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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 do rough May 01. 2021

봄 햇살 내리쬐는 겨울밤에

Leeview #5, 인생의 계절, 윤성용

'나, 그리고 당신,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작은 존재다.'


봄 햇살 내리쬐는 겨울 밤에, 「인생의 계절」을 읽었다.

아직은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쾌청한 하늘을 바라볼 수 있음에 감사하는 요즘, 내 인생의 계절은 지금과는 묘하게 어긋나버린 듯하여 더욱 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떠나기도 전에 그리워지는 가을이 왔다. 무화과는 부드럽게 익어가고 바람은 쓸쓸하게 스치며, 무엇보다도 습기없이 바스락거리는 햇볕에 세상은 새로운 면을 내게 보여준다. 마냥 천진하지도, 너무 절망하지도 않은 계절. 이런 계절이라면 다음 일 년도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겠다.
- 「인생의 계절」가을 中


처음 책의 주제를 들었을 때, 많은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좋은 주제라는 생각을 했다. 인생을 시간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고, 그중에서도 사계절을 인생에 빗대는 경우가 나에게는 가장 익숙했다. '내 인생의 봄날이 간다'거나 '그 시절 우리는 한여름에 쏟아지는 햇살과 같았다' 같은 표현들 덕분에. 하지만 이 책에는 이런 선입견을 뒤흔들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이 담겨 있다.


인생의 시작을 봄으로, 끝을 겨울로 비유하는 클리셰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봄날이 가면 다음 봄날을 기다리는 것이고 겨울이 오면 지난 여름의 따뜻함을 회상하며 다음 여름까지 견뎌보자는 생각의 전환. 내 인생의 계절은 비록 내가 살아가는 현실과 다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일말의 위로를 건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마냥 기다린다고 다음 계절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기에 지금을 잘 살아내야 한다는, 인생 선배스러운 교훈적인 메세지도 살짝 얹혀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없이 사랑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잘 쓰인 '시'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당신과 나의 관계는 잘 쓰인 시와 같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방식으로 당신과 마음을 전하는 날이 우리의 생각보다 오래이길 바라고 있습니다. …
나는 문득 그녀를 생각하며 지은 시를 떠올렸습니다. '들에는 봄볕이 나리는데 / 송악산 봄처녀는 어디로 떠나고 / 그 꽃은 어디로 저물었나'로 끝나는 시였습니다.
- 「인생의 계절」가을 中


'멋스럽다'는 단편적인 감상으로 단정 짓기에는 죄송한 마음이 들 정도로, 이 책에는 좋은 문장들이 곳곳에 가득하다.


이 책을 끝까지 읽던 내 마음이 더부룩하지 않고 잔잔했던 이유는, 감정을 표현하는 작가님 특유의 스타일 덕분이 아닌가 싶다. 감정이 있는 그대로 듬뿍 담긴 적나라한 단어들 대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곱씹게 되는 은은하게 비유적인 단어들을 선택함으로써, 책을 읽던 나는 불필요하게 전이되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고요하게 문장 속 단어들을 찬찬히 음미할 수 있었다.


무릇 에세이라는 장르가 솔직한 표현을 통해 각자의 삶을 연결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긴 하나, 자신이 그어놓은 일정한 선을 지키려는 신념이 느껴지는 문장들을 마주하면서 작가님의 평소 가치관이나 성격까지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작가님을 닮아있는 문장들이어서 더욱 좋았다. 어쩌면 나 또한 그런 류의 사람이기에 더 반갑게 느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서 더 나은 삶을 바라는 것은, 바람이 빠진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일과 같다. 페달을 아무리 열심히 밟아도 앞으로 나아가질 않으니 누구라도 금방 지치게 되어있다. 근성있게 버티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그때는 무엇보다도 자전거를 멈추고 바퀴를 점검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 「인생의 계절」겨울 中


봄날은 언제였던가. 그리 멀지도 않았지만 그리 길지도 않게, 꽃 내음을 맡을 새도 없이 지나가 버린. 이어지는 여름에 뜨겁게 흘린 땀은 가을 바람에 순식간에 산화되어 나를 차갑게 식혔고, 그 덕에 잘 걸리지도 않던 지독한 몸살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본래 감기에 걸리면 평소에는 잘 찾지도 않던 아이스크림이 그렇게 먹고 싶은 거라, 그때로 돌아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이가 시리도록 달콤해지고 싶다는 향수에 스스로를 흠뻑 적시고 있는 꼴이라니.


나는 아무래도 겨울을 지나고 있다. 이 순간이 여전히 겨울의 초입인지, 혹은 마지막의 마지막을 지나는 꽃샘추위인지는 알 길이 없다. 허나, 아직은 마지막 봄 햇살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것보다 그늘에 앉아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더 따스하게 느껴지는 나를 보니, 내 인생의 계절은 꽤나 긴 겨울을 앞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피어난다.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나이기에, 대신 나를 데려다줄 두 다리를 겨우내 점검하며 봄을 맞이하려 한다. 많이 묻고,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듣고, 많이 느끼며. 그 과정에서 「인생의 계절」이 모닥불의 작은 불씨가 되어줄 것만 같다. 아, 무진을 찾아 떠나는 일도 잊지 않으려 한다. 어쩌면 그러는 와중에 우연히 봄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



그러니까 짧게 말하자면,

당신의 인생은, 어느 계절을 지나고 있습니까?



글쓴이   두루 Do, rough

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1인 기획-편집-디자인 독립 잡지 「매거진 손」을 제작하고,

우리 주변의 소소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다루는 1인 출판사 [스튜디오 두루]를 운영 중입니다.

글쓰기를 통해 나와 주변과 세상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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