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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no de Santiago #10

Zubiri→Pamplona

by 안녕
Day 8.
Wednesday, June 3


대부분의 사람들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하는데 그 인기척에 자연스레 눈을 뜨게 되니 알람은 굳이 필요 없었다. 매일 7시에 출발하기로 했지만 사람들이 모두 떠난 후에 일어나서 준비해도 문제없었다. 장을 비우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다.

마을 끝자락 즈음에 Zubiri ~ Pamplona 22.8km라고 적힌 파란 안내판이 있었다. 생장에서 나누어 준 알베르게 리스트에 적힌 거리도, 길에서 만나는 안내판과는 조금씩 차이가 났다. 까미노 어플에 적힌 거리와도 다르고 구글 지도의 거리와도 다르다. 실제 걸은 사람들의 후기를 보아도 같은 길을 걷고도 거리는 제각각이기도 했다. 정확한 거리를 재보겠다고 위치 어플을 이용해 실제 거리를 확인해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길을 헤매거나 하는 경우 공식적인 거리보다 훨씬 늘어나기도 했다. 자신이 기준으로 삼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렇게 달라졌다. 그렇다 보니 실제로 걸은 거리는 900km가 넘을 때도 있지만 산티아고 완주 증명서에 적혀있는 공식 거리는 775.0km로 정해져 있다. 아무리 더 걷더라도 인정되는 거리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 이 거리에 맞춘 공식적인 마을 거리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실제 길에서 만나는 공식 안내판 사진을 찍어서 나중에 거리표를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이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안내판이 없는 곳도 많았고, 있더라도 마을의 어디에 설치되어 있느냐에 따라 거리는 달라졌다. 거리표는 공식적인 한 곳에서 관리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도 까미노 어플에 나온 거리를 따르기로 했다.

어제 지나온 라 라비아 다리를 다시 건너갔다. 공장지대를 한참 지나 돌을 깐 좁은 길을 따라서 Ilarratz와 Ezkirotz로 향하게 된다. 이라라츠로 가기 위해서는 숲길에서 오른쪽으로 나있는 아스팔트 포장길로 내려가야 하며 에스키로츠로 가기 위해서는 Capilla de Santa Lucía 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언덕을 오르니 사람들이 산따 루시아 소성당에 모여 있다. 나도 들어가 볼까 하고 고민하다가 그냥 지나쳤다.

숲으로 우거진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가니 목장이 있었다. 신기한 마음에 잠깐 서서 말들을 구경했다. 목장 사이를 지나는 도로를 따라 중세시대 다리인 시글로 14세의 다리를 지나면 라라소아냐에 도착한다.




Larrasoaña (497M)는 중세에 상업 활동이 꽃피었던 마을이다. 이 마을은 까미노의 발전과 함께 형성되어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병원과 숙소를 제공해 왔다. 그런 이유로 라라소아냐의 주민들은 순례자들에게 친절하며 마을을 지나는 까미노 옆에는 상점들과 목재 발코니의 집들이 늘어서 있다.

라라소아냐를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르가 강을 따라 형성된 너도밤나무와 떡갈나무 숲, 초원이다.

산띠아고와 산 브라스 수도원 (Ermitas de Santiago y San Blas)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큰 병원이 있었으며 Puente del Siglo XIV는 14세기에 건축된 다리로 도적들의 다리(Puente de Los Bandidos)로도 알려져 있다. 16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이 있었고 San Agustín 수도원이 있었다고 한다.

Iglesia Parroquial San Nicolás de Bari
바리의 산 니콜라스 교구 성당은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이 혼합되어 13세기에 세워진 성당이나 현재 건물의 외부는 재건되고 증축되어 당시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Puente del Siglo XIV
시글로 14세 다리는 아르가 강 위에 세워진 석조 다리로 아름다운 두 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이 다리는 도적들의 다리라고도 불리는데 이유는 중세에 라라소아냐를 지나치는 순례자들의 돈과 목숨을 노리는 도둑과 강도들이 이 다리 근처에 숨어서 순례자를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라라소아냐의 주민들이 순례자들에게 친절하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으나 무려 14세기부터 18세기까지 이 지역을 활개 치던 도적 집단 때문에 점차 그 명성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면 라라소아냐 마을이지만 굳이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이유가 없어 그냥 지나쳤다. 까미노는 될수록 많은 마을을 경유하도록 계획되어 있는 것 같았다. 걷다가 불쑥 길이 꺾어지며 마을로 들어가는 듯싶다가도 반대편이라 생각하고 나와보면 들어갔던 곳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 라라소아냐를 나와서 언덕을 오르면 예전 왕실의 영지였던 아께레따에 도착하게 된다.




