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는 하기 싫은 알콜 중독자의 절주일기 #02
나의 본격적인 음주 생활은 대학에서 시작되었다. 본격적이라고 말했지만 거창한 건 없었다. 내가 다닌 학과는 한 학년에 고작 20명 남짓 있었던 작은 학과였고, 학과생활이라고 부를만한게 없을 정도로 선후배 사이도 동기들끼리도 돈독하지 않았다. 그나마 동기들과 간혹 한두잔씩 즐겼으나, 내향적인 내 성향상 그조차도 적극적이진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대체로 바로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반면 지영(가명)이는 달랐다. 지영이는 본인 말로 ‘시골’에서 올라온 친구였다. 20살의 지영이는 밝고 강해보였다. 외향성이 뛰어나 동기들과 쉽게 어울렸다. 학업에 열심이라 성적이 좋았고,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잘 맞췄다. 소주를 좋아하고, 주량도 꽤 쎈 편이다.
지영이와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20살이었을 때. 4월 혹은 5월쯤. 서울의 어느 술집에서 단체 미팅을 했을 때이다. 테이블이 많은 어두운 술집이었다. 테이블 사이에는 파티션이 있어 옆 테이블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술집의 가장 가운데, 가장 넓은 테이블에 앉았다.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있는 여자가 다섯. 공대 남자가 다섯. 이제 성인이 된 지 반년도 안된 스무살 10명이 어른의 삶을 즐겨보겠다고 둘러앉아 소주 잔을 부딪혔다. 술게임도 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토끼가 하는 말...!”
“바니바니...! 바니바니...!”
공대 남자들과 함께 하는 술 게임은 신선했다. 내 짧은 음주 인생동안 그렇게 우중충한 인트로 노래는 처음이었다. 목소리가 낮고 축축 쳐졌다. 공부를 아주 잘해야지만 들어갈 수 있는 학교에서 온 재미없는 남자들이었다. 여자들이 오히려 자리를 주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 있던 모두가 취기 어린 얼굴을 했다. 술 자리가 슬슬 재밌어졌다. 목소리가 커지고 웃음소리가 울렸다. 자리를 섞고, 술 게임을 하고, 서로 마음에 든 상대를 지목했다. 어느새 시간은 밤 10시가 조금 넘었다.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변해갈 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난 이제 가야돼. 막차 끊겨.”
내 인생 첫 미팅이 밤 10시에 끝났다. 아쉬웠지만 경기도민에겐 집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나도 기숙사에 살았으면 좋았을걸. 다른 애들은 얼마나 재밌게 놀고 있을까!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내내 아쉬웠지만 돌아갈 순 없었다. 앞으로도 미팅을 즐길 기회가 아직 많이 남았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달랬다. 예상과 달리 내 인생에 미팅은 그 뒤로 딱 한번 더 있었다. 두번째 미팅은 너무 재미가 없어서 남은 기억도 없다. 그 미팅에도 지영이가 있었다는 사실만 기억난다.
그 뒤로 우리가 친해지는데는 몇년이 걸렸다. 낯가림이 심한 내 성격 때문이었다. 학기 중에는 종종 만나서 같이 놀다가, 방학이 되면 ‘괜히 연락했다가 불편해하지 않을까?’하고 망설이는 관계를 3-4년 유지했다. 우리 관계를 ‘친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건 지영이가 자취를 시작했을 때 쯤이었다. 지영이는 대학생활 중 절반쯤은 기숙사에 살았고 남은 절반은 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다.
어느날 지영이와 또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학교 근처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가볍게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놀고나니 술 기운이 올라왔다. 그 중 친구 A는 만취를 했다. 갑작스러웠다. 노래방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었다. A는 나보다 주량도 훨씬 강했다.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한 적도 없었다. 그런 자리도 아니었다.
“OO이 어머님, 안녕하세요.”
지영이가 친구의 핸드폰으로 A의 어머님께 전화를 했다.
