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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 do rough Jul 14. 2021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Leeview #7, 재주는 곰이 부리고, 서울변방연극제, 원의안과밖

*이 글은 thisisnotchurch(구 명성교회)에서 열린 제20회 서울변방연극제의 개막극 <재주는 곰이 부리고>(2021.07., 원의안과밖)를 관람하고 쓰는 후기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주제는 곰이 부리고."

...

"아니 아니!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돼지가 먹는다였나?


여튼, 재주를 곰이 부리는 이 연극이 남긴 불구덩이는 우리의 부끄러움을 모두 집어삼킬 듯 영원히 타오르고 있다.


그 불구덩이의, 그 빨갛고 동그란 후프의, 그러니까 그 원의 안과 밖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인가.


"땅을 밟고 살아야 혀!"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을 펼치는 각양각색의 존재들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삐죽희끗한 존재의 일갈. 하지만 미련하게도 그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대로 움직이는 듯하다.

구르고, 널뛰고, 타오르고, 날뛰는 사이 무대가 세워지고 조명이 타오른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런 모습들을 멀뚱하니, 멀끔하게 바라본다.




내가 알던 연극에는 막 이라는 개념이 있다.


단막극은 단편 소설과 같이 원테이크에 가까운 짧은 호흡인 것처럼. 막은 극과 극 사이 이야기를 연결하기 위해 쉬어가는 단위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대 앞을 넉넉히 가리는 장막으로 구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 명성교회였던 곳에서 열린 서울변방연극제의 개막극 <재주는 곰이 부리고>의 장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엄밀하게는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에, 극과 현실의 경계를 가리기 위한 아주 얇은 천이 대기실 앞을 가리고 있었을 뿐이다.


부끄러움을 가려줄 장막도 없이 막과 막 사이를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들은 우리가 미처 상상치 못한 연극의 이면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비록 조명을 받진 못할지라도 숨을 헐떡이고, 무대 장치를 쓸고 닦고, 옷을 갈아입고, 다음 역할로 변신할 준비를 하는 모습까지 전부.

분주함은 시각뿐 아니라 청각도 자극하여, 무대는 빌 틈이 없게 가득 채워진다.


"사람들은, (읏차)

대체 왜,

이걸, (휴)-보는 걸까?"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 반복적으로 던져지는 질문. 되레, 곡예를 하는 중에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 민망할 정도로 적막하다. 관객의 숨소리까지 죽어버린 그 공간에, 오직 허락되는 소리는 그들의 거친 움직임이 쓸리고 부딪히고 긁히며 나는 자연적인 소리뿐.

그래서인지, 곡예는 곡예답지 않게 처연하고 그 소리는 아름다운 움직임과 대비되는 구슬픔을 갖고 있다.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이 이어지는 동작들에 몰입하다 보면 내가 더 절박한 마음이다. 그래서인지 다들 그렇게 홀린 듯 박수를 터뜨리는 것이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박수를 칠 수 없었다.




"천막이 다 불타버렸지. 누가 먼저 죽었는지는 알게 뭐람."


재주를 모두 부리고 난 후, 가려져 있던 보이지 않는 장막은 걷히고, 그 속에 숨겨져 있던 이야기는 드러난다.

화상을 입고, 살갗이 뜯기고, 추락하며 영혼을 빼앗기는 곰들. 달궈진 육신의 영혼들은 한 무더기 재가 되어 원을 그린다.


넋을 기리며 눈시울을 붉힌다. 박수를 치지 않은 나는 끄덕인다. 박수를 치려던 나는 부끄럽다.



붉은 원을 타고 오르는 마지막 곰을 보며 생각한다.


"그러지 말아라, 안돼, 제발 내려와."


무형의 경계가 유형의 것이 되었을 때, 그 경계를 넘나들며 힘겹게 살아가던 그들이 결국 죽음을 맞이할 때, 그리고 그 죽음에 기뻐하며 신나게 박수를 칠 때.

우리의 시선은 원 안이 아니라, 원 밖에 엉덩이를 붙인 채 원 안에 발을 걸치고는 무심하게 우리를 바라보는 그에게 향해야 다.




그러니까 짧게 말하자면,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먹는다'는 주제는 곰이 부렸지. 그리고 결국에는, 아무것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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