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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미남편 Jun 18. 2024

day30 사리아-포르토마린


산티아고 순례길 30일차(사리아-포르토마린)


길을 걷기 시작한 지 꼬박 30일이 지났다. 오늘은 전체걸어야할 800km의 여정중 드디어 700km을 돌파하고 100km 지점을 통과해서 이제는 산티아고 까지 남은 거리가 두 자릿수가 되는 날이다. 레온을 제외하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다른 곳에서 잠을 자고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하며 바뀌는 환경에 적응해 가며 이만큼 까지 해냈다는게 참 대견하고 뿌듯했다. 


알람이 없어도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침낭을 정리하고, 양말을 신고, 등산화를 신고, 일사불란하게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서는 건 이제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어제 마트에서 사둔 시리얼을 아침으로 든든하게 먹고 오늘도 길을 나섰다. 한동안 15km 언저리의 짧은 거리만 걸어오다 오늘은 23km를 걸어가기로 했다. 다리의 통증이 혹시나 재발하지 않을까 겁이 났지만 다리를 핑계로 일정을 계속 지체할 수는 없었기에 도전 해보고자 했다. 


사리아부터는 아침에 출발 할때 보여지는 것들이 너무나도 달랐다. 100km부터 주는 증명서를 받기 위함 때문인지 길에 사람이 너무 많이 있었다.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그 많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 조금씩 줄어들더니 이내 지평선이 보이는 넓은 땅에도 아내와 나 둘만 서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동안 보고 느꼈던 풍경들은 그대로인데 길을 걷는 사람 수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이제야 길을 걷기 시작한 그들은 활기찼으며 신났으며 설레여 했다. 왁자지껄 시끄럽기도 했고 한두 명이 아닌 20~30명이 무리 지어 다니기도 했다. 아내와 나는 이미 30일 전에 느꼈던 감정들을 지금 걷기 시작한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한 달여간을 걸으면서 너무나도 익숙했던 나머지 이제는 매일매일 같은 풍경 같은 일상에 반복에 사진도 찍지 않으며 묵묵히 길을 걸어 나가지만 그들은 연신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뛰다시피 우리 옆을 제쳐 나갔다. 


우리 역시 여행을 하는 중이었지만 생장부터 여기까지 700km를 걸어온 "순례자"와 사리아부터 걷는 "관광객" 은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겉모습만 봐도 순례자 들은 피부가 까맣게 탔거나 벌겋게 익어 있었고 걸음걸이 또한 조심스러웠으나 관광객 들은 하얀 속살과 뛰는듯한 걸음걸이를 걷는 차이를 보여줬다. 


익숙하지 않은 처음 보는 길이지만 매일매일 걷다 보니 이제 걷는 게 익숙해져서 당연한 게 됐다. 당연한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지 못한 채 걷다가 보니 내 옆에 아내가 있는 것도 당연하고 그에 대한 감사함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순례길 초반만 해도 나는 늘 아내에게 미안하고 감사했으며 항상 모든 것이 아내가 우선이었다. 하지만 길을 걸으며 아내가 내 옆을 걷는 건 당연했으며 그러면서 점점 미안함과 감사함이 사라진 것 같았다. 


언젠가 정강이가 아프기 시작할 때부턴 내가 우선이 되었기에 더더욱 아내에게 신경을 못써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관계는 더 익숙해지고 더 두터워졌지만 이걸 당연하다고 생각하진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아내를 기분 좋게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공주님"

"응? 뭐라고?"

"사랑하는 내 공주님"

"오? 또 해봐"

"공주님 오늘도 파이팅!"


아내에게 뜬금없이 공주님이라는 호칭을 불러주자 아내는 아이 처럼 웃으면서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자꾸 듣고 싶다며 공주님 소리를 또 해달라고 한다. 처음 몇 번은 좋아하는 모습의 아내를 위해 공주님 소리를 몇 번 더 해주다가 이내 장난기가 발동해 청개구리 처럼 더 이상 공주님 소리는 해주지 않았다.


공주님 이라는 세글자로 기분 좋고 유쾌하게 길을 걸은지 얼마 되지 않아 드디어 100km 표시석을 보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 보면 중간중간 표시석이 하나씩 세워져 있다. 그리고 이 표시석 밑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의 남은 거리가 표기되어 있다. 처음 795km 표시 석부터 시작해서 어느새 100km 표시석을 만나니 감회가 새롭다. 이 표시석을 지나고부터는 세 자릿수가 아닌 두 자릿수가 표기된 표시석이 우리를 반겼다. 


100km 표시석을 본것이 참 반가웠고 기쁜 마음이 들었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그만큼 내가 걸을수 있는 날이 줄어들고 있다는 표시일 테니 말이다. 


참 많이도 걸었고 오래 해왔다. 이제 약 5일 정도면 이 길이 끝나게 되고, 이제는 끝나는 지점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5일 뒤면 끝난다는 생각에 한편으론 매우 아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조금 더 준비를 해서 왔으면 이 길을 걸을 때 어떻게 걷고, 어떻게 쉬며, 어떤 준비를 하면 좋았을지 끝무렵이 되니깐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여유가 된다면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몸을 좀 요양하고 나도 역주행을 하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드디어 100km 표시석

오늘의 목적지인 포르토마린은 스페인 사람들이 찾는 휴양 도시라는 얘기를 들었다. 지도를 보며 걸을 때 바다와는 멀리 떨어져서 걷고 있었기 때문에 바다도 없는데 무슨 휴양 도시 일지라는 생각 하며 도착해보니 바다 대신 정말 넓은 강이 있었다. 강을 건너기 위해 긴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사람이 건널 수 있는 인도는 폭이 좁았고 왼쪽은 차가 쌩쌩 달리고 있고 오른쪽은 바로 강이어서 혹시나 떨어질까 봐 겁이 났다. 


