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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시간이 걸어온 곳을 함께

어르신들과 머문 하루

by 제노도아

하늘 맑고 햇볕이 따뜻한 날,

어르신들과 함께 파주 삼릉으로 떠난다.

숲 향기가 기분 좋게 스며든다.

"와아, 공기가 다르네."

"뭐가? 숲 공기가, 왕족들 공기가."

"둘 다여!"

삼릉 오솔길을 걸으며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다.

"좀 천천히들 걸어. 내가 니들인 줄 알어?"

버럭순 어르신이 냅다 소리를 지른다.

"그래도 우리 중에 왕언니가 제일 다리가 성해요. 지팡이도 안 짚으시잖아요."

나들이 한 번 하려면 지팡이가 짐이라며 꽃잎화님이 한숨을 쉬신다.

어르신들은 걸음을 멈추었다가 다시 천천히, 서로 보폭을 맞춘다.

삼릉의 길은 어르신들이 걸으시기에 별 무리가 없이 완만하다.

바스락바스락, 마른 낙엽이 반기듯 소리를 낸다.

기분 좋은 나들이 날이다.


삼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이 모여 있는 곳이다.

공릉과 순릉, 영릉을 통칭한 능호이다.

"이렇게 잘 가꾼 걸 보니 그분들도 편히 쉬실 거야."

어르신들은 왕릉들이 넓게 펼쳐진 것을 보고 서로 고개를 끄덕인다.

해설자의 말도 조용히 귀담아듣는다.

유적지를 둘러보면 들떴던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리고 마음을 낮추게 된다.

설명이 끝나자 한 말씀씩 하신다.

"왕이나 왕비나 사람이 죽는 건 다 똑같아. 살아 있을 때 서로 위하며 살아야지."

"왕족이었으니 저렇게 큰 묘에서 잘 주무시겠지만, 세상 떠나 잠드는 건 우리와 마찬가지야."

"맞어. 나라의 어른이셨으니 잘 다듬어놓은 거지, 조상에 대한 예의로."

어르신들은 낯익은 듯 낯선 듯한 묘역을 바라보며 한참 머물러 계신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전부 이 숲 속 여기저기 쌓여 있는 것 같네.”

삽상한 바람이 불어 어르신들의 마음을 다독다독거린다.

어르신들은 잠시 말을 멈추고 그곳 풍경을 오래 바라보신다.

“나도 언젠가 이런 자연 속에서 쉬고 싶어요.”

고운정님이 가만가만 속삭이듯 말한다.

"자네 곱게 꾸미는 것을 보면 예전엔 왕비였을지도 모르지."

구슬옥님이 오늘도 분홍빛으로 단장한 고운정님을 보며 말한다.

"그러기라도 했음 얼마나 좋겠어요. 지금 어떻게, 비슷하게라도 될까?"

"그러기엔 우리가 너무 늙었어."

와하하, 웃음소리가 숲을 돌아 나온다.

"조용, 조용! 공공장소에선 조용히 하기."

은백자님이 집게손가락을 입에 댄다.


삼릉의 숲길은 걷는 내내 조용하고 따뜻하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면서 어르신들은 갑자기 말이 없으시다. 각자 생각에 잠기신 듯하다.

왕릉도 묘이니 평소와는 다른 생각을 하시는 듯하다.

어르신들은 죽음을 가까운 친구라고 말씀하신다.

삼릉을 나오는 길에서 어르신들은 말없이 나온 길을 돌아보신다.

햇빛과 바람, 그리고 나란히 걷던 서로의 걸음이 모두의 마음에 무언가를 담게 한 듯하다.

오래된 시간과 지금의 시간이 만나 마음을 정리해 주는 하루 같다.

“오늘도 참 좋았어."

“이런 데 오니까 마음이 편해지네.”

어르신들의 말속에는 함께 나누었던 다정함과 고마움이 묻어 있다.

그 마음은 어르신들의 기억 속에 오래오래 간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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