Akerreta/Aquerreta (497M)는 예전엔 왕실 영지였으나 오늘날은 까미노 데 산띠아고에서 고요함과 고독을 느낄 수 있는 인구가 적은 시골길이다. 이곳은 순례자들이 휴식을 취하면서 깊이 생각하기에 적당한 환경이다. 특별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아께레따의 숲에서 고요함을 찾아보는 것도 좋고 마을의 오래된 시골집을 둘러보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Iglesia de la Transfiguración del Señor
거룩한 변모 성당은 신랑이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중앙의 신랑은 원통형 궁륭으로 나머지 신랑은 반원형 궁륭으로 덮여 있다. 성당의 내부에는 1554년에 제작된 르네상스 양식의 제단화가 있는데 이는 회화와 조각이 혼용된 작품이다.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빰쁘로나의 Ramón Oscariz의 공방에서 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아께레따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쉬고 있었다. 식수대가 있어 잠시 땀을 식혀본다. 정작 등산화를 신으니 물집은 참을 만했지만 발톱이 너무 아프다니까 등산화 발목 부분 쪽 끈을 바짝 조이라고 누군가 조언했다. 혼자서 힘껏 당겨보았지만 옆에서 보다 못한 Y가 도와준다. 쉬고 있던 아저씨를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여기서부터는 함께 걸었다. 평화로움과 고독함을 즐길 수 있는 아께레따의 출구에서 도로를 가로지른 후 숲이 우거진 좁은 계곡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몇 개의 농장 나무 문을 통과하고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을 내려가면서 자동차 소리는 멀어지고 새소리와 시원한 바람 소리만 들리게 되면 더욱 좁아진 숲길이 이어지고 아르가 강과 나란히 이어지더니 Valle de Esteríbar에 위치한 수리아인으로 이어진다.




Zuriáin (479M)은 까미노가 지나는 에스떼리바르 계곡에 위치한 농업마을이다. 아름다운 산과 빰쁘로나 분지가 만나는 곳으로 강가의 물푸레나무와 검정 버드나무 사이의 자연에서 편안한 산책을 할 수 있다. 에스리바르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과 빰쁘로나 분지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어우러진 그림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Lavadero
세탁장은 중세 서민들이 이용하던 빨래터로 대중이 이용하였던 전통 건축을 잘 보여준다.

Iglesia de San Millán
고지대에 있는 중세 성당인 산 미얀 성당은 15, 16세기의 고딕 양식으로 지어져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중앙 부분은 16, 17세기에 개축되었다.




10시, 시멘트로 만들어져 특징이 별로 없는 다리를 건너면 수리아인에 도착하게 된다. 수리아인에서 아침을 먹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La Parada de Zuriain으로 들어섰다. 바르 입구 간판에 쓰여있는 한글이 반갑다. 많은 한국인들이 오는 길이라 그런가?

까페꼰레체와 함께 오늘은 또르띠야를 한번 먹어보기로 했다. 따져보면 굳이 혜택을 본 것은 없지만 뭔가 자꾸 빚을 진 느낌이 들어 Y의 까페와 또르띠야는 내가 계산하기로 했고 오랜만에 아저씨도 함께 걷고 있어서 세르베사 한잔 사드리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Y가 4€를 주며 보태라고 한다. 배낭을 벗어 햇빛 잘 드는 곳에 내려두었다. 자리를 잡고 등산화와 양말을 벗어 말리는 동안 까페꼰레체를 마셨다. 또르띠야는 달걀에 감자와 양파를 으깨어 넣은 담백한 부침개라고 해야 하나? 그런 맛이었다. 조각 케이크처럼 잘라서 나오는데 양이 많진 않았다.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곁에 와서 앉는다. 달라고 조르지만 줄 것이 없어 애써 외면했다. 또르띠야의 양은 적었지만 한 끼 식사로 충분했다. 여기서 한 시간을 머물렀다.




수리아인을 나오며 N-135 도로를 따라 조심스레 걷다가 이로츠로 향하는 NA-2339로 방향을 바꾼다. 다리를 건너고 나서 채석장 옆으로 소나무와 떡갈나무로 우거진 좁고 꼬불꼬불한 숲길을 따라 아르가 강과 나란히 따라 걸으면 이로츠다.




Iroz/Irotz (473M)는 19세기까지는 에스떼리바르 계곡에서 가장 번화한 마을이었다. 학교와 방앗간이 있었고 밀 생산의 중심지였으나 오늘날에는 명상하기에 좋은 고요함과 흥미로운 전통 건축이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로츠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마을의 역사와 발전 과정을 알아가며 지역 건축물을 감상하는 것이다.

Puente de Iturgaitz
이뚜르가이츠 다리는 아르가 강 위에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만들어진 다리로 3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까미노가 이 다리를 지나고 있으며 가까이에 몬세랏의 성모 소성당(Ermita de la Virgen de Monserrat)이 있다.

Iglesia de San Pedro Apostol
석조 건축물인 사도 성 베드로 성당의 신랑 중앙 부분은 루네트가 있는 원통형 궁륭으로 덮여 있으며 첫 번째 구획도 원통형 궁륭으로 덮여 있다. 성당 안의 주제단화는 Ramón Oscáriz 공방의 작품이다.




이로츠에 도착하면 빰쁘로나로 향하는 두 가지 루트를 선택할 수 있는데 빰쁘로나까지 약 12km에 이르는 푸르비알 산책길과 빰쁘로나까지 약 9km 거리인 공식적인 까미노 길이다.

푸르비알 산책길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N-135 도로로 올라가기 전에 레스토랑 쪽으로 내려가서 마을의 출구에 있는 포장된 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가면 되고 공식적인 까미노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이뚜르가이츠 다리를 건너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면 된다.

푸르비알 산책길 대신 공식적인 까미노를 걷기 위해 이뚜르가이츠 다리를 건너간다.




화살표를 따라가다 보면 작은 마을인 사발디카를 지나게 되는데 12시쯤 사발디카 부근의 버드나무 사이로 흐르는 아르가 강가에 앉아 잠시 쉬었다. 깨끗해 보이는 길도 자세히 보면 이름 모를 벌레가 많이 기어 다니고 있어서 불안했다. 언덕 위에 에스테반 성당이 보이지만 들렀다 가기엔 너무 멀어 보여 다음을 기약했다.

