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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링기 May 06. 2023

200만원짜리 글감을 얻었다.

얻고 싶지 않았다.

  2022년은 소비의 해였다. 결혼을 맞이하여 원 없이 돈을 썼고 허전한 통장 잔고와 화려한 아이템이 남았다. 남아있는 아이템 중 하나는 큰 마음먹고 구매한 카드 지갑이었다. 생김새는 아래와 같다.

이미지 출처_ 구구스, 머스트잇 등 명품 판매 사이트.

  외관상으로는 별로 티가 나지 않지만, 에르메스의 베안 카드 지갑으로 양 포켓에 카드를 넉넉히 넣을 수 있어 실용적이고 대표적인 에토프 컬러에 하드웨어까지 금장이라 평생 들고 다닐 요량으로 구매한 제품이었다. 정말 구하기 힘들었고 볼 때마다 만족스럽기 짝이 없었다. 쓰임새는 실용적이지만 가격은 그렇지 않았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180에서 190 정도 했었는데, 아무튼 준 돈은 생각나지 않고 만족감만 남는 소비였다.


  그런 지갑을 잃어버렸다. 오늘의 글은 약 200만 원의 글감이라 할 수 있겠다.


#1.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정확히 00시 01분에 집 앞에서 택시는 멈췄다. 평소에 삼성 페이로 교통비를 계산하지만, 택시비는 실물 카드로 결제한다. 내 신용 카드는 대중교통이나 택시비가 10% 할인되는데, 삼성페이로 결제 시 티머니로 처리되어 할인이 적용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아닐 때도 있지만, 혹시 몰라 습관적으로 실물 카드로 결제하고는 했다. 내가 그때 지갑을 꺼내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다른 글을 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술을 마셨지만 맥주 두 어 잔 정도였고 취기가 오르지 않았었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결제하고 다시 가방에 지갑을 넣었다고 생각했다. 토요일 하루 종일 집에서 누워 빈둥 거리다 저녁 9시, 로또 번호를 맞혀보려고 지갑을 찾아 헤매다 깨달았다. 지갑이 사라졌다. 몇 번을 뒤져봤다. 없다. 보이지 않는다. 망했다. 내 에르메스 카드 지갑이, 사라졌다.


  그렇게 만취해도 천 원짜리 한 장 잃어버리지 않던 내가, 말짱한 정신머리로 지갑을 잃어버리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집안을 헤집어보고 에코백을 탈탈 털어보았지만 결론은 하나에 도달했다. 택시 안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게 분명하다.


  망했다.


#2. 웬만하면 카카오 택시로 탑승 기록을 남겨보자


  하필 카카오 택시를 통해 탑승을 한 게 아니라 길거리에서 막 잡아 타서 택시 정보를 확인하는 것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다행히 인터넷 집단 지성의 힘은 대단했다. 티머니 고객센터(1644-1188)로 전화해 카드 번호 및 결제 일자를 통해 택시 정보를 알아냈고 택시 회사와 통화했다. 채 삼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분실물 리스트에 지갑은 없다는 업체의 말에 절망감을 느꼈다. 사람을 믿지 않는 성격이라 사례금 30만 원도 제시했다. 그러나 결백한 목소리의 택시 기사님과 통화하며 최소한 기사님이 나쁜 마음은 먹은 게 아니라고 판단했다.


  생각해 보니 택시 안에 블랙박스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택시 회사 측에 문의하니 다음 날 택시 회사로 오면 블랙박스를 보여주겠다고 안내해 주었다. 약 23시간이 지나 영상이 남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와보라는 식이었다. 알겠다고 답했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제발 뭐라도 남아있기를 바랐다.


#3. 직장인은 일을 벌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일요일 아침 일곱 시부터 일어나 한 시간을 달려 도봉구로 향했다. 방학역은 난생처음이었다. 업체의 상황실이라는 곳에 가니 원피스 삼대장처럼 세 명의 아저씨가 앉아 있었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월요일에 사고 수습팀을 통해서만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할 수 있어요.”


  어제와 말이 달랐다. 요지는 전 날 안내해 준 사람은 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잘못 안내해 주었고, 원칙대로 본래 해당 업무를 담당하는 사고 수습팀이 이 일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건 니 사정이고 이 아침부터 달려왔는데 -심지어 노트북과 복사용 sd카드까지 챙겨 왔었다- 이게 왜 안 되냐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회사 입장도 이해가 갔지만, 알빠냐. 지금 200만 원짜리 지갑이 사라졌다.


