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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링기 Jun 09. 2022

19화 _ 부끄럽다, 결혼

언제,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안락한 침대에서 SNS를 탐닉하며 인생을 낭비하다가 ‘그럴싸’라는 단어를 접했다. 인싸도 아싸도 아닌 타입을 그럴싸라고 한단다. 인싸와 아싸라는 말을 들었을 때 보다 더 큰 문화적 충격에 휩싸였다. 나 참, 별 말을 다 만들어 내는구만.


  그러고 보면 인생의 전반적인 행적에 기반하면 나는 인싸에 가깝지만, 결혼을 알리는 과정에서는 아싸에 가까웠다. 나야말로 그럴싸 인간인 걸까. 아무튼 결혼 소식을 전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나한테야 중요하고 큰 일이지만 남에게는 그냥 흘러가는 소식이 아닌가.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편하게 알릴 수 있었지만 애매한 관계의 사람들에게는 언제 어떻게 알려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한 때 친했지만 지금은 멀어진 관계, 연락한 지 오래되어 갑자기 연락하기 어색한 사람들이 주된 고민의 대상이었다. 지인이나 인터넷에서 느닷없이 연락해 일방적으로 결혼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쾌한 후기를 많이 접해서 혼자만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사실 멀어진 사람들에게는 그냥 연락을 안 하면 그만이었다. 더 큰 고민거리는 회사에서의 결혼 알리기였다. 



  자고로 회사는 일이 심심해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은 법이다. 자연스럽게 늘 남자 친구가 없는 척했는데, 갑자기 결혼한다고 말하려니 좀 머쓱했다. 게다가 너무 빨리 알리면 남은 시간 동안 질문에 시달릴 것이고, 늦게 알리면 왜 소식이 늦었냐고 한 소리 듣기 좋았다. 가장 좋은 타이밍과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했으나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대충 90일 정도 남았을 때 부서에는 조심스럽게 알렸다. 별일 없으면 이때 결혼을 할 것 같다고. 모두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남자 친구도 없지 않았냐고, 언제 연애를 했냐며 놀라 했다. 이후 몇 살인지, 어디서 일하는지,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는지, 남자 친구의 고향은 어디인지, 직장은 어디인지, 신혼집은 어디로 할 건지 등등 예상 가능한 질문이 이어졌다. 한바탕 인터뷰를 마치니 실감 났다. 아, 정말 결혼하는구나. 

  부서 사람들과 친한 동기들에게만 먼저 결혼 소식을 알렸지만 회사원의 말에는 발이 아닌 날개가 달린지라 나의 결혼 소식도 슬금슬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떤 동기는 “야, 나 000님한테 그냥 얘기함! 쏘리~”라고 쿨하게 아웃팅을 고백했다. 역시, 회사에서 제일 재미있는 건 남의 소식 이야기하기였다. 처음에는 결혼 소식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부끄럽기도 했지만 점점 익숙해지고 나중에는 나 대신 말을 전해주는 사람들이 되려 고마워졌다. 상무님과의 보고 중에 갑자기 나의 결혼 날짜를 스포한 부장님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좋은 소식은 알려야지, 암. 그러나 결혼한다라고 말하는 건 별 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어렵고 머리 아픈 순간은 청첩장을 나눠주는 일이었다. 


  햄릿의 죽느냐, 마느냐에 비할 것은 아니었지만 청첩장을 줄 것이냐, 말 것이냐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엑셀에 이름을 늘어놓고 줘, 말아, 어떻게 줘라고 혼자서 카테고리를 나눠보았다. 전달 리스트를 정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실제로 전달하는 과정도 녹록치 않았다. 날짜와 멤버, 장소를 한 곳으로 몰아넣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테트리스 게임 같았다. 모든 조각이 맞춰졌다고 생각한 순간 긴 막대 모양의 조각이 엉뚱한 곳으로 튀어나가며 다시 일정을 잡아야 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이므로 한 달 전부터 사람들의 일정을 물어보고 가급적 모두가 편한 장소를 고민했다. 다른 이야기지만, 사당과 강남이 왜 교통의 요지 인지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 청첩장을 전달하고 그동안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좋았다. 결혼이라는 명분 덕분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도 좋았고, 기꺼이 시간을 내준 사람들도 고마웠다. 몇 번이나 약속이 미뤄지고 파토나서 결국 보기 힘든 경우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알쏭달쏭 모바일 세상인 것을. 아무튼 고민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즐거웠던 모임 자리들이 이어졌다. 늘 그렇듯 현실은 생각보다 별일 없는 편이다. 


  이제 결혼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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