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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글로 엮은 우리들의 가을

어르신들의 작은 백일장, 마음이 배부른 날

by 제노도아

'가을'을 배우는 날이다.

목적지에 가는 길, 알록달록한 단풍과 파아란 하늘이 가을답다.

차 안은 왁자지껄, 질문과 답이 교차한다. 소녀들 소풍길 같다.

분홍빛으로 곱게 차려입으신 고운정님이 묻는다.

"왜 우리를 초대한대요?"

내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한다.

"어르신들 맛있는 것 실컷 드시게 하려고요."

은백자님이 조심스레 말한다.

"우리들 먹이려면 음식 장만하기 어려울 텐데요."

"맞어, 우리가 좀 많이 먹남."

"우린 배꼴이 커서 그래."

우하하하 웃음이 터진다. 그리고 서로의 배를 바라본다.

건강한 어르신들은 식사도 잘하신다.

"그나저나 고마워서 어쩐대요."

구슬옥님이 걱정스레 말한다.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시려나..."

명랑희님의 목소리가 밝다.

"아, 가서 들음 되지 뭐가 벌써부터 궁금해?"

버럭순님이 소리를 높인다.

나는 어르신들을 돌아보며 말한다.

"어르신들 늦깎이 배움에 감동하셔서 격려해 주신대요."

우리가 탄 봉고차가, 겨우 한 대 드나들 수 있는 시골길을 달리다가 마주 오는 자가용 한 대를 만났다.

길섶 안으로 자가용이 멈춰 선다.

"고마워요, 기사 양반!"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어르신들이 인사한다.

운전자가 창문 밖으로 손을 흔든다.


낮은 산자락 밑에 별장처럼 지어진 그 집은 전원주택의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다.

마당엔 은행잎이 노랗게 내려앉고, 창가에 국화가 환하게 피어있다. 나무 그네도 있다.

"어머나, 그네도 있네. 나올 때 한 번 앉아 봐야지."

금향순님은 그네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집주인은 반가이 문을 열고 나온다.

초면인 집주인과 구면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집안으로 들어간다.

잘 정돈된 집안이 깔끔하다.

어르신들은 주인 허락받고 여기저기 집안 구경을 한다.

집이 넓어서인지 식탁도 엄청 크다.

아직 식사 준비가 되지 않아 그 식탁에서 가을을 주제로 백일장을 먼저 하기로 한다.

어르신들은 글을 쓴다고 하니 조금 쑥스러워하며 연필을 든다.

"배움에는 늦음이 없어요. 오늘은 글로 마음을 나누는 날이네요.”

집주인이 편하게 마음을 풀어준다.

어르신들은 잠시 창밖을 내다보다가 각자 느끼신 대로 가을을 쓴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묘하게 가을과 어울린다.

"올가을은 참 반가워. 윤달이 길어서 여름이 너무 덥고 지루했어."

"내 팔십 평생 그렇게 더운 건 처음이야."

"맞아, 가을이 왜 안 오나 기다렸지."

"그런데 가을이 후딱 지나갈 것 같혀."

"날씨가 이러니 단풍이 예전처럼 곱질 않구."

"요새는 여름과 겨울만 있는 것 같다니까."

서로 이야기를 나누시며 시처럼 짧은 글을 쓴다.

종이 여백에는 나름대로 솜씨껏 그림을 그린다.

"완성!"

한 분이 먼저 자랑스레 종이를 높이 든다.

모두 글을 쓴 뒤 한 분씩 돌아가며 낭송한다.

글은 짧지만, 그 속엔 어르신들의 긴 세월이 묻어 있다.

낭송이 끝나자 큰 박수와 칭찬이 이어진다. 칭찬으로 어르신들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피어난다.

"세상에, 우리 어르신들 너무 잘하셨어요."

"모두 멋진 시인이시네요."

집주인이 활짝 웃으며 질문한다.

"어르신들, 글을 배우시니 무엇이 제일 좋으세요?"

간판을 읽을 수 있어 좋다는 분, 음식점의 메뉴판을 보며 골라 먹을 수 있어서 좋다는 분, 자식들과 손주 생일에 편지를 쓸 수 있어서 좋다는 분...

금향순님은 “글씨를 배우니 세상이 새로워졌어요.” 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초대하신 분들과 어르신들은 금세 친숙해진다.

어르신들은 따님을 보듯이, 초대하신 분들은 어머니를 보듯이 금방 소통이 된다. 거리감이 전혀 없다.

어르신들은 잔치상처럼 푸짐한 상차림을 보시더니 고무줄 바지를 잘 입고 왔다며 웃으신다.

주인이 준비한 식탁에는 따뜻한 된장국과 숯불에 구운 고기, 직접 가꾼 채소로 만든 반찬이 푸짐하다.

"야아, 오늘이 우리 생일이네."

"뭘 이리 많이 차리셨어."

"감사합니다."

모두 한 마디씩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는다.

식사 중에도 서로가 쓴 글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 어르신들을 바라보며 '역시 배우신 보람이 있구나'싶어 나도 흐뭇하다.

식사 뒤 마당의 그네 위에서 큰소리로 웃으며 사진을 찍는다.

그 집의 대문을 나설 때,

어르신들은 초대한 분들과 손을 잡으며 감사와 아쉬운 눈빛을 주고받는다.

큰별숙 어르신이 촉촉한 목소리로 말한다.

"오늘은 특별한 백일장이에요. 선물 받은 날 같아요.”

그 한마디가 모두의 마음으로 따스하게 스며들었다.


가을의 배움은 그렇게 피어난다.

늦게 피는 꽃이 향이 깊고, 늦게 익은 열매가 단단하다.

어르신들의 배움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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