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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쑥향으로 남는 자리

by 제노도아

행복실님의 첫 모습은 참 수수했다.

깔끔한 옷차림, 작은 몸집과 어울리는 욕심 없는 얼굴이셨다.

말수가 적고 웃을 때는 눈가에 잔잔한 주름이 곱게 번졌다.

그 주름은 세월의 무늬 같았다.


행복실님은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지키며 열심히 하신다.

발표하는 것을 수줍어 하시고, 말수도 적다.

그러다가 받아쓰기 시간이 되면 눈빛이 달라지신다.

반짝이는 눈으로 내 입의 움직임에 한껏 집중하신다.

한 글자라도 더 맞히려는 노력이 보인다.

답을 확인하며 틀린 글자를 보면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린다.

"집에서 쓸 땐 다 알았는데, 왜 이럴까요."

안타까운 목소리가 떨린다.

"겹받침은 왜 받침 두 개를 만들어서 헷갈리게 한대요.

'닮다' 말고 '담다'로 발음대로 쓰면 쉽고, '닮아서'도 '달마서'라고 쓰면 좋잖아요."

한 번도 찡그린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면서 받아쓰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닮다'와 '담다'는 발음은 같아도 쓰임이 다르지요. 발음대로 쓰면 혼돈이 와요."

기본형과 연음을 여러 번 설명해도 고개를 갸웃거리신다.

풀리지 않은 실타래 같다.

구슬옥님이 답답한지 한 말씀하신다.

"'닮다'는 딸이랑 닮다, '담다'는 바구니에 담다. 이해 안 되면 그냥 외워."

그러면 빙긋 웃으시며 받아쓰기의 공책을 소중히 가방에 넣는다.


행복실님의 문해수업은 노력의 결실이다. 진지한 눈빛에 진심이 담겨 있다.

놓치고 싶지 않은 배움을 향한 마음이다.


행복실님은 가끔, 손수 뜯은 쑥으로 떡을 빚어오신다.

제철에는 쑥을 곱게 갈아서 만든 떡에서 쑥향이 물씬 풍긴다.

철이 아닐 때는 쑥을 곱게 빻아서 넣어두었다가 만드신다.

행복실님의 얼굴처럼 동글동글한 쑥개떡이다.

쑥향이 교실 안을 채우면, 행복한 담소의 시간이 된다.

쑥을 캐던 젊은 날의 이야기,

떡을 직접 만들던 기억이 흥겹게 살아난다.

행복실님의 손맛은 시간을 거슬러 향수를 부른다.


그런데 행복실님은 한 번도 남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

생활문을 쓰면 으레 가족들의 이야기가 오가는데 조용히 미소만 짓는다.

아들이나 손자가 와서 식사를 함께했다는 말은 해도, 남편은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 침묵에는 많은 사연이 있는 듯하여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다.

세월 속에 묻어둔 사연인지, 꺼내기 어려운 추억인지 아무도 모른다.


얼마 전에는 형제계 모임 이야기를 하셨다.

열 명 남짓 모인 사촌 형제들과 수산시장에 갔단다.

싱싱한 회를 먹으며, 술을 여러 잔 마셨다고 했다.

"엥, 자네가 술을 마셔?"

동갑인 큰별숙님이 화들짝 놀라신다.

다른 분들도 멈칫하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마시면 기분 좋고, 잊혀질 건 잊혀지고 괜찮더라구요.”

행복실님은 부드럽게 웃는다.

그 웃음엔 젊은 날의 이야기와 지금의 이야기가 섞여 있는 듯하다.

그 다음 말은 아무도 묻지 않는다.

말 좋아하시는 명랑희님도 행복실님에게만은 캐묻지 않는다.

궁금증이 많은 꽃잎화님도 그러려니 그냥 지나친다.

행복실님이 입을 여실 때까지는 침묵으로 마주할 듯하다.


행복실님은 사람들 의견을 잘 따르지만, 그건 순종이 아니라 배려다.

“난 다 괜찮아, 알아서들 하세요. 따라갈게요.”

그 말 뒤에는 괜찮지 않았던 날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행복실님은 누구보다 따뜻하게 다른 어르신들과 대화를 나눈다.

매번 먼저 인사하고, 공손하게 대하신다.


행복실님의 세상은 그리 크지도 넓지도 않은 듯하지만,

행복실님이 마음에는 아무도 모를 깊은 바다가 있다.

쑥향이 남은 자리마다, 짙은 인생이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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