N-135 도로를 건너면 검정 버드나무 사이로 흐르는 아르가 강을 끼고 레스토랑을 만나게 된다. 나무로 만들어진 오래된 주택들이 있는 좁은 길을 따라 나바라의 주택가와 산따 마리아 소성당이 있는 아르레따를 향해서 언덕길을 지나면 오래되어 허물어진 곳들이 보인다.

햇빛이 너무 뜨거워 면으로 된 커다란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다녔지만 이때부터는 정말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N-121 도로와 이어지는 뜨리니닷 데 아레에 있는 좁은 길은 아스팔트로 포장된 소나무 숲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면 뜨리니닷 데 아레로 들어가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다리가 보인다.

삼위일체 수도원으로도 알려져 있는 마리스따스 형제 수도원의 성당에는 13세기 초반의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실내가 잘 보존되어 있다. 중세부터 순례자들의 마음과 몸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는 장소로 많이 알려진 이 성당은 삼위일체에 봉헌된 성당 겸 수도원이다.




Arre/Trinidad de Arre (442M)는 나바라의 주도 빰쁘로나에서 매우 가까운 마을이며 순례자들과 관광객을 위한 숙소가 잘 갖춰져 있다. 까미노 데 산띠아고에 있는 다른 마을들과 마찬가지로 뜨리니닷 데 아레에서도 까미노는 도시의 축을 이루며 마을의 건축물도 순례길과 관련이 많다.

현재의 뜨리니닷 데 아레는 현대적인 도시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순례자들이 순례를 계속할 수 있게 도와주는 따뜻한 마음과 시설이 갖춰진 곳이다.

삼위일체 수도원으로도 알려져 있는 마리스따스 형제 수도원(El Convento de los Hermanos Maristas)은 중세로부터 순례자들의 마음과 몸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는 장소로 많이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세금을 징수하던 17,18세기에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아, 순례자 숙소와 병원을 운영하는 등 마을의 절정기를 맞았다. 오늘날에도 순례자를 위한 숙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Puente de la Trinidad
삼위일체 다리의 기원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583년에 만든 청동으로 만든 라틴어 명문엔 기원후 1, 2세기라고 날짜가 적혀 있다. 나지막한 아치 여섯 개로 이뤄진 뜨리니닷 다리는 13세기에 울사마 강 위에 건축되었다. 로마 제국의 길 위에 론세스바예스에서 빰쁘로나로 향하는 까미노를 지난다. 뜨리니닷 다리는 뜨리니닷 바실리카 옆에 있으며 로마 시대에 처음 건축되었을 것이나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재건축을 거치면서 중세의 분위기를 간직하게 되었다.

El Convento de los Hermanos Maristas
삼위일체 수도원이라고도 부르는 마리스따스 형제 수도원의 성당에는 13세기 초반의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실내가 잘 보존돼 있으며 버팀벽이 있는 후진, 지붕의 추녀를 받치기 위한 장식 없는 추녀 받침 등이 있다. 17세기에는 순례 중에 병이 든 순례자들을 치료해 주고 말을 태워 론세스바예스로 돌려보내곤 했다. 빰쁘로나 분지의 주민들은 뜨리니닷을 매우 공경하였는데 이 성당은 삼위일체에 봉헌된 성당 겸 수도원이다. 12, 13세기에 지어진 성당은 수도원 겸 병원의 역할을 했다.




울사마 강 위에 세워진 6개의 아치가 있는 중세의 다리를 넘으면 마리스따스 수도원과 순례자를 위한 오래된 병원이 나오며 구역상으로는 바야바에 다다르게 된다. 이 병원은 11세기와 12세기에 있었다고 한다.

또한 비야바와 인근 마을에서는 이 지역의 맛 좋은 특산물을 즐길 수 있는 장소가 많다. 나바라의 고유 음료수인 Pacharán도 맛볼 수 있으며 나바라의 전통 술을 만드는 양조장도 방문해 볼 수 있다.

비야바는 뜨리니닷 데 아레와 인접한 마을이었으며 오래전부터 Río Ultzama를 건널 수 있었던 마을이기 때문에 군사적, 상업적으로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나바라 지역의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아랄라르의 미카엘 대천사(Ángel de San Miguel de Aralar)가 삼위일체 대축일 전 금요일에 마을을 방문해서 비가 오도록 도와준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비야바는 세계적인 사이클 챔피언인 미겔 인두라인(Miguel Induráin)이 태어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4시가 가까웠고 이미 한계에 다다른 시점이라 오늘은 뜨리니닷에서 쉬자고 했다. 걸어서 힘든 것보다 엄지발톱의 통증과 발바닥의 쓰라림이 너무 힘들었다. 뜨거운 열기로 발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고 먹거리를 탑재한 배낭의 무게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빰쁘로나는 여기서 5km 더 가야 하지만 큰 도시라서 알베르게를 찾아가려면 입구에서 또 얼마나 더 들어가야 할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우습게 보고 걷다 후회한 글을 많이 봤었다. 그래서 2안으로 뜨리니닷 데 아레에서 머무는 것도 염두에 두고 왔던 터였다.

