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셨지, 그래서 아버님은 손자 이름도 고향인 황해도 봉산군의 예전 이름을 따서 봉주라고 지으셨어.’
봉주 아버지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습니다.
“봉주야, 나랑 같이 읍내 중학교에 가자. 응? 우리 둘이 자전거 타고 다니기로 약속했잖아.”
영호가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영호야, 방학되면 와서 실컷 놀다 갈게.”
봉주는 단짝인 영호에게 미안했지만, 도시에 대한 호기심으로 한껏 마음이 부풀어 있었습니다. 고향을 떠나던 날, 봉주 아버지는 거느림채에 보관했던 탈춤놀이 도구들을 여러 번 쓰다듬고 방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열쇠 하나를 영호 아버지에게 주었습니다.
“내, 내가 없어도 자네가 마을 사람들과 단오절 탈춤놀이를 하게.”
“나 혼자 힘으로는 될 것 같지 않네. 자네가 그때라도 오면 모를까...”
“......”
해마다 벌이는 탈춤놀이는 마을 사람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자리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날이면 그동안 응어리졌던 감정이나 서운했던 마음을 몽땅 털어내곤 했습니다.
봉주네가 떠난 몇 달 뒤, 몹시 추운 겨울밤이었습니다.
할머니는 혼자 주무시다가 그대로 눈을 감으셨습니다.
“저녁 진지 잘 드시고 일찍 주무시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네.”
영호 아버지가 자기 탓인 양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내, 내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어머니를 모셨으면 이렇게 빨리 돌아가시지 않았을 텐데, 다 내 잘못일세.”
봉주 아버지는 봉주 할머니 장례를 치른 후, 고향 나들이를 하지 않았습니다.
도시 아이들에게 낯섦을 느낄 때마다 봉주는 시골집과 영호가 그리웠습니다. 그러나 방학이 되어도 아버지는 시골에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하, 할머니도 안 계신데 무슨 염치로 얼굴을 디밀어?”
“영호에게 가겠다고 약속했는데요.”
그래도 아버지는 입을 굳게 다물고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고향 집은 할머니의 추억을 안은 채 굳게 잠겨 버렸습니다.
봉주네가 세 들어 사는 집, 좁은 마당에 달빛이 출렁이는 시간이었습니다.
봉주 아버지는 슬며시 대문을 열었습니다. 골목길을 나서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작은 공터가 보였습니다. 봉주 아버지는 고향의 느티나무를 닮은 공터 느티나무를 대견스러워했습니다. 공터 평상에 앉아 달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지난 일을 더듬었습니다.
이웃에서 봉산 탈놀이를 보고 자란 봉주 할아버지와 영호 할아버지는 육이오 때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단옷날이 되면 탈춤의 길라잡이가 되어 같이 내려온 몇몇 사람들과 북쪽 고향을 그리며 탈춤 놀이판을 벌였습니다. 또 탈춤놀이에 사용하는 탈을 직접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제는 봉주 아버지가 탈을 만들었습니다. 봉주는 아버지 옆에 앉아 탈 만드는 일을 지켜보았습니다. 탈을 만들려면 우선 기왓장 위에 진흙으로 탈의 모형을 빚었습니다. 물기가 꾸들꾸들 마르면 그 위에 한지를 여러 번 겹쳐 바르고 흙이 완전히 굳기 전에 파냈습니다.
“아버지, 왜 기왓장에다 해요?”
“그, 그건 건조를 잘 시키기 위해서지.”
속의 흙을 파낸 종이 틀이 완전히 마르면 칼로 코와 입을 뚫고 눈구멍은 쇠붙이를 달구어서 뚫었습니다. 색깔은 물감이나 단청을 사용했고, 아교풀을 위에 발라 겉이 반질거리도록 했습니다.
“우아, 아버지도 할아버지랑 똑같이 만들었어요. 엄마, 나도 탈 만드는 거 배울래요.”
아버지를 거들던 봉주가 어머니를 돌아보았습니다.
“네 아버지 솜씨가 아무리 좋으면 뭐 하냐, 팔지도 못하는걸.”
“그, 그래도 아버님이 하시던 일인데, 봉주야 너도 눈여겨봐라.”
“그걸 봐서 뭐 하게요. 그 시간에 봉주 넌 공부나 열심히 해.”
어머니는 봉주의 등을 떠밀었습니다.
달빛이 내리는 공터에서 봉주 아버지는 탈을 만들던 때를 생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버, 벌써 열두 시가 넘었네. 달이 참 좋구나.‘
오늘따라 달빛이 더 은은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달빛은 봉주 아버지 가슴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이렇게 달을 본 지도 오래된 것 같구먼. 이런 밤이면 탈춤 추기가 좋았는데.‘
봉주 아버지는 고향 집에 두고 온 사자탈 생각으로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작년 이맘때에도 시골로 내려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서성거렸던 기억이 났습니다. 봉주 아버지는 지그시 눈을 감고 사자탈을 양손에 든 듯 팔을 흔들었습니다. 길놀이 떠났던 놀이꾼들이 하나, 둘 달빛을 타고 내려왔습니다. 북소리, 장구 소리, 얼씨구 하는 추임새가 귓전에 울렸습니다.
봉주 아버지는 사자가 되어 성큼성큼 사람들 사이를 누볐습니다.
“둥둥둥둥 짐승 났소, 짐승! 자아. 움직임을 무겁게, 힘 있게, 시원스럽게 하거라. 그렇지 그렇지, 자알 한다.”
봉주 할아버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사자가 나타나면 목청껏 흥을 북돋았습니다. 어눌한 말씨의 봉주 아버지가 대사 없이 몸짓만 있는 사자 역할밖에 못 하는 것이 아쉬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자춤은 사람들이 흥미롭게 기다리는 장면이었습니다. 사자춤은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을 혼내주려고 나타난 사자가 사람들이 잘못을 뉘우치자 용서해 주며 추는 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섭섭한 마음은 헤아려 온몸이 흠뻑 젖도록 열심히 춤을 추었습니다.
'내, 내가 사자탈을 쓰고 나가면 사람들이 정말 사자 같다고 했어. 혀를 내밀 듯 빨강 장갑을 끼고 입 밖으로 손을 내밀면 진짜 사자가 나타났다고 아이들이 울었지.'
봉주 아버지의 몸에 촉촉이 땀이 배었습니다.
“여보!”
언덕길을 올라오던 봉주 어머니는 눈을 감고 어깨를 들썩들썩거리는 봉주 아버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당신, 지금 뭐 하세요?”
봉주 어머니가 다가와서 팔을 잡을 때까지 봉주 아버지는 탈춤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모, 몸이 찌뿌드드해서 운동을 좀 했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봉주 아버지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쓱 닦았습니다.
며칠이 지난 아침이었습니다. 봉주가 교실로 들어서자 짝인 진우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야, 김봉주. 너네 동네에 미친 사람 이사 왔다며?”
진우는 봉주네 마을 건너편 아파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얼마 전부터 열두 시쯤 되면 웬 미친 사람이 느티나무 아래서 춤을 춘대. 우리 아버지도 그러시고 늦게 들어오던 사람들도 봤다나 봐. 우리 아파트엔 소문이 쫙 났는데 왜 너네 동네는 깜깜소식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