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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May 25. 2023

낭만 바람

제부도 당일치기

 제부도는 지금 바람이 엄청 분다. 튼튼하게 쳐 놓은 타프가 무너질 정도로. 하지만 우리는 철수하지 않고 타프 대신 파라솔을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원래의 나는 이렇게 바람이 불면 당장 집에 돌아가자고 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2주 연속 바다 캠크닉을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난주 이후로 나의 마음에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다. 


 지난 주말 우리 가족은 부모님과 함께 제부도 나들이를 왔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제부도에 도착했다. 남편과 나는 엄마아빠가 겸이를 데리고 해상 케이블카를 타러 가신 틈에 텐트를 쳤다. 테이블과 의자들을 놓고 파라솔까지 야무지게 고정시키니 제법 그럴싸한 캠크닉 구성을 갖춘 것 같아서 뿌듯했다. 둘이 앉아 조금 쉬다 보니 엄마아빠가 인화된 사진을 들고 돌아오셨다. 케이블카에 탄 채로 겸이와 찍힌 사진을 구매해 오신 것이다. 사진이 너무 잘 나와서 살 수밖에 없었다는 아빠의 모습이 낯설었다. 상술이 절대 통하지 않는 엄마아빠를 겸이가 무장 해제시켰구나 싶었다.   


 겸이는 할아버지 손을 잡고 다시 산책에 나섰다. 나는 탁 트인 지평선을 바라보며 엄마와 모닝커피를 마셨다.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잔잔한 바다 분위기를 즐겼다. 이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갯벌에서 혼자 열심히 놀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구경하느라 웃음바다가 되었기 때문이다. 뚱땅뚱땅 걸어 다니다가 여기도 파보고 저기도 파보고, 그러다 옆에 사람 만나면 그 사람이 파는 곳을 기웃거리기도 하다가, 다시 또 두리번거리며 뚱 땅 뚱 땅 걸어 다니는 남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남편을 귀여워하며 웃다 보니 더 귀여운 겸이가 산책을 마치고 돌아왔다. 다 같이 모여 앉아 간식을 먹었다. 밀물 때가 되어 바닷물이 가득 찼기 때문에 남편과 겸이는 모래놀이를 시작했고, 나는 탁 트인 수평선을 바라보며 엄마아빠와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우리 텐트 주변에 다른 텐트들도 생기고, 돗자리나 파라솔만을 가져온 사람들도 제법 보였다. 우리 앞에도 돗자리를 피고 앉은 가족이 보였는데, 아장거리는 귀여운 아기가 있었다. 신기한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은 아기는 아장아장 쉬지 않고 무언가를 했다. 아기의 엄마아빠는 아기가 무얼 하든 안 하든 웃음을 터트리며 행복해했다.  


 ‘존재만으로도 예쁨이 넘쳐흐르고, 온 세상이 아름다운 시기지. 겸이가 저만할 때 나도 그랬지.’  


 회상하며 지금은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많아졌는지 반성도 좀 하며 생각에 잠겼는데, 엄마아빠도 그랬나 보다. 아빠는 저 아기를 보니 옛날 생각이 난다고 하셨다.  


 제부도는 하루에 두 번, 썰물 때 바닷길이 열리는 섬이다. 그런데 옛날에는 군인들이 바닷길을 통제했다고 한다. 군인들이 지키고 서서 썰물 때가 되어도 길을 안 터주던 시기가 있었다고. 그런데 제부도 도로공사를 했던 아빠 차는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어린 나를 데리고 자주 제부도 나들이를 왔다고 하셨다.  


 “너는 저 아기보다 더 활발하게 뽈뽈 거리며 다녔어.”  


 말씀하시며 활짝 웃는 아빠의 얼굴과 그 옆에 같은 표정의 엄마. 겸이가 너무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 행복이 가득 담긴 내 얼굴을 보면서 우리 엄마아빠도 나를 보며 이러셨을까? 하고 짐작만 했던 얼굴을 직접 마주한 순간이었다.  


 순간 앞에 보이는 아기 가족의 모습이 옛날 우리 가족으로 오버랩되었다. 우리 가족밖에 없는 해변에서 평온하고 행복한 시간을 만끽하는 어린 나와 엄마아빠. 기억나진 않지만 저렇게 아름다운 그림이었겠지. 이런 기쁨의 시간들이 내 마음 깊은 곳부터 가득 차있겠지. 행복하고 감사함이 벅차올라  눈물이 났다.  


 아빠는 모래놀이를 끝내고 온 겸이를 데리고 갯벌로 들어가셨다. 아빠는 어린 나와 했던 것들을 겸이랑 하는 시간을 좋아하신다. 아빠와 겸이의 모습을 보니 또다시 어린 나와 아빠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하지만 이번엔 아는 기억이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도 저렇게 쫄랑쫄랑 아빠를 따라다니며 조개를 캐곤 했었다. 엄마랑 나는 옛날 추억을 회상하며 아빠와 겸이를 바라봤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빠가 더 신이 난 듯 보이고, “할아버지 같이 가요!” 하면서 아빠를 따라다니는 즐거운 겸이의 모습에 우리도 덩달아 즐거웠다. 그리고 혼자 갯벌에서 신나게 놀다가 간식 먹고, 텐트에서 꿀잠에 빠진 남편도 굉장히 즐거웠던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저녁까지 즐겁게 놀다가 집에 돌아갔다. 모두가 행복한 하루였다. 


 탁 트인 시야, 바다가 주는 평안한 분위기, 가족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 무엇보다 아무 생각도 안 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좋았다. 몸은 좀 피곤했지만 정신적으로 푹 쉬고 온 느낌이 들었다. 다녀와서 목이 잔뜩 부어 컨디션이 엉망이었음에도 돌아오는 주말 전에 빨리 나아서 제부도에 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지난주에 들었던 느낌을 그리워하며 일주일을 보냈다. 겸이가 어릴 때도 사지 않고 버텼던 웨건을 구매하고, 타프도 사는 등 캠크닉 장비도 업그레이드해가면서 오늘을 기다렸다.  


 바람이 많이 불어 지난주랑은 사뭇 다른 분위기지만 그럼에도 정신적으로 휴식하는 느낌만은 변함이 없다. 겸이랑 남편은 갯벌에서도 놀고, 모래놀이도 하며 즐겁고,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즐겁다. 탁 트인 시야에 정신이 편안하고 맑아지는 것 같다. 하늘과 갯벌 그리고 가족, 하늘과 바다 그리고 가족. 복잡하지 않고 단순 깔끔하다. 내가 좋아하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내가 ‘낭만’이란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낭만의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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