하지만 Y는 원래 계획대로 빰쁘로나까지 가자고 했다. 여기서부터는 끌려가는 분위기가 되어 솔직히 짜증이 났다. 하루 정도는 여유를 부려도 되는데 한번 주저앉으면 계속 그렇게 될 거라며 재촉했다. 생각보다 곱게 자라지 않아서 까미노에서는, 아니 오늘만큼은 나 자신에게 관대해지고 싶다고 우겨보고 싶었지만 결국 따라나서야 했다.

공원 같은 깨끗한 마을을 지나면서 식수대에서 물을 마시고 30분쯤 더 걸으니 도시의 모습인 부르라다를 지나고 있었다.




나바라의 주도 빰쁘로나에 바로 인접해 있는 Burlada/Burlata (433M)는 오래전부터 이 마을을 지켜오는 토박이의 비율이 높은 전통적인 마을이다.

까미노 데 산띠아고로 인해 상업적인 발전이 있었고 이 때문에 순례자를 돕는 두 종교 단체인 산 살바도르 협회(La Cofradía de San Salvador)와 세례자 요한 협회(La Cofradía de San Juan Bautista)가 이곳에서 설립되었다. 1276년부터 부르라다의 포도밭과 방앗간은 빰쁘로나 대성당의 소유였다. 그 후 14세기 후반 까를로스 왕이 왕가의 여름 휴양지로 이곳을 선택하면서 현재의 부르라다가 세워졌다.

부를라다에는 다양한 카니발 축제가 있으며 마을을 지나다 보면 민속춤을 추는 예술가들과 전통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Puente de Burlada
부르라다 다리는 여섯 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중세식 다리이나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아르가 강 위의 세워진 이 석조 다리는 모두 모양이 다른 아치 여섯 개로 이뤄져 있는데 어떤 것은 첨두아치이고 나머지는 반원 아치다. 바로크 시대에 새롭게 수리하긴 했으나 본래의 강인한 중세 교각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교각의 모양은 삼각형, 반원형 등이다.

Iglesia de San Juan Bautista
세례자 요한 성당은 라틴십자가 형태의 평면을 한 현대적인 건축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나바라 여러 곳에서 성당을 장식했던 이동이 가능한 실내 장식이다. 이 성당에는 세례자 요한과 성 블라스를 그린 르네상스 양식 제단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나바라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남아있는 현재의 제단화는 신고전주의 양식이며 빰쁘로나 대성당의 영향을 받았다.

Palacete de Burlada
부르라다 궁은 여러 양식이 혼합되어 있으나 대칭성 때문에 모더니즘 건축이라고 하며 남쪽과 서쪽 문이 인상적이며 회랑은 유리와 철로 만들어졌다.




비야바와 부르라다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으나 부르라다의 마요르가를 통해서 마을을 통과하여 성당 건물까지 가보면 노란색 화살표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첫 번째는 자동차 정비소 옆으로 나있는 오래된 까미노로 가기 위해 라랴인사르 도로(Calle de Larraínzar)를 따라서 오른쪽으로 진행하는 길이다.

두 번째는 마지막 신호등에서 계속 직진해서 우란가 공원의 담을 끼고 왼쪽 보도를 따라 아르가 강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 진행한 후 터널을 통과하면 부르라다의 오래된 길로 진행하게 된다.

두 가지 화살표 모두 빰쁘로나의 문인 수마라까레기 문까지 이어진다.

아르가 강 위에 세워진 고딕 양식의 Puente de la Magdalena를 지나 빰쁘로나로 들어가게 되는데 다리 옆에 나병환자를 위한 병원이 있다. 도시나 마을의 입구에 나병환자를 위한 시설이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렇게 교외에 병원을 두었던 이유는 주민들에게 감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빰쁘로나는 오랫동안 작은 마을 여러 개가 모인 형태로 구성돼 있었으므로 도시들의 도시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은 알베르게를 찾아가는 게 우선이라 한치의 헛걸음도 용납할 수 없었다. 혹시나 되돌아오는 일이 생길까 봐 빰쁘로나 입성 전에 알베르게 위치부터 확인하려고 관광 지도 앞에 멈추어 섰는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잘 모르겠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모른단다. 그래서 그냥 출발하려니 Y도 힘든지 물어보고 가자며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시간만 지나고 답은 없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고딕 양식의 중세 다리인 마그다레나 다리를 지나면서 멀리 빰쁘로나 대성당이 보였다. 프랑스 문이라고도 불리는 수마라까레기 문을 지나 성채를 오르게 되면 빰쁘로나로 들어가게 되지만 수말라까레기 문이 나오기 전의 어느 공원에서 Municipal 안내판이 보여서 길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안내판을 따라간 곳엔 사립 알베르게만 있었고 우리가 본 것은 그냥 관공서를 뜻하는 말이었나 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다시 물어봤지만 모른다고 하여 한참을 헤맸다. 까미노 루트라도 알려달라니 벽에 생긴 어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란다.

그렇게 성채 안으로 들어와서야 다시 산티아고 가는 길로 들어섰고 공립 알베르게는 바로 그 길 위에 있는 빰쁘로나 대성당 근처에 있었다. 알베르게를 먼저 찾아야 한다는 조바심에 딴 길로 새느라 30분 이상을 헤매기만 했는데 그냥 걸었으면 자연스레 도착했을 곳이었다.




