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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링기 Feb 18. 2022

[희] 인생은 새옹지마

아픔은 잊히고 무게만 남는다.

  어렸을 때는 아무거나 먹어도 곧잘 소화했었는데 세월과 함께 독소가 쌓인 것인지 소화기관이 예전 같지 않다. 덕분에 같은 메뉴를 먹어도 나만 배탈이 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연초에도 마찬가지였다. 밤새 복통과 고열에 시달려 코로나인가, 했으나 PCR 검사 결과 음성이 나왔고 단순히 장염에 걸린 것으로 확인되었다.

  장염의 병세는 코로나 못지않게 심각했다. 열이 39도까지 올라갔다. 코로나 백신을 맞아도 37도 수준에서 머물렀는데. 오랜만에 고열을 겪어보니 오한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집을 뜨겁게 달구고 극세사 이불 안에 가만히 누워있어도 몸이 오들거렸다. 물만 마셔도 토하고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기분이었다. 이게 새해 액땜인 걸까. 액땜을 꼭 이런 방식으로 겪어야 하나. 괴롭다. 아프다. 서럽다. 한 살 더 먹은 것도 서러운데 아프기까지 하니 부정적인 감정의 골은 깊어져 갔다.

  침대에 누워 골골거리며 이 망할 병의 원인을 고민해보았다. 우유? 아니야. 유통기한이 충분히 남았었지. 요거트? 그럴 리가. 늘 먹던 제품인걸. 간신히 찾아낸 건 이틀 전에 먹은 익힌 굴 요리였다. 얼마 먹지도 않았다. 한 세 개 정도 먹었나. 이마저도 확실하지 않은 게 같이 먹은 사람들은 모두 말짱했다. 오로지 나 하나만 노로 바이러스로 추정되는 장염에 걸려 이 고생을 하고 있었다. 서러운데 억울하기까지 했다. 왜 나만? 힘없이 누워서 튼튼한 장 환경 조성을 위한 유산균을 검색하다 기절하듯 잠들었다.  

맛있어 보이지만 먹으면 곧잘 아픈 굴. (출처: pixabay)


  이후로 며칠 동안 연차를 내고 이온 음료만 먹었다. 나갈 힘도 없어서 B마트로 포카리스웨트만 주구장창 주문했다. 장염 유경험자라면 이때 마시는 포카리스웨트가 얼마나 달달한지 이해할 것이다. 이마저도 급히 먹으면 지옥을 맛볼 수 있기에 천천히 소량을 나누어 마셨다. 장염 이틀 차, 좀 괜찮아졌나? 싶어 죽을 먹고 정말 죽을 뻔해서 일주일 가까이 포카리스웨트로 끼니를 연명했다. 다시 생각해도 서러운 나날이었다. 그 와중에 병세가 좀 나아지자 빌빌 거리며 출근을 했다. 나의 소중한 연차가 너무 아까웠다. 아파도 회사에서 아프리라, 다짐하며 사무실에서 포카리스웨트만 마시며 버텨내었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이벤트는 단편적이지 않다. 나의 장염 고생기도 그러하다. 징하게 고생을 하며 위장이 줄어들었는데, 덕분에 한동안 조금만 먹어도 금방 배가 불렀다. 자연스럽게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잘 맞던 바지가 헐렁거리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만나는 사람마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냐고 걱정 반 궁금증 반의 얼굴로 물어보았다. 나는 다 필요 없고 장염 다이어트가 최고라고 악마의 조언을 건넸다. 망각이라는 건 대단하다. 아프고 서러운 나날은 싹 잊히고 다이어트 효과만 남은 것이다.

  먹는 양이 다시 늘어난 요즘은 슬슬 굴을 먹어볼까 생각한다. 한두 번 정도 장염을 앓으면 원하는 몸무게가 될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리며 말이다. 이처럼 노력하기보다는 아파서 살을 뺄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지난번에 죽을 만큼 아프지는 않았나 보다. 이래서 인생은 새옹지마인 걸까. 아팠던 순간이 되려 기쁜 기억으로 덮이는 것을 보니. 나만의 장염 정의를 내리며 글을 마쳐본다.


  [장염] : 겪을 때는 [비]이지만 다시 보니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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