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학년 단편동화를 세 번으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크아아아.”
뒤꼍 거느림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안에 누구 있니?”
마당 가득 밝은 빛을 드리우던 달님이 찢어진 창호지 틈 사이로 기웃거렸습니다.
바람이 불자 너덜너덜 빛바랜 창호지가 부르르 몸을 떨었습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아으으.”
아까보다는 작았지만 또 한 번 소리가 났습니다.
“거기 누구 있냐고?”
달님은 빛을 모아 방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방안에는 여러 모양의 탈과 옷가지, 장구 등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크, 저게 뭐야?”
달님은 기지개를 켜던 사자탈이 검은 눈썹을 꿈틀거리자 깜짝 놀랐습니다.
“네가 방금 소리를 질렀니?”
“아, 달님이군요. 오랜만이에요.”
사자탈은 허연 몸을 굼실굼실 흔들었습니다.
단오가 되면 아가씨 눈썹 같은 달님이 상글상글 웃어주던 기억이 났습니다.
“오라, 이제 보니 단옷날마다 신나게 뛰어다니던 사자탈이구나. 그런데 왜 거기에 있지? 그동안 보이지 않아서 무척 궁금했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이렇게 방안에만 있으려니 몸이 근질근질거려 죽겠어요.”
사자탈은 뒤룩뒤룩 퉁방울눈을 움직이며 말을 이었습니다.
“봉주 아버지가 고향을 떠날 때 커다란 보자기에 우리를 싸놓았거든요. 나는 이제나저제나 깨워줄 날을 기다리며 긴 잠을 자고 있었지요. 그런데 오늘 낮에야 영호 아버지가 보자기를 펼쳤어요. 이제 바깥바람을 쐬나 싶어서 좋아했는데 영호 아버지는 우리를 뒤적여만 보고 그대로 자물쇠를 채워 버리더군요. 달님을 보니까 전에 달빛 아래서 신나게 놀던 때가 생각나요.”
“쯧쯧, 그래서 작년 단옷날에 너희들을 볼 수 없었구나.”
달님은 안타까워했습니다.
봉산 탈춤놀이는 재작년까지만 해도 단옷날 마을의 큰 행사로 손꼽혔습니다.
그날은 읍내 사람들도 봉산 탈춤을 보러 왔습니다.
“하기는 사자 앞머리를 맡았던 봉주 아버지가 떠난 후 단옷날이 시시해졌지. 신명이 없어진 탈춤꾼들도 하나, 둘 흩어지고 말이야.”
“달님, 난 흥겹게 뛰고 싶어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글쎄, 혹시 봉주네가 돌아오면 모르지. 그러나 한 번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기는 쉽지 않을 거다.”
“달님, 부탁해요. 달님은 구석구석 다 볼 수 있으니까 봉주 아버지에게 제발 제 마음을 전해 주세요. 달님, 소원이에요. 이번 단옷날에는 꼭 춤출 수 있게 도와주세요. 네?”
“글쎄, 내가 찾아가긴 하겠다만 머지않아 단옷날인데 잘 될지 모르겠구나.”
달님은 구름을 비껴 도시 쪽으로 눈길을 옮겼습니다.
“덩덩 덩더꿍, 덩덩 덩더꿍!”
놀이꾼의 반주에 맞춰 길놀이가 시작됩니다.
사자는 어슬렁어슬렁, 말뚝이는 어뜩비뜩 걸어갑니다. 굵은 주름살의 취바리와 희고 숱 많은 눈썹의 노장, 덩드럭 덩드럭 팔자걸음의 양반, 여러 개 혹을 단 먹중이 억실억실 춤을 춥니다.
북소리, 장구 소리에 한삼을 휘저으며 논둑을 내려오는 놀이패의 나부끼는 옷자락이 보입니다. 구경꾼의 흥겨운 추임새도 가까웠다 멀어집니다.
“어 어얼쑤, 어 얼씨구.”
봉주는 느닷없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돌아보았습니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웅크리고 누워 있던 봉주 아버지가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어릿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또 탈춤 꿈꾸셨어요?”
“그, 그랬나 보다. 이제 꿈까지 뒤숭숭해졌으니... 어, 엄마가 마, 많이 느 늦나 보구나.”
어릴 때부터 말을 더듬거린 봉주 아버지는 당황하면 더 말을 더듬거렸습니다. 봉주 아버지가 부스스 일어났습니다.
“어디 가시려고요?”
“어, 엄마 오나 나가 보고 오마. 엄마가 요즘 많이 늦는구나.”
“이제 엄마가 뒷설거지를 도맡아 하시나 봐요.”
봉주는 아버지의 축 늘어진 어깨를 바라보았습니다.
4학년이었던 2년 전 일이 떠올랐습니다.
“아, 아직 봉주 중학교 갈 때도 멀었고 여기서도 읍내 중학교에 갈 수 있는데, 왜 굳이 도시로 나가려고 그래. 어머니는 고향을 떠나실 분이 아닌데 어쩌려고.”
봉주 아버지는 도시로 이사 가자는 아내와 아들에게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무래도 여기보다 도시에서 공부시키는 것이 더 낫지 않겠어요. 그리고 나도 어레미논에 매달려 만날 같은 타령이나 하느니 오빠네 식당 일을 거들어 주면서 돈을 모으고 싶어요. 어머니, 어머니도 저희와 함께 가셔요.”
“배운 게 땅 부리는 일밖에 없는 내가 어딜 가겠니. 내 걱정은 말아라.”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봉주 어머니는 친정 오빠 가게에 일손이 모자란다는 소식을 들은 뒤, 몇 번 망설였던 도시 이사를 바짝 서둘렀습니다.
“오빠가 당신 일자리도 구해 놓았대요. 당신 손 솜씨 좋잖아요. 아버님과 함께 탈도 만들었구요. 목각 인형 공장인데 수입이 제법 쏠쏠하다나 봐요. 어머니는 흙을 떠나서는 못 산다고 저리시니 우리만이라도 가요. 어머니께는 우리가 나중에 논밭을 사 드리면 되지 않겠어요.”
“아버지, 나도 도시 애들하고 공부하고 싶어요. 이사 가요.”
아버지가 말이 없자 봉주는 할머니의 팔을 잡고 졸랐습니다.
“할머니, 같이 가요. 도시로 가면 밭일도 안 하고 편하시잖아요. 할머니, 우리 이사해요.”
새로운 도시 생활에 기대를 건 봉주도 어머니 편이 되어 할머니와 아버지를 졸랐습니다.
“나는 하루라도 흙을 못 보면 안 되지만 너희야 어떻겠니. 가서 잘 살아라.”
머뭇거리던 봉주 아버지는 할머니 말을 듣고 마지못해 짐을 꾸렸습니다.
“자네가 떠나면 탈춤놀이도 흐지부지될 텐데... 돌아가신 아버님과 자네 아버님께서 무척 서운해하시겠구먼. 탈춤을 유달리 아끼신 분들인데.”
영호 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