Pamplona/Iruña (460M)는 2000년 역사를 지닌 궁전, 성당과 같은 건축물과 갖가지 전설과 오래된 전통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와 동시에 현대의 편리성과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산업도시다. 중세에 이베리아 반도를 가로지르는 로마 제국의 침략 루트들이 만나는 전략적인 도시이면서 이베리아 반도와 갈리아를 잇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나바라 왕국의 수도는 스페인을 프랑스로부터 지키기 위한 첫 번째 방어 거점이기도 했는데 19세기 Carlistas 전쟁의 배경이 현재 나바라의 수도인 빰쁘로나였다.

빰쁘로나는 원래 나바라의 원주민이 살고 있던 곳이었다. 이곳에 11세기부터 프랑스인과 유태인이 이주해 오면서 문화와 예술, 다양한 전통을 받아들이는 역사적인 도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이 빰쁘로나에 남아있는 인상적인 건축물과 예술의 기반을 만들었다.

지금은 현대적인 도시가 된 빰쁘로나에는 엘 발루아르떼 컨벤션 센터에서 열리는 가야레 연극제(Teatro Gayarre)처럼 일 년 내내 중요한 문화 행사가 많이 열린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산 페르민 축제(Fiestas de San Fermín)는 7월 6일부터 14일까지 열리며 스페인 사람들의 열정과 왁자지껄한 소란스러움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 7월 7일의 엔시에로(Encierros) 행사는 빰쁠로나의 거리에서 소를 몰아가는 전통 행사다. 순례자에게는 상당히 위험이 따르는 상황이 될 수도 있겠으나 엔시에로에서 전통 복장을 한 스페인의 청년들과 구시가지 거리를 따라 달려볼 수 있다. 8월에는 연극, 음악, 무용 등 풍성한 나바라 축제를 즐길 수 있으며 바스꼬와 나바라 지방의 전통 스포츠인 프론똔 라브릿(Frontón Labrit, 공을 가지고 하는 스포츠)을 체험해 볼 수도 있다. 시간이 남고 날씨가 화창하다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근교의 꼬무니닷 포랄(Comunidad Foral)로 소풍을 갈 수 있다.

빰쁠로나에서는 어떤 레스토랑에 들어가더라도 에브로 강 연안의 밭에서 생산되는 알까초파(Alcachofas), 배추, 고추, 아스파라거스 등의 신선한 채소로 만든 맛있는 스프를 맛볼 수 있다. 산지에서 나는 고기와 치즈, 강에서 잡히는 송어와 깐따브리아 해에서 잡히는 생선, 유명한 소시지 등은 모두 나바라 지역에서 생산되는 포도주, 리큐르와 잘 어울린다.

저녁에는 구 시가지의 바르와 선술집에서 삔초(Pintxos)를 맛보며 돌산본다. 맛있는 음식을 작은 접시에 담아주는 삔초에 나바라 산 포도주를 곁들여도 좋다. 특색 있는 쇼핑을 하고 싶다면 소시지류, 저장 채소, 후식류, 포도주, 자두술 등 특산물이 좋다. 포도주는 유명할뿐더러 맛과 향기가 좋다. 쿠쿠수무슈의 익살스럽고 기발한 기념품도 선물용으로 좋다.

빰쁘로나로 들어가는 길목인 라 마그다레나 다리 옆에 나병환자를 위한 병원이 있었다. 까미노에는 도시나 마을의 입구에 나병환자를 위한 시설이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렇게 교외에 병원을 두었던 이유는 주민들에게 감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순례자들은 프랑스 문(Portal de Francia)으로 도시에 들어서게 된다. 이 문은 수마라까레기의 문이라고도 불린다. 빰쁘로나는 오랫동안 작은 마을 여러 개가 모인 형태로 구성돼 있었으므로 도시들의 도시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을들은 역사와 출신이 서로 달라서 대립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성벽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현재 도시 곳곳에서 보이는 구획이 나뉘어 있는 길은 이러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가장 오래된 구역인 La Navarrería는 고대 로마의 구획을 아직 유지하고 있다. 이밖에 산 사뚜르니노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6각형 형태를 하고 있으며 산 니꼴라스 성당은 고딕 양식 특유의 직사각형 양 건축물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Murallas
16세기의 적들로부터 빰쁘로나를 지켜주었던 방어막인 성벽은 펠리페 2세가 건설했다. 5각형 형태의 튀어나온 수비 거점이 있는 이 성벽은 스페인에 남아있는 방어용 성벽 중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많다. 이 성벽이 함락된 것은 역사상 단 한차례였는데 1808년 2월 18일 함락되기까지 단 한차례의 발포도 유혈 사태도 없었다. 겨울이 되어 눈이 쌓이자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꾀를 내어 눈싸움을 하는 척했고 이 모습이 너무나 평화롭고 재미있어 보여서 이때 성벽을 방어하던 스페인 군사들이 이 놀이에 끼기 위해 성문을 열었다. 프랑스인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눈 속에 숨겨놓았던 무기를 꺼내 스페인군의 항복을 받아 무혈로 성벽을 함락했다. 성벽의 주변에는 현재 라 부엘따 델 가스띠요(La Vuelta del Castillo)라고 하는 근사한 공원이 있다.

