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rgos→Tardajos
Day 52.
Thursday, June 15
까미노에서는 많은 일을 보고 듣게 된다.
한국인 중에서 카드 인출이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주변에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지만 아무도 돈을 빌려주지 않았는지 오늘은 까미노 포기를 선언하는 소리가 옆방에서 들렸다.
누가 좀 빌려주지 싶은 마음에 나라도 빌려주려고 생각을 하며 옆방으로 가서 보니 어제 그 사이다 청년이었다.
어제 S가 2L 사이다 한 병을 가지고 있었고 탄산의 특성상 개봉하면 바로 먹어야 하는 탓에 서둘러 나누어 주고 있었다.
그 사람에게도 사이다를 나누어 주겠다고 하니 마침 목이 말랐다며 좋다고 받아갔다. 그리곤 병째 들고 입을 대고 마시더니 몇 모금 마시다 이내 다시 돌려주었다. 다 마셔도 된다고 하니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나가다 보니 1층 벤딩머신에서 혼자 음료수를 뽑아 먹고 있었다. 그때 이미 카드 인출이 안 되어서 돈이 없다고 한국인들에게 하소연하고 다니던 중이었기에 벤딩머신에서 음료수를 사 먹는 그 상황이 나로선 납득되지 않았다.
더구나 다 같이 장 보러 가기로 한 날에 갑자기 인출이 안 된다고 한 것도 의문이었다. 5€도 없다고 했는데 음료수를 사 마실 돈은 있는 건가 싶었다.
그제야 함께 걸었던 주변 사람들이 돈을 빌려주지 않는 이유가 있겠지 싶었다.
지갑을 잃어버렸다거나 강도를 당한 경우가 아니라 단순히 카드 사용의 문제라면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없어서, 빌려주는 게 꺼려진다면 계좌이체를 하면 되었다. 까미노를 중단하더라도 귀국을 하려면 최소한 교통비는 있어야 했다.
그래서 가족에게 연락해서 내 계좌로 이체를 하면 내가 유로를 바로 주겠다고 제안하자, 자기가 돈을 모두 갖고 있어서 부모님이 이체를 해 줄 수가 없단다. 무슨 그런 이유가 있을꼬? 자꾸 이상한 변명을 대는 걸 보니 점점 의구심만 커져서 신경을 꺼버렸다.
정말 돈이 없는 거였을까? 까미노에서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실제로 산티아고를 얼마 앞두고 지갑을 잃어버려서 주변에서 얼마씩 나누어 주어 완주를 했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런 걸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돈이 없다고 해서 알베르게 비용을 흔쾌히 대주었더니 출발지에서부터 그랬던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케이스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걷게 되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게 되면서 순례자 소식을 본의 아니게 듣게 되기도 한다. 혼자 걸었던 나도 많은 소식을 듣고 있었다. 이번에는 남들과 다른 일정으로 걷고 있음에도, 그 와중에도 다시 마주치는 사람은 있었고 그동안의 소식을 전해 듣기도 했다.
그제 무리했던 피로가 아직 덜 풀려서 오늘은 따르다호스까지 갈까 고민을 했지만 날씨도 흐리고 해서 그냥 목표대로 걷기로 했다.
알베르게를 나서다 부르고스로 되돌아오던 한국인 커플과 마주쳤다. 여자 친구가 발이 아파서 돌아오는 길이란다. 계속 동키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지 오늘도 배낭은 보이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뭐라도 도움을 줄까 싶었지만 순간 아차 싶었다. 더 이상 그들에게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이 길은 환상을 가지고 걸으면 안 되는 길이었다. 저렴하고 안전하게 배낭여행을 할 수 있는 길임은 틀림이 없지만 힘든 길임엔 분명했다.
첫 번째 까미노는 삶이 너무 힘들고 지쳐서라는 이유도 한몫을 했지만 걷다 보니 당장 오늘 걸어야 할 길에 신경을 쓰게 되고 몸이 힘드니 고민할 겨를이 없어졌다. 몸이 정신을 지배해 버린다고 해야 하나?
열흘을 넘기면 상처도 아물고 걷는 게 나름 적응이 되어 까미노가 좋았지만 그럼에도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힘들 때마다 이 길이 생각났고 걷고 싶어졌다. 후반부의 까미노를 떠올리면 다시 걸을 만하다고도 생각했고 그렇게 난 다시 이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걷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딘가에 숨어있는 베드버그 때문에 배낭은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지만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실망만 하고 있었다.
부르고스 대성당을 왼쪽으로 두고 이어진 길을 따라
산 마르띤 아치를 통과한다. 먼저 오래된 Hospital del Rey와 Ermita de San Amaro를 지나 철길을 건너야 한다. 왼쪽으로 이어지는 N-620 도로를 뒤로하고 Los Guindales로 표시되어 있는 농로를 따라간다.
여기서부터 비얄비야 데 부르고스까지는 아르란손 강의 비옥한 농지와 버드나무 숲을 걷는 기분 좋은 길이다. 그러나 실제로 까미노는 비얄비야 데 부르고스를 통과하지는 않는다.
마을을 들어가기 전 버드나무 숲 아래의 철길을 건너면서 오른쪽 농로를 따라가다 보면 복잡하게 그려져 있는 도로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이어지는 까미노는 좌우로 꼬불꼬불하게 이어지며 현대적인 보행자 육교에 도착하게 된다.
