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더 확고해지는 몇 가지 생각들이 있다. 먹을까 말까 할 때는 먹지 마라, 말을 할까 말까 할 때는 하지 마라, 저녁 7시에 치킨을 먹고 싶으면 5시 45분 이전에 시켜야 늦지 않는다 등등.
그중 하나는 사람은 생각보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결혼식에 최선을 다해도 하객 중 몇 명이나 식장의 규모나 분위기, 조명, 축가 등을 기억하겠는가. 나 또한 아무리 친한 친구의 결혼식을 가도 위치나 밥 맛 정도나 기억할 뿐, 디테일한 사항은 영 떠오르지 않는다. 하긴 요즘은 어제 먹은 점심도 기억나지 않는걸.
그러나 온라인으로 예식장 정보를 찾다 보니 점점 눈이 높아졌다. 마치 모닝 사러 갔다가 그랜저를 샀다는 인터넷 밈과도 같았다. 오백만 원만 더 하면, 천만 원 더 하면 선택지가 점점 더 넓어졌고 나도 모르게 신라호텔 영빈관을 구경하고 있었다. 집을 살 돈도 없으면서.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A홀과 B홀 웨딩홀 투어를 예약했다.
강남에 위치한 A홀은 전형적인 웨딩홀이었다. 투어를 간 날에도 바쁘게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나 빼고 다 결혼하는 느낌이었다. 로비에서 하객들을 맞이하는 신랑을 보니 이 모든 과정을 극복하고 마침내 결혼식이라는 인생의 퀘스트를 달성한 그들이 대단해 보였다.
"신부님 어서 오세요, 담당 000입니다"
단정한 정장 차림의 담당자가 우리를 안내했다. 결혼식장에서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상담실이라는 공간에 앉으니 기분이 묘했다. 담당자는 웨딩홀에 보유한 두 개의 홀이 각각 어떻게 다른지, 식은 몇 분 간격으로 운영되는지, 식사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첫 번째 예식과 마지막 예식은 언제인지 등의 설명을 상세하게 해 주었다. 슬슬 1번 홀과 2번 홀이 헷갈리려는 찰나 홀 투어로 넘어갔다. 아무리 말을 들어도 백문이불여일견이다. 직접 봐야 알 수 있는 법이지.
밝은 느낌의 1번 홀
5층에 위치한 1번 홀은 개방감 있게 뚫려있는 한쪽 벽면 덕분에 야외 결혼을 연상하게 했다. 담당자도 실내 웨딩이지만 야외 느낌을 줄 수 있는 게 장점이며 계절마다 장식이 달라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환하고 밝은 내부 인테리어에 마음이 활짝 열렸다. 어디서 본 것 같지만 그래도 좀 더 세련되 보이는 의자 배치도 좋았고 양가 부모님 좌석이 그럴싸하게 분리되어 있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식장에는 화촉 리허설을 하는 양측 어머니들이 계셨는데 그분들을 보고 있자니 엄마가 떠올랐다. 우리 엄마, 무조건 울 텐데. 느닷없이 엄마 걱정이 되었다.
담당자는 버진로드 끄트머리에서 플라워 샤워용 꽃잎이 천장에서 자동으로 떨어지는 장치를 보여주었다. (플라워 샤워: 결혼식이 마치고 퇴장하는 부부에게 꽃을 뿌리는 행위. 어느 순간부터 결혼식의 반 필수 요소가 되어 신랑 혹은 신부의 몇몇 친구는 결혼식이 끝나고 꽃잎을 예쁘게 뿌려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을 받게 된다.) 오늘 계약하면 이 장치도 서비스로 넣어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인의 결혼식장에서 한 번에 꽃잎을 예쁘게 뿌리는 걸 실패해서 다시 꽃잎을 줍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흡족하게 1번 홀을 보고 2번 홀을 보러 이동했다. 밝은 느낌의 1번과는 다르게 2번은 길고 어두운, 일명 컨벤션홀 스타일이었다.
어둡고 웅장한 느낌의 2번 홀
1번 홀이 산뜻하고 세련된 느낌이라면 2번 홀은 웅장하고 각 잡힌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버진로드가 상당히 길었다. 신부 대기실에서 곧장 식장으로 연결되는 버진로드의 길이는 40m라고 했다. E형 인간으로서 내가 내 결혼식에 이 정도 관심과 집중은 누릴 권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버진로드가 마치 뮤지컬 무대처럼 위로 솟아 있었고 키가 작은 나는 그런 높이감도 마음에 꼭 들었다.
마침 2번 홀에서는 누군가의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담당자는 잠시 구경하고 있으시라고 자리를 비켜주었고 얼떨결에 나와 남자 친구는 남의 결혼식 1열 직관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내 결혼식 때도 정체모를 예비부부가 구경하고 있을까? 멋들어진 음악이 흘러나오며 밝은 얼굴의 신랑분이 입장했고 뒤이어 신부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로드 투 결혼을 걷고 있는 셈이었다.
순간 영문 모를 눈물이 나왔다. 신부가 정말 예뻤고 결혼식도 참 아름다웠다. 어두운 식장에서 화려한… 아니 밝은 조명이 부부를 감싸고 있었다. 나도 저 자리에 선다고 생각하니 감정이 북받쳤고 조용히 눈물을 닦아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결혼식에서 눈물을 보이다니. 부끄럽다는 생각에 남자 친구를 쳐다보았는데 맙소사. 그 또한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띠용? 나중에 물어보니 남자 친구도 이유를 모르겠지만, 신부가 입장하는 것을 보니 감정 이입이 되어 눈물이 나왔다고 했다. 아무튼 우리 둘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남의 결혼식장에서 나왔다.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만 울었다면 놀림거리일 텐데 그 역시 울어버려서 살짝 아름다운 기억으로 포장될 수 있었다.
결혼식에서 제일 중요한건 위치와 밥이다.
식장 외의 부대시설도 마음에 들었다. 뷔페 규모도 크고 정갈했고, 음식 종류가 많아 어르신들이 좋아할 것 같았다. 남자 친구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계약서를 작성해버렸다. 결혼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웨딩홀은 정말 빠르게 빠지기 때문에 원하는 시간과 요일이 있다면 선점하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결혼식 5개월 전까지는 계약금이 환불되고 날짜 변경도 1회 가능하기 때문에 큰 도박은 아니었다.
그렇게 웨딩홀 투어를 시작하자마자 장소 계약까지 쿨하게 가버렸다. 이게 당근이었다면 나의 매너 온도가 꽤나 올라가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