  회사의 대응도 아쉬웠다. 블랙박스 sd카드를 잘 전달받았냐는 물음에 받기는 했는데 확인해 보니 영상이 덮어져서 확인이 불가능하다, 고 하다가 32GB짜리 SD카드가 왜 4시간 영상만 녹화되어 있냐고 따져 물으니 사실 타임라인만 확인했다,라고 말을 바꾸었다. 마음대로 확인을 하면 영상이 지워질까 봐 보지 않았다나 뭐라나. 대화 끝에 경찰 동행 하에 영상 확인이 가능하다고 으름장을 놓길래 경찰서에 연락해 경찰관을 섭외하니 다시 사고 수습팀만 확인이 가능하다고 말을 바꾸더라. 짜증 나면서도 이들 또한 직장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직장인은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법. 그렇게 일요일 아침 한 시간 반을 실랑이로 허비하고 성과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4. 아니 그러니까 sd카드 내놓으시라구요.


  월요일 아침 9시 10분이 되고 그놈의 사고 수습팀에 연락을 취했다. 내용은 연락받았으며 본인이 확인해 보았는데 영상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혹시 닥터 스트레인지가 시간을 돌려 다시 일요일이 된 걸까?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소리에 진절머리가 났다. 이런 식이라면 실제로 택시 내부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사고 영상을 확보하냐며, 회사 입장에서도 이렇게 블랙박스 영상이 보관이 되지 않으면 안 되지 않냐고 따져 물었다. 월요일 아침부터 주고받기에는 험한 대화였었다. 담당 과장이라는 사람은 sd카드 복구가 가능한 업체가 있다면 카드를 넘겨주겠다고 했다. 일도 아니지. 30분 만에 업체를 수배하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제가 사설 업체 확보 했거든요. 지금 퀵 보내드릴 테니 sd카드 넘겨주세요.”  


  그렇게 월요일 오전 11시 30분에 sd카드를 받았고 같은 날 17시에 업체에게 넘겼다. 제발 복구되기를 기대하며.


#5. 오늘의 교훈: 물건은 낮에 잃어버리자


  “이게요, 영상은 있는데 하나도 보이지가 않아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음 날 복구 업체 엔지니어에게 전화가 왔다. 해당 시간의 영상은 남아 있는데 밤이라 그런지 죄다 어두워서 누가 누군지 구분도 안 가고, 설사 누군가 지갑을 주워갔다고 해도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옆 부서 선배가 그 불투명한 블랙박스 영상이라도 경찰에 넘겨 해당 시간에 탑승한 승객에게 통화를 하라고 권유했지만, 이미 힘이 빠져 더 이상 무언가 진행하고 싶지가 않았다. 모르겠다. 며칠 지나니 조금 더 기력이 생겨 경찰서를 가볼까, 뽐뿌가 오다가도 또 없어진다. 이것이 죽음의 5단계 중 수용인 걸까. 난 이제야 지갑의 부재를 받아들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6. lost112를 아시나요


  몰랐었는데 이번 사건을 통해 알게 된 사이트가 있다. lost 112라는 곳인데 분실물과 습득물을 업로드하는 곳이다. 나의 분실 내용을 등록하고 서울특별시의 지갑 습득물 목록을 새로고침 하는 게 요즈음 나의 루틴이다. 혹시라도 내 지갑이 올라왔을지, 하나씩 찾아보고 보관 업체에 전화해 본다. 기대하다 실망하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모르니까. 판도라의 상자 바닥에 남아있던 희망을 부여잡고 목록을 찬찬히 살펴본다. 대부분 실망하지만.


  혹시 지갑 안의 로또가 1등이 되어 누군가 돌려주지 않는걸까, 싶어 로또 1등 당첨자 지역도 찬찬히 살펴봤다. 내가 구매한 곳은 아니었다. ...2등인걸까? 머리 속에서 다양한 시나리오와 가설을 떠올리며 사라진 지갑을 그리워했지만, 그렇다고 지갑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튼 이렇게 200만 원짜리 글이 탄생했다. 글을 쓰다 순간적으로 빡침이 다시 올라와 호흡이 가빠졌지만, 괜찮다. 난 수용의 단계에 있으니까. 희망을 버리고 카드를 죄다 재발급받고 운전 면허증도 다시 발급받았다. 서초 경찰서에서 운전 면허증을 찾아가라는 연락도 받았다. 이제 진정한 수용의 단계로 나아간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방금도 lost 112에서 갈색 지갑글을 보고 전화를 하긴 했지만 말이다.


  진짜 그거 주워서 팔거나 본인이 쓰는 사람은 유병장수에 노년빈곤에 시달리기를 바란다. 남의 물건을 말이야. 정말. 가라앉은 줄 알았던 내 마음이 다시 혼탁해진다. 깊은 숨을 들이쉰다.


  나는 꼭, 주운 물건을 잘 돌려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렇게 눈물을 닦으며 글을 마무리해본다. 지갑아, 잘 지내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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