“저희는 OO이와 같은 학과 친구들인데요. OO이가 술을 마시다가 좀 많이 취해서 잠들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저희 집에서 재우고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걱정하실까봐 연락드렸어요.”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고, 여자들끼리만 마셨고, 여자인 지영이네서 여자 셋이 잔다고 잘 말씀드렸다.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너희 어디니? 주소 좀 불러라.”
어머님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화가 많이 나셨다. 어머님은 차로 한시간 거리를 달려와 A를 데려가셨다. 우리는 그 한시간동안 제발 A가 정신차리길 바라며 화난 어머님이 오시길 기다렸다. 처음 뵌 A의 어머님은 무서운 얼굴로 A를 차에 태웠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희 친구 아니니? 적당히 좀 먹이지.”
쯧. 하는 표정으로. 억울했다. 먹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지가 마셨어요! 저희가 먹인 적 없어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쫄아있는 내 옆에서 지영이가 머리를 숙였다. 어머님은 차 문을 쾅 닫고 사라졌다. 조금 의기소침해져서 우리끼리 궁시렁거렸다.
“OO이네 엄마 좀 무섭다..”
“그러게.. OO이 통금도 있댔어..”
“OO이 외박도 안된다고했다...”
주눅이 든 대학생 둘이 자취방에서 시무룩하게 잠들었다. 다른 날 다시 만난 맨정신의 A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탕수육을 사줬다.
몇 년이 더 지나 지영이도 나도 각자 자취를 하여 혼자 살게 되었다. 지영이는 벌써 졸업을 하고 취직해서 서울 동쪽에 살고 있었다. 나는 아직 학생인 신분으로 지영이의 집에서 지하철로 4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살았다. 우리는 가끔 만나서 술을 마셨고, 때때로 한 명의 집에서 잠들기도 했다. 그런 시간이 쌓이면서 그냥 친한 친구에서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아주 친한 친구란 모두 그렇듯, 지영이는 나의 연애사를 전부 알게 되었다.
나는 연애를 좋아한다. 연애를 하는 것도 좋고 다른 사람의 연애 이야기를 듣는 것도 즐겁다. 모든 연애가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대부분의 지나간 연애는 좋지 않은 연애에 속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좋지 않으니 끝이 있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유독 나쁜 연애가 있다. 이런 경우 상대보다는 내가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는 딱히 나에게 열심이지 않다. 이 연애에 정성을 쓰는 것은 나 뿐이다. 지영이는 친구가 이런 연애를 하는 걸 유독 싫어한다. 만약 내가 이런 연애를 하게 된다면 지영이는 나를 뜯어 말릴 것이다.
하지만 우선 그 전에, 아마 나는 괜히 지영이에게 말했다가 욕만 먹을 것 같아서 굳이 말하지 않는 시간을 몇 달쯤 보낼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내가 너무 힘들어서 지영이에게 털어놓는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모두. 지영이는 ‘미친’이나 ‘개새끼’ 같은 욕을 섞으며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다가 결국 이렇게 말한다.
“헤어지는 게 맞는 것 같아.”
“네가 왜 그런 사람 만나서 이렇게 힘들어해야 돼?”
그제서야 나는 그 연애가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도 않고, 오히려 나를 갉아먹으며, 나의 정신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아직 헤어질 용기는 나지 않는다. 그 뒤로도 지영이에게 종종 연애 상담을 한다. 좋은 이야기보다는 싸운 이야기, 혹은 서운했던 이야기가 더 자주 나온다. 지영이는 매번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고 “제발 헤어져” 같은 말로 대화를 마무리한다. 이런 상담이 반복되면 결국 “너 알아서 해”같은 말을 하게 된다.
어느 날에는 지쳐서 상대와 헤어져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지영이가 ‘잘 생각했다’며 응원해준다. '다음에 얼굴 보면 꼭 헤어지자고 말해야지...' 결심하지만 말을 못하는 날이 이어진다. 어느 날 너무 속상해 견디지 못하고 헤어지자는 말을 뱉는다. 지영이에게 전화를 걸어 그 사람과 헤어졌다고 말한다. 그 날 밤, 그 사람이 다시 생각난다. 상대가 변하지 않을까하는 기대감도 든다. 보고싶은 마음을 참지 못해 그 사람에게 연락한다. 전화를 걸어 눈물 섞인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 사람을 붙잡는다. 연애를 다시 시작한다. 상대는 이전보다 나에게 정성을 더 쓰지만 잠시 뿐이다. 이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지영이에게 다시 고민 상담을 하면 지영이는 그 사람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자꾸만 한다. 울컥한다.