이 육교는 N-120 고속도로와 Santiago de Compostela까지 이동하는 고속도로가 이어지는 복잡한 분기점을 넘어갈 수 있게 해 준다.
까스뜨로 산의 발치를 지나 Puente del Arzobispo를 통해서 아르란손 강을 건넌 후 왼쪽으로 이어지는 까미노를 따라가면 따르다호스에 다다르게 된다.
알폰스 6세가 적을 추격할 때 말이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는 전설이 있는 아르소비스뽀 다리는 심플한 중세의 다리다.
우아한 17세기 교차로를 통해 따르따호스에 들어가게 되는데 마요르 거리를 통과하면 로마시대의 옛 성터에 만들어진 마을의 기원을 엿볼 수 있다.
부르고스를 벗어나기가 만만치 않았다. 어차피 따르다호스까지는 고속도로가 이어져 있어 포장길로 가려고 했는데 위치 정보가 뜨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까미노 루트 따라 걸어야 했다.
자갈길을 걸어서인지 왼쪽 발가락 물집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양말을 벗고 살펴봐도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그냥 참고 걸었다.
10시쯤 따르다호스 알베르게에 도착했는데 13시 오픈이라고 되어 있지만 문이 열려있었다.
들어가 보니 주방이 없어서 고민이 되었다. 일단 세요 받고 화장실만 쓰자고 생각했지만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샤워하고 쉬다가 혹시라도 누가 와서 오픈 전이라고 뭐라 하면 다시 걷는 걸로 생각을 정리했다.
들어가 보니 이미 청소는 끝난 상태였다. 4인실도 있었지만 2층 10인실 창가 2층 침대에 자리 잡았다.
욕실에서 씻고 나오니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났다. 음악소리에 내가 왔는지도 모르는 듯 보였다. 내려가서 인사했다. 친절하게 맞아준 오스삐딸레라는 아침인데도 체크인해 주었고 내일 아침을 준다고 마실 커피와 차를 고르라고 했다. 그리고 맞은편 Bar El Camino 와이파이 비번도 알려주었다.
뒷마당에 빨래를 널고 인터넷 접속을 하니 마이클에게 메일이 들어와 있었다. 역시 까스뜨로헤리스란다.
문득 침낭이 생각났다. 매일 물리는 게 아니니 침낭은 괜찮은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물렸으니 한번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배낭은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침낭은 햇볕 소독을 하고 싶었다.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꾸 잊어버렸다.
숙소에 일찍 도착했던 나헤라에서 침낭이라도 햇볕에 먼저 널어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기회를 놓쳐서 아쉬웠던 차였다.
아직 13시, 널면서 침낭을. 확인해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 몰라 솔기를 따라 확인을 하고 옆으로 돌리려는 찰나 무언가 보였다.
조그만 베드버그. 휴지를 꺼내는 동안에도 불안해서 서둘러 잡았는데 피는 없었다. 이놈에게 물리고 있긴 있었나 보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침낭이 바람에 날린다. 넓은 빨랫줄에 내 빨래만 나부끼고 있었다.
오늘은 무사히 잘 수 있게 된 걸까? 마지막 녀석이길 바라본다.
그리고 건물로 들어오니 그새 누군가 체크인을 했다. 일본인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동양인이다.
오스삐딸레라는 옷을 갈아입고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한잔, 두 잔, 세잔을 연거푸 마시니 그제야 갈증이 사라졌다. 배고픔은 어떻게 해결한다 하더라도 목마름이 걱정이었는데 다행이다.
내일은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까지만 걸을까 했는데 온따나스까지 걸어도 되겠다 싶었다.
알베르게 바깥 벤치에서도 인터넷은 가능했다. 오랜만에 구글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벨로라도 ~ 올모스 32km 6시간 45분, 올모스 ~ 부르고스 16km 3시간 25분, 부르고스 ~ 따르다호스 10km 2시간 10분이었다.
14시 서양인 여자 두 명이 들어왔다. 15시 냄새나는 서양인 여자 순례자가 체크인하고 17시 서양인 남자 2명이 추가로 체크인해서 오늘은 7명이다.
그동안의 숙박부에 계속 한 명씩만 기록되어 있어서 오늘도 혼자 조용히 지내려나 싶었더니 내가 손님을 몰고 온 셈이 되었다.
오늘은 바람도 불고 맞은편에 창이 있어서 시원하다. 마치 시골에서 쉬고 있는 것 같았다. 발에서 불이 나는 것만 아니면 정말 원하는 하루였다.
이제부터 마트도 없는데 어제 먹을 걸 샀어야 했다. 무거워도 좀 참을 걸. 내일은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고 다음날 런치까지 준비하려면 면은 그냥 갖고 가야겠다. 혹시 남는다면 까리온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당장 먹을 수 있는 거라곤 파스타, 밥뿐인데 갈리시아 진입 전까지 다 먹어야 한다.
확인해 보려던 싱꼬유로는 5€가 맞았다. 아헤스의 알베르게에서 사립이 다 차지 않았음에도 공립을 오픈해 주려고 했던 셈이다. 5€에 해주겠다는 걸 내가 마다하고 그냥 온 것인데도 자꾸 그들 때문에 그랬다며 남 탓을 하게 된다. 정신 차리자.
Burgos→Tardajos 10.8km
○Burgos (863M)
●Villalbilla de Burgos (831M) 5.9km
●Tardajos (823M) 4.9km
-Iglesia de Santa María
-Puente del Arzobispo
478.2km/775.0km
Albergue de Peregrinos Municipal de Tardajos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