Portal de Zumalacárregui
프랑스 문이라고도 부르는 수마라까레기 문은 1553년 까를로스 5세가 다스리던 시절 부왕이었던 알부르께르께 공이 건설했다. 이 문이 수마라까레기의 문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돈 까를로스를 지지하던 군인 Tomás Zumalacárregui가 까를리스따 전쟁 발발 이후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어두운 밤 홀로 이 다리를 건너 빰쁘로나를 떠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치 위엔 황제의 문장 즉 머리가 두 개 달린 독수리가 있는데 18세기에 개폐식 다리의 바깥쪽 문을 추가했으며 부벽과 평형추 등이 아직 남아 있다. 이 문은 순례자들이 빰쁘로나로 들어오는 문이다.

Catedral Pamplona
산따 마리아 대성당 (La Catedral de Santa María) 로도 불리는 빰쁘로나 대성당은 구시가지인 Casco Viejo에 있다. 1397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530년에 세워진 고딕 양식 성당인 이 건축물은 오래된 로마네스크식 성당 위에 지어졌는데 정면은 신고전주의 양식이고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회랑이 아름답다. 18세기 후반에 대성당 정문이 원래의 프랑스식 고딕 양식보다 수수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교체되었다. 성당의 평면은 라틴십자가의 형태이고 내부에는 로마네스크식 성모상이 있으며 까를로스 3세(Carlos III)와 왕비 레오노르의 환상적인 고딕 양식 무덤이 있다. 그러나 대성당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의심할 여지없이 회랑이다. 미술 전문가들에 따르면 빰쁘로나 대성당의 회랑은 유럽의 고딕 양식 건축물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곳이라고 한다. 성당에서부터 회랑으로 가는 입구는 Puerta del Amparo라고 하며 Tímpano엔 역동적이고 표현주의적으로 표현된 ‘성모의 영면(La ‘Dormición’ de la Virgen)’ 이 있다. 팀파눔에는 성모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조각되어 있다. 쁘레시오사의 문(Puerta Preciosa)이라고 부르는 회랑의 다른 문은 오래된 기숙사로 향하는 문이며 정원의 복도가 있는 공간을 나누는 아케이드가 고딕 양식의 우아함과 수직성이 잘 나타난다. 여러 개의 작은 아치들이 모여 커다란 아치를 이루고 뾰족한 박공은 회랑의 난간을 지나간다. 회랑 옆엔 바르바사나 소성당(La capilla Barbazana)이 있는데 이곳에는 대주교 아르날도 데 바르바산(Obispo Arnaldo de Barbazán)의 무덤이 있는 곳이며 별 무늬가 그려진 궁륭으로 덮여 있다. 빰쁘로나 대성당에는 거대한 굴뚝이 있는 고딕 양식의 중세식 부엌과 거대한 화덕이 눈에 띈다. 또한 산초 7세가 라스 나바스 데 똘로사 전투의 전리품으로 가져온 사슬을 보관하고 있다.

Iglesia Parroquial de San Saturnino
산 세르닌 성당 (Iglesia de San Cernin)으로도 불리는 산 시뚜르니노 교구 성당은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이 결합된 견고한 성당으로 나바라의 수호성인인 까미노의 성모(La Virgen del Camino)를 모시고 있다. 원래 있던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에 13세기에 현재의 성당이 건축되었다. 고딕 양식의 작은 회랑이 있었지만 18세기에 까미노의 성모 소성당으로 바뀌었다. 성당의 현관 앞에는 빰쁘로나의 초기 기독교 주교가 세례를 받았다는 세례반이 있다.

Basílica de San Ignacio
구시가지 외곽의 산 이그나시오 바실리카는 17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1521년에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 성인(San Ignaicio de Loyola)이 부상당한 장소인 현재의 위치에 세워졌다.

Iglesia de San Lorenzo
산 로렌소 성당은 13세기에 건설되었으나 현재는 중세 건물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696년에서 1717년까지 나바라인들의 도움으로 재건축되었으며 바로크 양식의 건물엔 그리스식 십자가가 새겨졌고 건물의 내부는 하나의 신랑으로 터져있다. 성당의 옆으로 푸른색 타일로 장식이 된 산 페르민 소성당(Capilla de San Fermín)이 눈에 띄는데 여기에 페르민 성인의 유해를 보관하고 있다.

Ayuntamiento
17세기 후반의 건축물인 빰쁘로나 시청은 1755년에 시작하여 1760년에 완성된 바로크식 Fachada를 간직하고 있다. 매년 7월 6일 시청의 발코니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 페르민 축제의 시작을 알린다. 시청 내부에 있는 문틀 위의 상인방(上引枋)은 바로크 양식인데 ‘이 문은 모든 이를 위해 열려 있으며 마음은 더 많이 열려 있다’ 라는 나바라의 까를로스 3세 아름다운 문구가 새겨져 있다.

Paseo de Sarasate
사라사떼 산책로 양옆엔 나바라 왕국 왕들의 조각상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 맞은편엔 법률가들의 기념물이 있다. 이 기념물은 1903년에 중앙 정부로부터 나바라를 지키기 위한 나바라 주민들의 운동이었던 La Gamazada 운동 기간에 나바라인들의 지지로 세워졌는데 정의, 역사, 자치주, 평화, 노동의 알레고리가 조각으로 새겨져 있다. 이 기념물 뒤엔 의사당과 나바라 주 정부 청사가 있다.




