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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Mar 13. 2023

술버릇 변천사


 일 년 365일 중 360일을 술을 먹던 공대 홍일점 시절. 술 먹고 쌓은 흑역사들도 360가지는 족히 될 것이다. 처음 술을 먹기 시작했을 때, 내 주량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았고, 취기가 오른다 싶어 마시는 속도를 늦추면 다시 금방 술이 깼다. 그 시절 나는 밤새도록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딱 한 잔만 더 먹자!”

 나의 첫 번째 술버릇은 술을 더 먹자고 조르는 것이었다. 오빠들이랑 술을 얼큰하게 먹고 모두가 취했을 때쯤 마지막 코스로 노래방을 간다. 노래방에서 입가심 맥주를 마시며 신나게 놀고 나오면 오빠들은 이미 만취 상태인데, 나는 술이 홀딱 깨서 멀끔한 정신으로 한 잔 더 먹자고 조른다. 영화 ‘슈렉’ 속 장화 신은 고양이 눈망울을 장착한 후, 오빠들을 향해 ‘한 잔 더!’를 외치곤 했다. 그때 항상 같이 한 잔 더 마셔주던 오빠가 한 집에서 술 마시는 사이가 되었고, 그렇게 집에서도 ‘한 병 더!‘를 외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도 숙취라는 어마어마한 존재가 오고야 말았다. 그렇게 술을 많이 먹었어도 다음 날 해장이 필요 없었던 나는 숙취를 겪은 후로 두 번째 술버릇이 생겼다. 새로 생긴 술버릇은 바로 술 먹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김치찌개를 끓여 놓는 것이었다. 만취한 상태로 머물렀던 주방은 폭탄 맞은 것 같다는 말을 실감하게 했다. 하지만 눈 뜨자마자 밀려오는 숙취를 바로 달랠 수 있었기에 주방 상태쯤은 흐린 눈으로 넘길 수 있었다. 이 두 번째 술버릇은 꽤 오래 유지되다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사라지게 되었다. 그날도 만취상태로 김치찌개를 끓이고 있었다. 찌개만 끓였어야 했는데 그날따라 왜인지 다음 날 돈가스가 먹고 싶을 것만 같았다. 뜨거운 기름에 냉동상태의 돈가스를 퐁당 넣는 순간 기름이 폭죽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나체였던 나의 몸 중 가장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곳으로 펑펑. 그 후로 나의 두 번째 술버릇은 말끔하게 사라지게 되었다. 남편은 한동안 내 배를 볼 때마다 돈가스라고 불렀다.

 요즘 내 술버릇은 잠드는 것인 것 같다. 옛날엔 술 먹고 졸려하는 사람들이 참 이해 안 갔었는데, 언제부턴가 술만 먹으면 잠이 쏟아진다. 눈 감으면 바로 잠이 들 정도로. 아이스크림을 먹는 중에 잠이 들어서 남편이 옷과 이불을 새로 갈아준 적도 있다. 며칠 전에는 지인의 집 소파에 누워 잠들었다고 남편에게 술주정뱅이 취급을 받았다. 이제는 내 간도 많이 약해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술 마시고 일어난 일들은 후회되는 경우가 많다. 체력이 다 해가면서도 뭐 좋은 거라고 술을 못 내려놓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봐도 정확히 모르겠다. 어릴 땐 그냥 습관처럼 마셨고, 그다음엔 자물쇠처럼 무거운 남편의 입을 열기 위해 마셨고, 그다음엔 육퇴 후 지친 나에게 주는 보상의 의미로 마셨던 것 같다. 써놓고 보니 갖가지 이유를 붙였지만 결국은 내가 술을 사랑해서 마신 것 같다.

 나는 스위치 온오프를 생활화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내 몸과 정신의 스위치가 전부 켜지는 느낌이 든다. 오프 상태로 깜깜했던 마음속 저 깊은 곳까지 환한 전구가 켜지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깊게 숨겨 둔 마음속을 왔다 갔다 살펴보며 입 밖으로 끄집어내기도 하는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이 술술 나온다. 나의 생각을 술술 말한다. 다음 날 후회하겠지만 어쩌면 그게 진심일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가끔 약간 취기가 오른 상태의 내가 더 나답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진정으로 유연하고 자유롭다. 그래서 나는 금주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술을 사랑하나 보다. 술이 생각나는 밤이다. 언젠가 취중 글쓰기를 통해 술로 쌓은 흑역사 에피소드들을 기록해 볼 수 있는 용기가 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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