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름달 Feb 05. 2023

청학동 1

청학동에서의 한 달


 어느 추운 겨울날, 10살이었던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아빠 차를 타고 버스가 줄지어 있는 어떤 장소에 도착했다. ‘또 캠프구나.’ 이번엔 어떤 캠프를 가게 되는 건지 긴장하며 버스에 올랐다. 그렇게 나는 깊은 지리산 청학동 서당에 보내졌다. 도착한 서당 본동은 넓고 따뜻했고, 화장실도 실내에 있고 시설도 깔끔하고 좋아서 한 달 동안 지내볼만하다고 생각했다. 곧 훈장님들이 들어오셔서 각자 본인들이 맡은 조의 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그런데 그중 딱 한 조는 조금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따로 생활할 거라고 했다. 그 특별한 조의 일원이었던 나는 대훈장님의 집 옆에 있는 별채에서 한 달간 지냈다. 여학생 넷이 쓰는 방 한 칸과 그 옆에 화장실, 그리고 그 밑에 조그마한 서당과 그 옆에 남학생 넷이 쓰는 방이 다였다. 우리 조 담당 훈장님은 서당에서 일명 호랑이 훈장님으로 불리던 분이셨다. 훈장님은 앞으로의 하루 일과와 규칙을 설명해 주셨다.  


 먼저 우리는 매일 새벽 5시 30분에 기상하여 산보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아침을 먹은 후, 서당에 모여 사자소학을 외워야 하고 오후 3시에 치르는 시험에서 틀리는 한자 개수만큼 종아리를 회초리로 맞을 것이며 시험에 통과할 때까지 방으로 갈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또 저녁 6시 30분에는 대훈장님 말씀을 듣고, 판소리를 한 소절씩 배울 거라고 하셨다. 이 모든 일과를 매일매일 하는 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말에는 처음부터 외웠던 모든 한자를 전부 다시 시험을 볼 거라고 하시며 마찬가지로 통과할 때까지 방에 갈 수 없다고 덧붙이셨다.  


 훈장님 말씀을 듣던 첫날은 그저 아무 생각이 없었다가 이튿날 새벽부터 온몸으로 실감하기 시작했다. 분명 산보라고 말씀하셨던 훈장님은 산길을 뛰어오르셨고 줄줄이 우리는 신음을 뱉으며 따라갔다. 나는 전날 밤, 방바닥이 지글지글 끓어서 등이 뜨겁고, 창호지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외풍 때문에 얼굴이 시렸고, 천장에서 사부작사부작 거리는 쥐들의 소리로 인해 밤새 거의 뜬 눈으로 보낸 상태였다. 그래서 이튿날 새벽에 뛰어오르던 산길이 엄청 가혹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산보를 마치고 돌아와 비몽사몽 아침을 먹은 후, 서당에 모여 앉아 사자소학 책을 받았다. 한 페이지에 네 개의 한자가 네 줄씩 쓰여 있는 책이었다. 훈장님은 하루에 한 장씩 여덟 줄, 즉 한자 서른 두 개씩을 오후 3시까지 외워서 시험을 봐야 한다고 하셨다. 따뜻한 바닥에 노곤해져 내려앉는 눈꺼풀과 싸우며 반복하여 달달 외웠다. 부생아신 하시며 모국 오신 이로다..


 열심히 외운 덕에 한 번에 시험을 통과하여 회초리를 피했다. 나는 오늘의 고비를 다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했지만 모두 내 착각이었다. 대훈장님 댁에 모여 말씀을 듣는 시간은 또 다른 大고통이었다. 대훈장님은 짧게는 40분에서 길게는 1시간 동안 좋은 말씀들을 해주셨는데, 문제는 말씀을 듣는 내내 우리가 무릎을 꿇고 들어야 했다는 것이다. 다리에 쥐가 나서 눈치 보며 몸을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어가며 말씀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던 매일이 하루도 빠짐없이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그때 대훈장님의 말씀들이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버티는 시간의 연속이었을 뿐. 아! 판소리를 배우는 시간은 무척 즐거웠다.  


 훈장님 말씀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았다. 새벽부터 시작된 이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매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위기감이 온 정신을 휘감았다. 그래도 위안이 됐던 건 한 달 동안 있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친구들이 내가 잘못 안 거라며 2주 동안만 있으면 된다고 했던 것이다. 며칠 후 나는 부모님께 부치는 편지에 엄마아빠가 잘못 알았던 것 같다고, 2주 후에 꼭 나를 데리러 오셔야 한다고 간곡하게 썼다. 그리고는 2주 동안만 버티면 된다고 나를 다독이며 약간의 희망을 가졌던 것 같다. 부모님의 답장을 받기까지는.  


