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버스, 기다림 속에서
큰별숙님은 버스를 타면 1시간 걸리는 시골에 사신다.
그곳 시골 버스는 시내에 나오는 것이 한 시간에 한 대뿐이다.
버스를 놓치면 수업에도 오지 못하지만, 큰별숙 어르신은 크게 개의치 않으신다.
“오늘 수업에 못 가요, 선생님. 버스 놓쳤어요. 다음 버스를 타면 수업 끝나요.”
어르신은 하하 웃으신다. 목소리에 늘 여유가 있다.
농사일이 바빠서 가끔 수업에 못 나오셔도 다음에 뵈면 언제나 웃는 얼굴이다.
"초등학교 선생인 딸이 내 한글 실력이 많이 좋아졌대요. 꼬박이 못 나와도 느니까 좋아요."
큰별숙님은 하하 웃으신다.
어르신의 그런 여유는 흙과 함께 한 세월에서 온 것 같다.
성실하고 거짓 없는 흙과 지금도 하나가 되신 분이다.
큰별숙님은 농사일 틈틈이 옥수수와 고구마를 삶아 오신다. 그리고 따뜻할 때 먹으라며 어르신들께 나눠주신다.
알 좋은 옥수수를 골라 찌며 문해반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튼실한 고구마를 고르며 문해반 친구들에게 나눠 줄 생각에 즐겁다.
“이거, 아침 일찍 쪘어요. 그러느라 차 놓칠 뻔했어요.”
허둥지둥 서둘러 오셨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검은 봉지 속에는 따뜻한 온기와 정성스러운 마음이 담뿍 담겨 있다. 직접 가꾸셔서인지 더 깔끔하고 맛있다.
"이제 파는 거 못 사 먹겠어. 우리 숙이네 옥수수랑 고구마가 최고여!"
어르신들이 진심을 담아 칭찬하신다.
그러면 또 하하 웃으신다.
늘 즐거운 일만 있을 것 같은, 큰별숙님의 미소 뒤엔 오랜 불면의 밤이 숨어 있다.
남편은 몽유병이 심해진 뒤, 밤마다 집밖으로 나가 헤매고 다니셨다.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문득 곁이 허전해서 깨면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금별숙님은 소스라치게 놀라 잠자리 차림새로 허둥지둥 남편을 찾아 나서곤 했다. 담 없는 시골집이라 어디로 가셨는지 난감했다.
때론 맨발로 나가 찬서리를 맞으며 여기저기 찾아다니곤 했다.
의식 없이 어디선가 돌아다닐 남편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안쓰럽기도 했다.
겨우 찾으면 멀뚱멀뚱 바라보시는 남편이 낯설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급히 맨발로 나설 때는 발에 상처가 나고, 어느 땐 몸에도 생채기가 나곤 했다.
남편도 어디에 부딪혔는지 긁혔는지 기억 못 하는 상처가 날로 늘어났다.
아침이면 전혀 기억을 못 하시는 것이 더 안타까웠다.
남편이 잠드시면 큰별숙님을 깨어 있어야 했다.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니 큰별숙님의 몸과 마음이 점점 쇠약해졌다.
결국 자녀들과 상의 끝에 남편을 요양원에 모시게 되었다.
"그날도, 지금도, 뵙고 돌아서면 마음이 아파요."
낮에는 아무렇지 않으신데, 그곳에 두고 오시려니 발걸음이 너무 무겁단다.
"한 달에 두 번 찾아가고, 명절이나 생신 때는 가족 모두 가서 뵙고 같이 밥을 먹어요. 식구들 얼굴을 보면 그렇게 좋아하시는데 두고 오려니 정말 짠해요."
그래서 다시 집으로 모셔오자고 하면, 엄마의 건강을 걱정하는 자녀들이 극구 반대한단다.
이야기를 들은 어르신들도 한 마디씩 거든다.
"이제 내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밤마다 그러시면 감당하지 못해요."
"에휴, 거기서 건강하게 잘 계시길 바라야지요."
"쯧쯧,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맘만 아파 어쩌나..."
큰별숙님은 시골 큰집에 혼자 사시는 것이 어느 땐 무섭고 외롭다고 하신다. 그럴 때마다 남편이 몹시 그립단다.
"돌아가실 때까지 거기 계셔야 하는데 얼마나 집이 그립겠어요. 나는 괜찮은데, 모셔와도 되는데..."
멀리 사는 자녀들에게 몇 번이고 상의해도 똑같은 대답이 돌아온단다.
“엄마, 우리가 도와드릴 수도 없고 엄마 건강 먼저 챙기셔야죠"
그 말을 전하면서 큰별숙님은 조용히 웃으신다.
"그 양반을 집에서 모시지 못하는 게 죄스럽긴 한데 어쩔 수 없으니...하하"
웃음으로 현실을 맞으시니 더 슬프다.
금별숙님은 오늘도 버스를 기다리며 버스정류장에 앉아 계신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문해반 친구들 떠올리며 미소 짓고 남편 생각하며 눈물을 감추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