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비집고 계속되는 죽음과 삶
길을 걷다, 심장이 내려 앉는 느낌에 길을 멈췄다. 정신을 차려보니 횡단보도 한 가운데였다. 누군가를 갑자기 잃는 상상은 계속된다. 교통사고처럼 예고 없이 당한 상실은 불안을 계속 옮겨 심는다. 다들 상실을 어떻게 견디면서 사는걸까.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작년 10월말, 아빠가 쓰러지졌다. 달려간 응급실엔 아빠말고도 여러 환자가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육신들. 겨울의 나뭇가지처럼 가느다랗고 앙상한, 입을 벌린 채 허공을 응시하던 백발의 노인. 그의 크고 동그랗고 또렷한 눈동자. 의식은 없지만, 삶을 붙잡으려 애쓰는 것 같던 분명한 눈동자를 보며 예감했다. 지금의 이 장면이 오래도록 나를 따라다니리라는 걸. 코끝을 찌르는 냄새. 옆 베드의 중년 환자가 의식 없이 설사를 했다. 커텐이 쳐지고 아들과 간호사가 뒷처리를 한다. 정신없이 아빠를 부르는 아들. 기어이 끝까지 숨기고 싶은 치마 속을 들추고 마는 곳이 응급실이었다. 또 다른 베드에서 울려 퍼지던 cpr 소리. 죽음을 인정하지 못 하는 소리. 영안실로 옮겨지는 베드. 삶을 비집고 죽음들이 애써 들어오는 곳. 그러나 누군가는 기어이 살아내기도 하는 곳.
“왜 치료하시던 병원으로 안 가시고…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빠의 몸엔 수많은 노즐이 연결되어 있다. 나는 체뇨를 빼내는 노즐의 소변량을 체크하면서, 응급실에서 아빠가 호명되기를 기다린다. 중환자실은 이미 만실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새벽 세시가 넘은 깊은 새벽 환자 중 한명이 운명했기 때문에, 그 자리를 아빠가 채운다. 죽은 자의 자리를 채우는 죽음에 가까운 자. 응급실의 시간은 도돌이표처럼 죽음이 돌고 돈다.
격리실로 옮겨진 다음날 언니와 만나 중환자실에서 아빠를 면회한다. 그때까진 그래도 기적을 바랐던 것 같다. 병원에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린다. 아빠의 임종이 임박했으니, 중환자실 앞에서 대기해달라고. 그렇게 중환자실 앞에서의 20시간이 시작된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사망을 기다리는 시간.
아직 모르겠다. 사망이 생의 일부인건지, 생의 끝인건지. 죽음이 생의 일부가 될 수 있는건지. 일년이 지난 지금 그저 수많은 감정과 단어의 자리에 상실이 더 진해졌다고 느낄 뿐이다. 가족의 죽음을, 그리고 그것을 겪은 사람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드라마나 영화 속 가족의 죽음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응급실의 시간이 아직 내 안에 건재하다. 그곳은 생의 끝이자, 일부이자, 시작이기도 했다. 삶도 그렇게 죽음의 자리를 비집고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