걷는 동안 한동안 아프던 정강이는 괜찮았지만 어제 괜찮았던 발목이 다시 아파왔다. 여느 때처럼 아픔이 고조에 올랐을 때 오늘의 목적지인 포르토마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휴양 도시인만큼 숙박시설도 참 다양히 많이 있었고 식당들도 정말 많이 있었다. 순례길을 걷는 초기에만 해도 우리는 항상 공립 알베르게를 들어갔었는데 언젠가부터는 다음날 도착해서 머무를 알베르게를 미리 검색해서 조금이나마 더 좋은 알베르게를 들어가려고 노력했다. 오늘 역시나 알베르게 선택은 최고였다.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오랜만에 점심을 식당에서 사 먹기로 했다. 관광 도시답게 식당가가 즐비한 곳에서 마음에 드는 식당을 정해 길가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있다 보니 어제 만난 반포 아줌마 부부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알베르게를 정하지 않았고 걷고 있는 중 이었으나 자는것 보다 배고픔이 먼저라며 이내 우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자연스럽게 합석을 하고 함께 점심을 먹었다. 우리가 묵은 알베르게가 괜찮아서 추천했지만 이미 먼저 온 순례자들로 인하여 우리가 묵는 알베르게는 마감되어버린 상황이었기에 같은 알베르게에 묵지는 못했다. 


"역시 젊으니깐 속도가 아주 빠르네"

"아니에요 저희도 방금 도착했는걸요"

"벌써 알베르게 까지 잡아놓고 이렇게 휴식하고 있는데 빠른 거지"

"저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찍 출발했어요"

"내일은 어디까지 걸어갈 예정이에요?"


반포 아줌마 부부와 우리는 내일도 목적지가 동일했다. 서로 어디 알베르게로 같이 가자고 정해놓지는 않았지만 목적지가 같으면 길을 걸다가도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만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곤 각자의 알베르게로 돌아갔고 아내와 나는 마침 우리가 묶는 알베르게 바로 옆에 마트가 있는 것을 보고는 저녁거리를 준비해서 들어갔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한동안 고통이 조금은 줄었던 발목이 참 많이도 아팠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15~18km의 짧은 거리를 걷다가 오늘은 다시 20km 이 넘는 거리를 걸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알베르게에서 대야에 냉수를 받아 발을 담그고 냉찜질을 하는데 알베르게에서 냉찜질은 정말 행복한 시간인 것 같다. 이제 5일 뒤면 도착할 수 있으니 내 다리와 발에게 냉찜질을 하면서 조금만 더 힘을 내달라고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알베르게에서 냉찜질을 하면서 적당한 휴식을 취하고는 저녁을 먹기 위해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마트에 가보니 반갑게도 삼겹살이 진공 포장돼서 판매되고 있길래 오늘 저녁은 삼겹살을 먹자며 진공 포장된 삼겹살 한팩을 들고 왔다. 쌀을 사서 흰쌀밥을 하고 삼겹살을 구워 저녁을 만들어 먹는데 삼겹살을 잘라 익히다 보니 양이 너무 적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고기를 굽고 있는 동안 아내가 마트에서 한팩을 더 사 와서 그마저도 다 잘라서 구워 맛있게 잘지어진 흰쌀밥과 함께 고기를 한점 먹었다가 얼굴이 굳어버렸다.


알고 보니 삼겹살이 그냥 진공 포장된 게 아니라 스페인 특유의 소금과 기타 다른 향신료로 절임을 해둔 삼겹살이었다. 겉보기엔 너무나 일반 삼겹살과 똑같이 보이던 그것이 구역질 날정도로 맛이 없는 메뉴로 변해버려서 평소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을 잘 못 먹는 나는 하나도 먹지 못했고 아내는 그나마 몇 점 먹기는 했는데 나중에 얘기해보니 정말 먹지도 못할 정도로 구역질이 났는데 맛있어 보여서 일부러 한팩을 더사온 게 아까와서 억지로 먹었다고 했다. 


그동안 참 많은 스페인 문화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또 하나 새로운 것에 당하고 말았다. 결국 삼겹살과 함께 먹을 올리브와 궁금해서 하나 구매했던 문어 통조림 흰쌀밥으로 대충 저녁을 때우고 맛있게 구웠던 삼겹살은 모두 버리게 되었다. 


오늘 일과를 다 마치고 잠자기 전 알베르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문득 오늘 오전 일이 기억이 났다. 공주님이라는 소리가 그렇게 좋았나? 다시 한번 공주님 하고 불러보자 또다시 어린애 처럼 좋아한다. 내친김에 그동안 걷느냐고 고생했을 아내의 다리와 발을 주물러 주며 오늘도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앞으로 남은 일정도 잘 마치자고 했더니 그렇게 행복해 할 수가 없다. 이 길에서 아내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료이며 동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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