“네가 뭔데 그 사람을 그렇게 말해? 함부로 말하지마!”
지영이는 나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본다. 그 사람이랑 헤어지는 게 맞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그럴 수 없다. 제발 헤어지라며 속상해하고 날 걱정하며 울고불고하던 지영이는 어느 순간 자신의 조언이 나의 귀에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영이는 나와의 연락을 뚝 끊는다. 나는 왜 요즘 지영이와 연락이 되지 않는지 의문스러워하다가 이내 못된 연애 상대에게 정신이 팔린다.
다행인 것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적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다행히 나는 그런 연애는 한 적이 없다. 이런 문제로 지영이와 연락을 끊게 되지도 않았다. 그럴 뻔한 적은 있다. 나에게 못된 연애 상대 비슷한 존재가 하나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맥주다. 나의 사랑 맥주는 몸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다. 내가 맥주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헤어질 용기는 나지 않는다.
어느 날부터는 온몸으로 알코올 중독이 실감났다. 하루라도 맥주를 참아내는 것이 힘들었다. 가끔 맥주를 참아내려면 하루치 인내심을 모조리 다 끌어써야했다. 하루에 내가 쓸 수 있는 인내심의 총량이 100이라면 맥주를 참아내는데 90을 썼다. 내가 낮시간을 보내며 쓴 인내심이 15쯤 되면 남은 85짜리 인내심으로는 맥주를 참지 못했다. 절주를 내일로 미뤘다. 지끈지끈한 두통이 있거나 컨디션이 안좋은 날에도 저녁이 되면 맥주가 생각났다. 맥주를 마시면 통증이 사라지는 듯했다.
한 캔을 마시는 날도 있었고 주량을 넘겨 네캔, 다섯캔을 마시는 날도 있었다. 아침마다 머리가 띵하고 배속에 뜨겁고 더부룩한 가스가 가득 찼다. 오늘은 진짜 맥주를 참아야지 결심했고, 저녁이 되면 다시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실 때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어느 날 아침에는 어젯밤의 안 좋은 일을 생각하면서 오늘은 정말 헤어져야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밤이 되면 다시 생각나서 결국 먼저 냉장고 속 맥주로 손을 뻗는다. 오늘도 이별에 실패했다. 또 어느 날에는 맥주를 마시고 싶은 충동이 들자마자, 이어서 이성이 정신을 차릴까봐 황급히 캔을 따고 첫 모금을 들이켰다.
맥주를 끊을 생각은 아예 안했다. 좀 줄여야게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이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알콜 중독에 관한 모든 컨텐츠는 외면했다. 양심에 찔리는 느낌과 불안감, 발등에 불 떨어진 듯한 느낌, 그리고 나빼고 모든 사람들이 건강한 삶으로 한발짝씩 다가가도 있다는 뒤쳐지는 느낌을 갖고 싶지 않았다. 헬스장에서 런닝머신을 뛸 때마다 먹방 대신 챙겨봤던 생로병사의 비밀도 음주 편은 뛰어넘겼다.
생로병사의 비밀과 달리 내 마음대로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지영이의 잔소리였다. 우리가 어색한 동기에서 아주 친한 친구가 되는 시간동안 내 알콜 중독은 점점 더 심해졌다. 우리가 거의 매일 연락하게 됐을 땐 내가 이미 맥주를 매일 저녁 두세캔씩은 마시고 있었다. 지영이는 나의 맥주 중독을 걱정했다.
“나 맥주를 좀 줄여야겠어.”
어느 날 맨정신의 내가 말했다. 아마 어젯밤의 과음때문이었거나, 새로운 염증성 여드름이 잔뜩 올라온 피부 때문이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늘어난 뱃살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영이는 이 말을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날 도와줘야겠다고도 생각한 것 같다.
