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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링기 Jul 10. 2023

17번째쯤 되는 다짐

어떤 추억은 느닷없이 떠오르곤 한다. 

  우리 집 사람들은 개코다. 정확히 얘기하면 엄마와 나, 내 동생이 개코다. 우리 세 모녀는 냄새에 민감하고 남들은 맡지 못하는 향기부터 악취까지 빠르게 감지한다. 어쩔 수 없이 가끔 아빠는 소외감이 들 수밖에 없게, 같은 장소를 방문하거나 같은 음식을 먹어도 아빠와 우리 셋의 의견은 나뉘게 된다. “아니, 이게 안 느껴져?”, “똑같구먼 뭘 유난이야.”, “이건 유난이 아니라 아빠가 못 느끼는 거야.” 몇 차례 실랑이가 오가면 쪽수에 장사 없다고 아빠는 패배를 선언한다. 


  이와 같은 후각적 특성은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게 확실한 게 우리 외할머니도 정말 냄새를 잘 맡으셨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감각이 예민하셨다. 나이가 들면 오감이 둔해진다고 하셨는데 외할머니는 등이 굽어도 변함없는 날카로운 감각으로 음식도 곧잘 하셨고 집안 살림도 잘 꾸려나가셨다.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지만 외할머니는 빠르고 효율적으로 부엌일을 하셨었다.

이것 역시 DNA의 힘인걸까

  외할머니의 후각 능력은 자연스럽게 세탁이나 청결로 이어졌다. 외할머니는 그 옛날 우리 엄마가 어릴 때부터 매일 씻기고 수건은 삶아 내어 주고 옷은 늘 다려 입혔다고 한다. 그 당시의 청결 기준으로는 일주일에 두세 번 씻겨도 평균이었는데 엄마는 하루도 빠짐없이 씻었다고 하니 외할머니의 노고가 그대로 느껴졌다.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엄마도 한 번 입은 옷은 음식 냄새가 밴다며 피곤해도 세탁기에 넣어 말끔하게 빨래하곤 한다. 육십이 넘었지만 갈수록 향과 맛에 민감해지는 엄마를 보고 있자면 외할머니가 절로 떠오른다. 엄마도 외할머니처럼 정갈한 할머니가 될까. 


  물론 나도 그에 뒤지지 않는다. 대학생 시절, 처음으로 혼자 꾸려보는 자취생의 살림은 어딘가 어설펐지만 청결이나 세탁에 관해서는 관대하지 않았다. 외출복, 실내복, 잠옷을 철저히 분리해 구별했으며 세탁기를 돌릴 때에도 나름의 시스템을 정해서 운영했다. 침대는 신성공간이었다. 항상 다 씻고 잠옷을 입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지역이었다. 아무리 술에 취해도 바닥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침대는 건드리지 않았다. 쪼랩의 살림은 점점 모양새가 나아져 오늘은 조금 더 그럴싸해졌지만 여전히 엄마나 외할머니에 비하면 갈 길이 멀다.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외할머니를 뵐 때면 항상 좋은 냄새가 났다. 그 비밀이 정말 궁금했다. 외람된 표현일 수 있지만 외할머니는 흔히 말하는 노인네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비교하려는 건 아니지만, 친할머니나 친할아버지와는 달랐다.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체취가 변한다고 하지 않는가. 어쩌면 자연스러운 세월의 변화일 수도 있는데 외할머니는 늘 보송보송하고 기분 좋은 향을 풍겼다. 화학 약품을 좋아하지 않아 바디워시나 크림도 최소한으로 바르셨는데 어떻게 그토록 말끔하고 정갈한 체취가 나시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면 소재 옷을 삶아 입으셔서 그런 걸까? 혼자 궁리하다 엄마한테 슬쩍 물어보면, “너희 외할머니가 깨끗한 걸 좋아하시잖니.” 라며 별 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지만 내가 외할머니 나이가 되면 저렇게까지 깔끔할 수 있을지 고민에 잠겼다. 


  기분 좋은 향이었지만 자주 맡지는 못했다. 나는 대학교에, 회사에 바쁜 어른이었으니까. 외할머니를 뵙고 인사를 하는 것은 나의 우선순위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렇게 데면데면한 외손녀로 지냈었고, 임팩트 있는 효도를 할 기회도 없이 외할머니를 보내드린지도 벌써 2년이 다 돼 간다. 다른 것보다 결혼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게 참 아쉽다. 외할머니는 잘 참는 분이셨다. 어쩌다 한 번, 나에게 만나는 남자가 있냐고 물어보았는데 인정머리 없는 나는 그런 거 없다고 대충 말을 뭉개버렸다. 사실 그 당시 남편과 연애 중이었는데, 사실대로 말하면 피곤해질 것 같아 거짓말을 해버렸다. 그냥 솔직히 말하고 사진도 보여드릴걸. 외할머니가 궁금해할 수도 있는데. 그때 내 대답이 쌀쌀맞아서인지 이후로 외할머니는 한 번도 나에게 남자 친구에 관련된 것을 묻지 않았다. 한 번은 남편과 함께 외할머니 산소에 다녀왔다. 그렇게 늦게나마 외할머니에게 새로 생긴 가족을 소개했다. 

  이제 외할머니의 보송보송한, 햇살감이 느껴지는 폭신폭신한 냄새는 맡을 수 없다. 어쩌다 널어놓은 이불, 갓 삶은 수건에서 비슷한 향을 만나곤 한다. 그렇지만 똑 닮은 그 냄새는 아직 찾지 못했다. 어쩌면 나보다 엄마가 더 그 냄새가 그립겠지. 가족의 체취를 더 느껴보는 23년이 돼야지,라고 또 다짐해 본다. 


  올해 이와 유사한 다짐을 17번쯤 한 것 같긴 하다만, 이번에는 진짜라고 믿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납량특집 : 나, 그리고 바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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