기대와 의무를 지게 될 것이다.

단순히 그러한 사건이 벌어질 확률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이 사실을 나는 종종 망각하거나 피해왔다.

죽음이란 기대를 충족해야만 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죽음으로 또다시 도피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 도피의 영원한 회귀를 멈추기 위하여

서른 앞에서, 나는 속히 스스로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원인에는 결과가, 작용에는 반작용이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실로 그것뿐이다.


사회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실망시키기 않기 위함이라는 것은

나의 이러한 도피가 내가 속한 사회와 문화와 그곳의 속한 사람들로 인하여 기인된 것이며

이러한 부적응의 책임에 내가 없다는 실로 위선적인 변명이다.


그러한 기대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기대라고 부르는 그 두려움을 결과로 받은 것은

내게 그러한 두려움을 주었던 사람들과 사회의 시선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 시선으로써 남을 바라보았던

받은 만큼 돌려주려는 복수의 반작용인 것이다.

이 복수에 대한 가치판단은 불가능하다.

스스로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대한 탄식만이 있을 뿐이다.


고로, 두려움은 내가 선택한 결과이다.


단두대 위에 봄바람만 불뿐,
이 몸은 나라 없는 자이니
어찌 무슨 생각이 있겠나

사형 집행 전, 검사와 강우규의 문답


3. 도피가 아닌 후퇴여야 한다.


원인에는 결과가 있고,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된다.

같은 원인은 같은 결과를, 같은 결과는 같은 원인을 낳는다.

삶은 그렇게 시기와 환경을 달리하여 다른 표현형의 같은 결과를 반복한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생성되는 나라는 결과의 연속은

한 사람의 일생이라는 과정으로 표현된다.

나는 서른을 그렇게 두려움으로 반복해온 것이다.


다행히도 그러한 원리와, 그러한 원리밖에 없음은

복수의 결과물, 그 결정체인 나로서는

새로운 원인을 생성하기 불가능하다는 암울한 현실을 무심히도, 중화시킨다.

두려움도 결국 복수의 시선이라는 원인이 다하면 끝날 것이란 것이다.


그 죗값을 기꺼이 받음과 동시에

새로운 결과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원인이 필요하다.

인과에 대한 계산은 불가능하지만,

인과에 대한 임상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그리고 역사 속에 남아 있다.

최소한, 도피가 아닌 후퇴를 만들기 위한 원인들을 찾아야 한다.


4. 최소한의 후퇴를 위해서 해야 할 것들


서른에 시작된 이 고민이, 최소한의 후퇴로 만족된다는 것은 아마도

삶으로부터 홀홀히 저 너머로 돌아가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남을 향한 복수의 시선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이 내가 너를, 또 나를 그러한 두려움을 받게 하지 않을 원인인가.

단순히 다짐이나 마음은 원인이 될 수 없다.

오직 그 마음과 그 마음이 표현된 행위 둘 모두가 만족되어야만 그러한 원인의 덕을 볼 수 있다.


돈을 기부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돈의 경우는 아직도 여전히 남에게 줄만큼 많지도, 상대적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의 여유가 있지 않다.

봉사활동도 마찬가지다, 집에 있는 할아버지에게도 틱틱거리는 내가

남의 할아버지에게 웃으며 잘해드리는 것은 모순된 행동이다. 물론 그럴 맘 또한 없다.


가지고 있는 거야 시간과, 알고자 하는 욕구다.

그리고 그 안 것들을 정리하고 포장하는 능력이 내게 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같은 고생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마음과 행위를 일치시킬 수 있는 원인은 아직까진 이것뿐이다.


구체적 표현물로서 남길 수 있는 것 중

내가 그러한 마음과 나의 능력에 부합하는 것을 추려보았을 때

내가 앞으로 만들 수 있는 원인은 아래와 같을 것이다.


1) 헌혈 100회

2) 불교 관련 유튜브 쇼츠 제작(다른 이들이 만든 콘텐츠 홍보를 위한)

3) 업무 관련 매뉴얼 정리


덕이란 나의 곧은 마음을 실행하는 것이다. 실행하지 않으면 덕이란 있을 수 없다.

중용자잠, 정약용


5. 글의 증명


서른을 맞이하며 쓰는 이글에 대한 증명도

글이 아닌 함으로써 마침표를 찍어야 할 것이다.


또다시 어느 나이 앞에서, 도피하지 않기 위해서.


2021. 12. 30. 서른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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