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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링기 Apr 30. 2023

후회 없는 66%를 위한 34% 리뷰

늦다고 생각했을 때가 늦기는 했지만서도.

#1. 다시 보니 선녀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가장 짜친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전략 보고서 작성이다. 그다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정해진 목표를 어떻게든 잘해보겠다는 말을 PPT 30장으로 늘려 쓰려니 영 할 말이 없다. 미루고 미루다가 보고일이 다가올수록 효율이 올라가 와다다 보고서를 작성하게 된다. 그렇게 벼락치기로 작성된 자료는 한 번의 보고와 함께 사라지고, 다음번에 비슷한 보고를 할 때까지 열어보는 일이 없다. 


  그런데 참 신기하기도 하지. 몇 달이 지난 후 보고서를 다시 들춰보면 얼추 맞는 말에 비슷하게 흘러가있다. 얼레벌레 적었던 자료이지만 결론적으로는 맞아떨어지는 걸 보면 그래도 헛짓거리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요지는 주기적으로 전략을 세우고 지난 시간을 리뷰하는 게 결론적으로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1/3을 돌이켜보고 2/3을 점검하는 건 굉장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하도 쓰다보니 마치 속담처럼 느껴지는 마성의 짤방.


#2. 나, 회사를 좋아하는 걸지도…?


  그렇다면 나의 지난 23년은 어떻게 흘러갔는가. 인생에서 회사를 빼면 남는 게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열심히 아등바등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회사가 나의 인생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23년도에 부서를 이동해서 적응하고 일을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시간을 사무실에 소비하게 되었다. 원래 사무실의 올바른 근태 문화를 성립하는 근태 요정의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제 야근 요정이 되었다. 생전 받지 않던 야근비를 받으니 은근히 쏠쏠했다. 그래도 새로 맡은 업무가 재미있고 나름의 보람도 있어서 아직까지는 재미있게 출근길에 오르고 있다. 아직까지는. 


  허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싫은 부분도 있다. 처음 하는 일이다 보니 프로세스도 모르고 실수가 잦다. 어제는 엉뚱한 사람에게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미치겠다, 정말.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는 뻔한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정신 차려보니 벌써 10년 차이고 배우는 속도는 신입과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못하고 있다, 는 아니지만 더 잘하고 싶고 더욱 성과를 내고 싶다. 영화에서 욕심부리다가 망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 혹시 난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내가 설마 워커 홀릭인가,라는 의심도 들지만 그래도 주말은 출근하지 않고 꼭 집에서 뒹굴거리는 걸 보면 그 정도는 아닌 듯하다. 


  사내에서의 삶이 바빠지니 사외에서의 삶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작년까지 벌려놓은 일이 많은데 그 기반이 워라밸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벌여놓은 일을 수습하느라 퇴근하고 나서도 노트북을 붙잡고 낑낑거리고 있는데,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러나 자괴감이 올 때도 있다. 사실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일을 벌여놓은 건 맞지만, 재산과 지위는 온데간데 없고 수면 부족만 찾아온다. 세상에나.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나 원 참. 

적당한 이미지를 찾다 발견한 기깔나는 설문조사. 죄다 내 이야기 같다.


#3. 아무도 시키지 않은 다짐을 해본다 


  아무튼 아직 23년은 2/3이 남았고 나에게는 8개월의 시간이 남아 있다. 연말에 기분 좋게 23년 리뷰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나의 시간을 무의미하게 잡아먹는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해 봤을 때, 가장 먼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인스타였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켜고 인스타 릴스 스크롤을 내리는 게 아침 혹은 자기 전 루틴이다.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들, 수달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의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그렇지만 불이 꺼진 핸드폰 화면에 비치는 건 칙칙한 내 얼굴이고 30초짜리 영상들로 한 시간을 날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면서 강렬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뭐야, 시간이 이렇게 지났어? 귀여운 동물들에게는 죄가 없다. 현실 도피하듯 인스타에 빠져든 내 잘못이다. 이 시간을 독서로 치환하면 얼마나 좋으련만. 남은 8개월에는 한 달에 한 권이라도 읽어 나가야지. 

인스타 릴스를 한 시간 보고 난 뒤의 내 모습. 출차_네이버 웹툰 [대학일기]

  더불어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는 프로젝트들을 빠르게 현실로 옮길 셈이다. 생각해 보면 난 일단 저지르고 보는 타입이다. 선언과 동시에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어떻게든 꾸역꾸역 이루어냈다. 요즘 종이에 끄적거리기만 하는 온라인 모임, MT, 소모임 등을 빠르게 선언하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아등바등해내야지. 할 때는 힘들지만 다 하고 나면 엄청나게 뿌듯하고 성취감이 있었던 기억들이 있다. 고통은 잊고 성취감만 떠올리며 해내야지,라고 다짐해 본다.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혼자 보고서를 작성하는 기분이다. 부장님, 보고 계신가요? 제가 이렇게 보고서 최적화 인간입니다. 고과 주세요. 



#4. 어쨌든 내 기분이 좋아지면 되는 법. 


  이번 글은 누구도 시키지 않은 반성문을 쓰는 기분으로 써 내려갔다.  기분이 오히려 좋아진 건 내가 J이기 때문인 걸까? 사실상 줄글로 작성한 계획서였다. 독자들은 읽으며 괜스레 나는 잘하고 있나, 라든지 나도 뭔가를 해야 하나,라는 복잡한 마음이 들 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만족했다. 어쨌든 내 기분이 좋아지면 그걸로 괜찮은 법이다. 고해성사를 하고 성당 문을 나오는 신자의 마음처럼 한결 개운해졌다. 


  그래, 66%는 100%의 만족감으로 채워나가야지. 웬만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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