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에세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과 경험으로 어떠한 비판의 의도도 담고 있지 않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알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직장인이 된 후로 서울의 야경이 멋진 풍경보다 누군가의 야근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결혼 준비를 시작하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바로 '웨딩 박람회' 였다.
웨딩피치는 재미있었는데 웨딩박람회는 어떨까, 궁금해졌다.
'웨딩'과 관련된 각종 요소를 모아 '박람회'를 개최한다니. 저곳에 가면 결혼에 관련된 다양한 고민거리가 한 큐에 해결될 것 같다는 막연한 희망이 생겼다. 아무리 남자 친구와 내가 머리를 맞대고 결혼의 프로세스를 공부해도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박람회에 가면 결혼 프로세스 공부 겸 정보 획득 겸 좋은 플래너를 만날 수 있겠다, 는 판단에 방문 예약을 걸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담당 플래너로 지정된 000입니다.'
예약이 끝나기가 무섭게 플래너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를 신부님이라고 부르다니. 어색한 호칭에 일단 소름이 돋았다.
우리는 가장 빠른 10시 타임으로 예약했다. 별 이유는 없었고 그 시간에 방문하면 준다는 냄비세트가 탐났다. 이미 안 쓰는 냄비가 서 너개 있음에도 누군가 준다는 냄비에 물욕이 생기는 것, 그것이 사람인가 싶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웨딩박람회는 냄비 따위에 혹하는 마음으로 갈 곳은 아니었다. 얼렁뚱땅 시간은 지나갔고 웨딩박람회 당일이 되어 우리는 쫄래쫄래 장소로 향했다.
시간에 맞춰 도착한 웨딩박람회 입구에서 살짝 기가 죽었다. 우선 사람이 너무 많았다. 분명 뉴스에서는 혼인율과 출산율이 낮아져서 국가적인 문제라고 했는데, 가짜 뉴스인 걸까. 수많은 커플이 제각각의 설렘을 갖고 줄을 서있었다. 다들 눈에 하트가 가득했다. 그 틈에 껴서 서있자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둘은 뭔지 구경하자는 의미에서 방문했는데 다들 굉장히 진심으로 보였다.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결혼을 준비해도 되는 걸까, 고작 냄비와 몰디브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 게 옳았던 것일까, 의문만을 품은 채 우리도 긴 줄에 합류했다.
000 웨딩박람회는 큰 규모답게 많은 인원을 빠르게 처리했다. 우리 커플도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것처럼 스무스하게 담당 플래너로 연결되었다. 미리 연락을 주고받은 플래너와 드디어 마주 앉아 인사를 나누자 묘한 실감이 났다. 긴 탁자의 바깥쪽에는 예비부부들이, 안쪽에는 플래너들이 줄을 지어 앉아있었다. 살짝 호그와트 식당 같기도 한 분위기였다. 밥 대신 샘플 앨범이 테이블 위에 가득한 점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눈치를 주지 않았는데 분위기와 공기에 압도되었다. 와, 나 진짜 결혼하는구나. 새삼 실감 났다.
밝은 인상의 플래너는 프로답게 결혼 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충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결혼의 과정은 복잡했다. 게다가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렸다. 6월에 결혼이라면 1월에는 사진 촬영을 해야 한다는 설명에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나 빨리…? 높은 솔 톤으로 빠르게 읊는 플래너의 정보를 듣고 있자니 동공이 탁해졌다.
그녀는, 우선 시간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내년 6월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일 년 가까이 남았는데도 빠르게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기 있는 웨딩홀이나 스튜디오는 경쟁이 엄청나서 지금부터 부지런히 예약해야 원하는 시기에 진행할 수 있다며 뽐뿌를 넣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다들 숨어서 결혼을 하는 걸까. 우리 동네 웨딩홀은 철거를 하던데. 이렇게 웨딩홀들이 장사를 접어서 웨딩홀이 모자라는 걸까.
그러나 애써 객관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려 해도, 이 모든 것이 공포 마케팅같이 느껴졌다. 마치 홈쇼핑의 매진 임박같이. 지금 하지 않으면 아주 기회는 날아가버린다는 식의 세일즈였다.
"오늘 계약금 20만 원만 넣으시면 되구요, 나머지는 같이 준비해나가면 됩니다."
정신 차려보니 우리는 20만 원을 내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있었다. 당연히 계약을 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 일 년이나 남았고, 더 알아볼 것들이 많았다. 플래너님께 조금 더 생각해보겠다고 하자, 시간이 지나면 가격이 올라갈 수 있고 우선 플래너를 믿고 같이 결혼을 준비하자고 권유했다.
… 나는 가족도 안 믿는 사람인 걸?
남자 친구와 잠시 의논해보았다. 그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조금 더 알아보자. 우리의 계속된 난색에 그녀는 5분의 시간을 주겠다고 했다. 이때부터 슬슬 정신줄을 놓았던 것 같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의 생각하는 의자에 앉은 것 마냥 5분을 흘려보냈다. 크게 생각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5분 뒤에도 우리는 오늘 계약이 어렵다고 말하자 그녀는 본인을 믿지 못하겠냐며 20만 원은 2주 이내에 환불받을 수 있으니 일단 계약을 하지 않겠냐고 권했다. 이때부터 정신이 멍해졌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 정말 잘 챙겨드릴 자신이 있다는 등 플래너는 진정성 있는 호소를 하였으나 업체 한 군데만을 알아보고 계약을 하기에는 아쉬웠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던 실랑이는 오늘 여섯 시 전까지 다시 한번 카톡을 드리겠다, 는 약속으로 간신히 끝났고 그렇게 첫 번째 웨딩박람회는 끝이 났다. 4, 50분 정도 소요되었는데 체감상 세 시간은 앉아있었던 것 같았다.
이런 곳에 오면서 영업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허나 이토록 강렬한 영업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예상한 것은 "생각하고 연락드릴게요."라고 하면 "네, 연락 주세요." 수준의 강도였다. 설명은 삼십 분을 들었는데 하니, 마니 하는데 이십 분이 걸렸다. 세상에나. 오전 10시 방문의 혜택이었던 냄비는 당연히 받지 못했다. 계약을 해야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오기만 하면 주는 줄 알았는데,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웨딩박람회.
진이 빠진 채로 털레털레 돌아가면서 플래너가 설명했던 결혼의 통상적인 준비 과정을 떠올렸다.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상견례, 본식 촬영, 웨딩홀 예약, 폐백, 신혼여행, 예물, 예단 등등 너무 많은 아젠다가 머리를 가득 채웠다.
"... 오빠. 우리 그냥 물 떠놓고 결혼할까? 나 결혼할 자신이 없다."
"응?"
"우리 대충 유튜브 생중계랑 인스타 라방, 트위치 켜놓고 온라인 결혼식 하면서 도네나 받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