나의 못된 연애 상대인 맥주는 밤이 되지마자 날 유혹했다. 2-3일만에 나의 절주 결심은 철회되었다. 나는 절주를 취소하고, 나 자신을 한심스럽게 여기지 않기 위해 절주 결심을 깨끗하게 머릿속에서 지웠다. 절주 결심을 했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었다. 죄책감이라고는 쥐똥만큼도 느끼지 않으며 편한 마음으로 맥주를 즐겼다. 집에서 혼자도 마시고, 동거인과도 마시고 지영이에게도 맥주를 마시자고 졸랐다. 지영이에게 어제 새로 생긴 이자카야에서 마신 생맥주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자랑도 해댔다.
나의 절주는 지영이의 머릿속에서만 지속되고 있었다. 지영이는 한동안 나를 꽤 답답해했다. 제발 맥주와 헤어지라며 잔소리를 했다.
“걔 때문에 이렇게 네가 망가지는데 도대체 왜 아직도 헤어지지 않는거야?”
“걔는 너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어!”
“그냥 헤어지면 안되는 거야?!”
나는 나대로 지영이가 답답했다.
'왜 맥주의 나의 관계를 이렇게 갈라놓으려고 하는거지?'
'왜 사랑도 내 마음대로 못하게 하는 거야!'
'네가 뭔데 내 사랑에 이래라 저래라야!'
우리는 매일 연락해야하는 사정이 있었기에 지영이는 지영이대로 맥주를 먹는 나를 보며 스트레스를 받고, 나는 나대로 맥주로 잔소리하는 지영이를 보며 스트레스 받는 시간이 몇 개월이나 지속됐다. 마음의 거리가 멀어졌다. 거의 매일 보면서도 서로를 보는 게 즐겁지 않았다. 맥주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예민해졌다. 맥주에 관해 지영이가 하는 말이 곧이 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나 뭐라고 하는 거 아니고,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맥주가 진짜 맛있어?”
같은 질문도,
“오늘 맥주 한 잔 할래?”
같은 제안도,
“나는 배불러서 맥주 안 마실래.”
같은 말도 모두 비아냥으로 들렸다.
우리 사이가 급속도로 망가지고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네가 이렇게 잔소리 하는 거 불편해.”
실제로는 이것보다 훨씬 길고 구구절절하게 말했다.
“나는 네가 절주 중이라고 해서 도와주고 싶었는데 내가 과했던 것 같아. 미안해.”
이것도 실제로는 훨씬 길었다.
“그건 그냥.. 일년에 열댓번씩하는 다이어트 결심 같은 거였어! 난 기억도 안난다고!”
그제서야 모든 오해가 풀렸다. 지영이는 내가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비난하던 사람이 아니라 다이어트를 도와주는 트레이너였던 것이다.
‘회원님, 오늘 운동 안나오세요?’
‘오늘 치킨을 드셨네요...? 내일 유산소 1시간 뛸게요.’
같은 말을 듣고 나는
‘내 맥주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마. 아직 사랑한단 말이야. 아직은 헤어질 생각이 없다고!’
라고 외치고 있던 것이다.
그 날 이후 지영이는 맥주가 나의 일부임을 받아들였다. 빼서 없애버리는 살이 아니라 나와 평생 함께 할 동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도 지영이의 트레이닝 본능을 다시 일깨우지 않기 위래 ‘진짜 헤어질거야’같은 소리를 쉽게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몇달 지나지 않아 진짜 금주 결심을 했다. 이번에는 가볍게 까먹지도 않았고, 착실히 잘 지키고 있다. 지영이도 나의 금주가 하루 하루 쌓여가는 것을 응원해주고 있다. 술집에서 지영이만 술을 마시고 나는 제로 콜라를 마신 날도 여러번 있다. 언젠가 나의 금주가 끝나고 내가 맥주와 다시 행복한 나날을 즐기게 됐을 때, 지영이와 맥주잔을 부딪히며 그때 이야기를 또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