 부모님은 너는 2주씩 두 번을 신청해서 한 달간 있는 게 맞고, 지금 같이 지내는 친구들은 2주 후에 떠나지만 또 새로운 친구들이 올 거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내셨다.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네가 자랑스럽다는 말과 함께.  


 그 편지를 읽고, 그때 느꼈던 절망감과 분노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왜 날 이런 고통 속에 보낸 건지, 왜 나는 한 달이나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너무 속상했다. 난 매일을 힘들게 버티고 있는데 엄마아빠 마음대로 씩씩하게 잘 지낸다며 자랑스럽다고 하는 것도 너무 싫었고 얄미웠다. 10살의 어린 나에게 2주도 긴 시간이었는데, 한 달은 정말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엄마아빠가 날 버리고 싶은 건가? 아니면 혹시 이곳에 날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도 했었다. 그렇게 마음고생을 하면서도 나는 매일 새벽 산보를 해야 했고 한자를 외워야 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내 마음도 차츰 진정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마음이 전쟁이어도 다 내려놓지 않고, 오늘 할 일을 해내는 정신력의 길을 그때 처음 들였던 것 같다.  


 첫 2주 동안 함께 지낸 우리 조 친구들은 모두 착실했다. 누구 하나 대들지 않고 규칙을 지켰고,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조금씩 분량도 늘려서 2주가 끝날 즈음 훈장님은 우리 조의 진도가 빠른 편이라고 칭찬하셨다. 훈장님은 늘 우리에게 자상하셨고 화내는 것도 못 봐서 왜 호랑이 훈장님일까? 우리끼리 궁금해했던 기억이 난다. (왜인지는 새로운 2주가 시작되고 알게 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이 있다. 갑자기 눈을 퍼뜩 떴는데 아침이 밝아 있었고, 깜짝 놀란 나는 방 친구들을 깨웠다. 훈장님이 부르는 소리를 아무도 못 듣고 잤다는 생각에 걱정하면서 문을 밀었다. 그런데 문이 아주 조금밖에 열리지 않았다. 틈새로 보니 밤사이 눈이 많이 내려 벽처럼 쌓여 있었다. 훈장님께서는 길을 내고 있으니 조금 기다리라고 하셨다. 나중에 문을 열고 미로처럼 양쪽으로 높게 쌓인 눈 통로를 지날 때, 마치 미지의 어떤 다른 세계로 통하는 길인 것만 같아서 신비로웠다. 눈이 사람 키보다 높게 쌓이는 곳이라니 보면서도 신기해서 엄청 들뜨고 설레는 마음으로 걸어 다녔던 것 같다.  이날 우리는 온종일 눈밭에서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내가 서당에 있었던 한 달 중, 딱 하루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날이었다.


 14일째인 마지막 날. 서당 본동으로 내려가 부모님을 만나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나는 쓰라린 마음을 다시 잡아야 했다. 훈장님은 그런 내가 안쓰러우셨는지 2주 동안 고생 많았다고 하시며 남은 2주는 본동에서 편하게 지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본동은 마을과 가까워 외부 음식도 먹을 수 있고, 한자도 외우고 싶은 만큼만 외우면 되고, 시험도 없다고 하셨다. 내가 잠깐 동안 보기에도 본동은 모든 것이 느슨했다. 순간 나는 본동에 있고 싶었다. 그런데 이내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고생해 가며 2주를 제대로 겪었는데, 남은 2주를 이렇게 느슨하게 보내면 고생했던 2주를 망치는 것 같았다. 왜인지 그게 싫었다. 갑자기 여기 있는 애들과 섞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너넨 몰라, 제대로 겪지 못했어. 난 달라! 그래서 나는 훈장님을 다시 따라가겠다고 했다. 훈장님은 몇 번이나 진심이냐고, 여기 있어도 된다고 하셨고 그럴수록 나는 더욱 확고하게 대답했다.


 서당에 온 지 15일째, 나는 새로 온 친구들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날 밤에 훈장님께서 나만 데리고 대훈장님 댁으로 갔다. 대훈장님은 네 얘기를 듣고 칭찬해 주고 싶어서 불렀다고 하시며 라면을 끓여 주셨다. 지금도 매워서 잘 못 먹는 그 브랜드의 라면을 그날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같이 먹었던 찐만두는 아직도 그립다. 아마 평생 그 맛을 다시 겪을 수는 없겠지.

작가의 이전글 아프지 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