강의 성모 전설
어느 날 아침 아르가 강물 위에 이상한 물체가 둥둥 떠내려 왔다. 사람들이 이것이 성모상이라는 것을 알아내서 장대를 가지고 성모상을 강가로 끌어오려고 했으나 성모상은 이상하게 장대를 피해 갔다. 밤이 되도록 성모상을 강물에서 꺼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마침내 지쳐서 강둑에 앉아 쉬고 있었다. 이때 산 뻬드로 수도원(Convento de San Pedro)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녀들이 강가로 다가와 성모상을 보고 놀라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성모상이 강가로 떠내려와서 수녀들이 건져내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멈춰 섰다. 이렇게 해서 수녀원으로 성모상을 가져가자 그때 병에 걸려 생명이 위태롭던 수녀원장의 건강이 회복되었고 이를 기리기 위해 이때부터 수녀원에서 이 성모상을 모셨다고 한다.

속아 넘어간 간통한 여인의 전설
오래전 빰쁘로나에는 한 아름다운 여인이 살았다. 그 여인은 산띠아고로 순례 중이던 프란시스코회 수사 외모와 뛰어난 언변에 그를 짝사랑하게 되었다. 여인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수도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써서 하인에게 전달시켰다. 그러나 하인은 여인의 남편인 주인에게 들키게 되었다. 얼마 후 여인이 수사에게 남편이 없는 틈을 타 집에서 만나자는 편지를 썼다. 물론 남편은 이미 자신의 영지를 보러 외출하는 것처럼 꾸며 아내에게 집을 비운다고 말한 것이었다. 남편은 밤이 되자 프란시스코회 수사복으로 변장하고 유혹의 말을 속삭이며 아내에게 다가갔다. 욕정을 이기지 못한 아내가 팔을 뻗어 그를 안으려고 하자 수사로 변장한 남편은 옷에 숨겨둔 몽둥이를 꺼내 여인을 때려 혼내주었다. 다음날 시치미를 떼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에게 아내는 팔다리에 심각한 류머티즘이 생겨 몸이 아프다고 둘러댔다. 아내의 바람기를 완전히 잡겠다고 생각한 남편은 또 다른 꾀를 계획하고 저녁식사에 수사를 초대했다. 그리고는 아내에게 길에서 만난 수사가 ‘당신 아내에게 귀신이 들었으니 퇴마 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말해서 초대했노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 여인과 수사가 단둘이 방에 남자 아내는 화가 나서 수사를 손톱으로 할퀴며 욕을 하기 시작했고 수사는 여인이 귀신 들었다고 생각하게 됐다. 귀신을 쫓기 위해 수사는 여인에게 성수를 뿌리기 시작했다. 이때 남편이 들어오자 사실을 들킬까 봐 입을 다물고 얌전하게 퇴마 의식을 당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수사는 자신의 퇴마 의식이 성공했다고 믿게 되었고 남편은 자신의 속임수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벌을 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아름다운 여인은 이 사건이 있은 이후 더욱 남편에게 충실하고 상냥한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15시 반쯤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지만 너무 힘들어서 로비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Y가 숙박비를 같이 계산하겠다며 나보고 저녁을 사라고 했는데 이미 꼼쁠리또, 남은 침대가 없단다. 또다시 마음이 조급해졌다. 대도시라 차선책으로 갈 수 있는 사립 알베르게 중에서 저렴한 곳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와이파이가 안 되니 찾아볼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음 마을로 가는 건 무리였다.

그러게 내 말대로 뜨리니닷에서 머물렀으면 좋았을 텐데, 여기까지 오자고 고집을 부린 Y에게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럴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로비에 멍하니 앉아있으니 지나가던 한 순례자가 근처 사립 알베르게를 알려주었다. 그곳으로 가보니 도미토리 베드 하나에 15€란다. 공립 알베르게보다 두 배 이상 비싼 금액에 놀라 머뭇거리니 Y는 그냥 묵자고 한다. Y가 오늘 숙박비를 계산하겠다고 했으니 그냥 계산하게 내버려 두었는데 이건 분명 나의 심통이었다.

보기엔 근사한 2층 침대였지만 1층 침대 옆으로 뚫린 구멍이 사다리였다. 그 구멍에 발가락을 끼우니 1층에 자고 있는 사람의 몸에 닿을 정도였는데 하필 얼굴 쪽이다. 2층으로 올라가려면 발바닥의 통증도 참아야 하고 1층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도 신경 써야 했다. 구멍에 발가락을 끼우고 간신히 버티고 올라가 매트리스 커버를 씌우는데 2층 침대 청소는 안 하는지 매트리스 주변에 빈 담뱃갑과 휴지 등 쓰레기와 먼지가 가득했다. 15유로나 받으면서 청소도 하지 않는 것에 화가 났다. 하지만 치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저녁을 먹을 상태는 아니었지만 내가 저녁을 사야 해서 억지로 나갔다.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라 먹을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 근처 바르로 가서 9€ 순례자 메뉴를 시켰다. 나름 세트 구성이긴 한데 빵이 안 나온단다. 와인을 마실 컨디션이 아니었는데 다행히 생수로 바꿀 수 있단다. 난 내일을 위해서 생수를 시켰고 Y는 맥주로 달라고 했는데 그건 안 된다고 해서 그냥 와인을 시켰다. 생수는 어이없게도 350ml 꼬마병이 나왔다. 그런데 Y가 그걸 또 굳이 잔에 따라버렸다. 물컵을 사용하기 싫어서 식당에서는 물도 안 마시는 사람인데 꼬마 생수병에 든 물을 굳이! 그냥 내일 마시려고 주문한 거라고 말렸더니 그걸 또 생수병에 도로 따라 넣으려고 했다. 그냥 물병이 필요한 걸로 정리했다.

