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부모님과 나와 여동생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4인 가정이다. 우리 가족은 불꽃파와 물결파로 나눌 수 있는데 아빠와 나는 불꽃파요, 엄마와 동생은 물결파이다.
불꽃파는 한 번 꽂히면 끝을 보고 짧고 강렬하게 타오른다. 마라톤 단기 주자처럼 주어진 목표를 향해 빠르고 신속하게 뛰어가고 그 과정에서 거침이 없다. 반면 물결파는 신중하고 조심성이 많다. 불꽃파에 비하면 진행 속도가 상대적으로 더디고 고민이 많아 불꽃파가 보기에는 답답 그 자체이다. 어떤 카페라도 주문에 10초 이상 걸리지 않는 나는 때로 일 분이 넘도록 음료를 고민하는 동생이 이해가지 않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는 셈이다.
아무튼 이런 불꽃형 인간인 내가 결혼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자 나는 주저 없이 노트북 앞에 앉았다. 편리한 21세기 정보화 시대 덕분에 순식간에 여러 네이버 카페와 결혼 관련 앱, 그리고 부동산 앱을 설치한 뒤 웨딩홀과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 나아가 신혼집까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무엇보다, [마스터 엑셀 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결혼 준비를 하며 이정표가 될만한 기준점이자 데이터 베이스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랑해요 엑셀 사랑해요 빌게이츠
엑셀. 입사 전까지만 하더라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프로그램이다. 허나 직장인 n년차가 되니 이제 웬만한 업무와 자료를 엑셀로 작성하고 있다.
업무에만 사용했던 이 엑셀이야 말로 나의 결혼 준비의 든든한 벗이 되기에 적합했다. 엑셀은 일정 및 숫자, 자료 정리에 딱이었다. 필요한 정보를 정리하고 두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의 통로가 될 수 있었다. 요즘은 구글 드라이브를 통해 실시간으로 자료 교환을 할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인터넷과 주변 결혼 선배들에게 엑셀 파일이 있냐고 요청했지만, 딱히 원하는 스타일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내 마음대로 만들기 시작했다.
22년 손없는 날이 킬링 포인트.
비용, 자산, 스드메, 웨딩홀, 신혼집, 청첩장 등 결혼 준비에 필요한 요소들을 하나의 시트로 전환했다. 묘한 쾌감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있던 테이블을 시각화하고 거기에 수식을 걸어 놓으니 답답했던 마음이 좀 풀리는 기분이었다. 막연하게 느껴졌던 결혼 준비가 손에 잡히는 느낌이었달까? 정성스럽게 만든 엑셀 파일을 구글 드라이브에 올려 남자친구에게 공유 링크를 보냈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생각했다. '잘 정리해서 나중에 크몽 같은데 팔아야지.'
같은 주 주말, 우리는 집 근처 카페로 향했다. 나는 노트북, 그는 태블릿을 들고서.
"오빠, 엑셀 봤어?"
"어 고생했더라. 잘 만들었어."
크, 정답을 아는 남자 같으니. 우선 열심히 만든 엑셀 파일의 대략적인 구조를 보여주었다. 협의가 필요한 부분, 나의 의견, 통상적인 세상의 흐름도 같이 말했다. 나아가 남자 친구가 작성해야 하는 부분을 데드라인과 함께 알려주었다. 마치 나는 PL(Project Leader), 오빠는 팀원 같았다. 회의는 수월하게 진행됐다. 시원하게 넘어가는 아젠다를 보며 스타트업에서 일해본 적은 없지만, 이런 게 스타트업의 회의 스타일일까 잠시 고민해보았다.
구글 드라이브를 활용해서 커뮤니케이션을 이어갔다.
우리는 신속하고 빠르게 주요 이슈에 대해 논의했다. 예식장은 00 지역에서, 스드메의 최대 금액은 00원으로, 신혼집 위치는 00 지역으로 하자, 같은. 큰 아웃라인을 논의하고 나머지 세부 사항은 언제까지 결정하기로 하며 첫 번째 미팅을 마쳤다. 핸드폰을 보니 두 시간이 흘러있었다. 아주 압축적이고 전진이 있는 두 시간이었다. 성공적인 킥 오프 미팅(KOM)을 마친 셈이었다.
구글 드라이브를 새로고침 하자 오늘 날짜로 새롭게 저장된 파일이 눈에 들어왔다. 늘어난 엑셀의 용량만큼 결혼이 조금 더 실감 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