난 샐러드와 송어찜을 시켰는데 짜도 너무 짰다. 음식을 남기는 법이 없어서 억지로 다 먹으려고 했지만 정말 토할 것 같았다. 빵이라도 있었으면 좀 덜했겠지만 결국 빵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너무 힘들어하니 Y가 슬쩍 먹어보더니 별로 안 짜다고 한다. 그러다 다른 쪽을 먹어보더니 짜긴 하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란다. 난 더 이상 못 먹겠다니 바꾸어 준다. 그래도 저녁은 대실패다. 돈이 아까웠다. 통조림에 든 것을 데워서 접시에 내놓거나 인스턴트 제품을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파는 곳이 있다더니 여기가 바로 그곳이었다. 순례자 메뉴라고 해서 다 맛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다시는 사 먹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저녁을 잘 안 먹으려고 하니 Y가 숙박비를 먼저 내주고 나에게 저녁을 사라고 하는 것 같은데 이게 너무 힘들었다. 날씨에 따라 예민할 뿐이지 몇 끼 굶는다고 쓰러지거나 하는 약골이 아니었다. 오히려 억지로 먹으면 탈이 날 뿐이다. 밥 먹으라는 소리보다 그만 먹으라는 소리를 더 많이 듣고 자란 사람이었다. 게다가 지금 나는 순례길을 온 거지 황제길을 걸으러 온 게 아니었다. 그런 걱정은 잠시 접어두었으면 좋겠는데 싶었다.

간식을 사기 위해 슈퍼마켓을 찾아 나섰는데 다들 못 알아듣는다. 그래서 수퍼메르까도라고 말했으나 여전히 못 알아듣는다. 생각해 보니 수뻬르 메르까도라고 말해야 했다. 그제야 쉽게 알아듣는다.

스페인에서 바나나는 은근히 비쌌다. 한국에서 한송이 살 돈으로 고작 두세 개 정도 살 수 있었다. 바나나를 좋아하긴 해도 굳이 비싼 돈을 주고 사 먹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Y는 변비 때문에 매일 바나나를 샀고 내 것까지 구입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난 바르에서 커피나 맥주를 사곤 했다. 이게 참 애매한 상황이 되곤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싸고 맛있는 2kg에 2€짜리 오렌지 한 망을 사서 나누어 먹으려고 집어 들었는데 Y는 오렌지를 좋아하지 않는 건지 많다고 낱개로 사라고 말린다. 낱개로 사면 이게 또 바나나 같은 상황이 된다. 이 정도 양이면 혼자서도 다 먹을 수 있고 내일 걸으면서 먹을 것도 필요해서 기어이 사 들고 돌아왔다.

두통이 심해지고 정신이 몽롱하더니 결국 다 토해버렸다. 속을 비우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제대로 체했나 보다. 빈 속에 따뜻한 홍삼차를 끓여마시고 회복되자마자 오렌지로 배를 채웠다. 작고 단단해서 껍질을 까기가 힘들었지만 정말 달콤했다. 그런데 알베르게에도 누군가 사두고 간 오렌지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Y는 오렌지가 너무 많다며 절반은 놔두고 가란다. 그리고 남은 것을 자기 배낭에 챙겨 넣는다. 내가 갖고 가겠다고 하니 무거워서 안된단다.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여러모로 최악의 날이다. 이제 정말 헤어져야 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Zubiri→Pamplona 20.3km

○Zubiri (530M)
●Ilarratz (549M) 3.1km
●Eskirotz/Esquiroz (528M) 0.8km
-Capilla de Santa Lucía
●Irune
●Larrasoaña (497M) 1.7km
-Iglesia Parroquial San Nicolás de Bari
-Puente del Siglo XIV
●Akerreta/Aquerreta (497M) 0.6km
-Iglesia de la Transfiguración del Señor
●Guenduláin
●Idoy
●Zuriáin (479M) 3.0km
-Lavadero
-Iglesia de San Millán
●Iroz/Irotz (473M) 1.9km
-Puente de Iturgaitz 12C
-Rio Arga
-El Horno del Irotz
●Zabaldika (470M) 1.0km
■Huarte/Uharte (457M) 2.5km
●Arleta (467M) 1.3km
■Olatz
●Arre/Trinidad de Arre (442M) 2.3km
-Puente de la Trinidad
-El Convento de Hermanos Maristas
●Villava/Atarrabia (435M) 0.5km
●Burlada/Burlata (433M) 1.2km
-Puente de Burlada
-Iglesia de San Juan Bautista
-Palacete de Burlada
●Pamplona (460M) 2.9km
-Murallas
-Iglesia Parroquial de San Saturnino
-Puente de la Magdalena
-Portal de Zumalacárregui
-Basílica de San Ignacio
-Iglesia de San Lorenzo
-Ayuntamiento
-Paseo de Sarasate
-Catedral Pamplona (La Catedral de Santa María)

707.6km/775.0km




Zuriain Bar 8.60€
Y Tortilla 2.00€×2=4.00€
Y Café -1.30€
P Cerveza -1.80€
Café con Leche -1.50€
Albergue de Pamplona 15.00€
Menu -9.00€
Y Menu -9.00€
Supermercado 7.90€




카페 콘레체, 또르띠야, 믹스 채소, 바나나
샐러드, 송어찜, 커피
오렌지, 홍삼차


Cocina
WIFI
Supermerc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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