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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no de Santiago #17

Navarrete→Azofra

by 안녕
Day 15.
Wednesday, June 10


7시 출발하려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배낭을 메고 비옷을 입으려는데 단추가 잠기지 않았다. 한국에서 시험 삼아 입어봤을 때는 배낭을 메고 입어도 넉넉해서 잠겼었다. 배낭이 커진 것인지 비옷이 작아진 것인지 결국 배낭은 레인커버를 씌우기로 하고 비옷을 입었다. 그러나 레인커버도 배낭을 다 덮지 못했다. 배낭이 문제였나 보다. 배낭은 확장하지 않은 기본 상태로만 레인커버가 씌워지는 것 같았다. 대충 씌우고 걸었다. 드러난 배낭 어깨 끈을 따라 빗물이 스며들었고 어깨가 젖기 시작했다.




벤또사를 향하는 오르막과 산 안똔 언덕(Alto de San Antón)을 오르는 오르막을 제외하고는 힘든 구간이 없으며 이 오르막도 그리 높지 않다.

나바레떼를 나와서 벤또사의 언덕길을 오르기 전 까미노를 따라 내리막을 가다 보면 1986년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하다 교통사고로 죽은 벨기에 순례자 앨리스 그래이머를 추모하는 기념비를 볼 수 있다. 그녀의 죽음에서 알 수 있다시피 고속도로 N-120의 확장으로 과거의 까미노 구간이 바뀌면서 자전거 순례자에게는 조금 위험할 수도 있다. 특히 마을을 나와 고속도로로 들어가서 걷게 되는 구간에서는 주의를 하여야 한다. 왼쪽으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고속도로와 평행하게 급하지 않은 오르막길을 걸어야 한다. 이후 길은 까미노의 오른쪽으로 지나는 고속도로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반복하면서 4개의 교차로를 건너 이어진다.

소떼스(Sotés)에서 나오는 길을 따라서 오른쪽으로 고속도로를 향해 진행하다 도로를 가로질러 샛길로 들어가야 한다. 소떼스의 잘 알려진 포도주 양조장의 포도밭 사이로 왼쪽으로 조금 비스듬히 샛길을 따라 까미노를 걷다 보면 나지막한 언덕 기슭에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는 벤또사가 내려다 보인다.

이내 비가 잦아들어 다행이다 싶었다. 신발이 젖기 직전에 비가 그쳤고 해가 쨍쨍 났다. 더워서 비옷을 벗으니 또다시 비가 내렸고 비옷을 입으니 다시 해가 쨍쨍 났다. 가는 길 내내 그렇게 변덕스러운 날씨가 이어졌다.

벤또사는 돌아가는 마을이라 지나치려고 했는데 차도와 평행으로 이어지던 길이 끊기고 벤또사로 들어가는 길만 있어서 그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길이 젖어있으니 돌길이 그나마 나았다.

9시쯤 벤또사에 들어섰다. 작고 조용한 마을인 벤또사에는 까미노의 공식 협회 중에 하나인 산 사뚜르니노 협회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가 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는 Ventosa (596M)의 중심에는 사뚜르니노 성인에게 바쳐진 성당이 있고 전원풍 건물들이 있다. 이곳은 순례에 지쳐서 조용함과 평온함을 찾는 순례자들에게는 이상적인 마을이다. 기록에 따르면 11세기에 산초 3세가 산 미얀 데 라 꼬고야 수도원에 이 마을을 기부했다고 한다.

중세 벤또사 부근 까미노에는 산 안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병원이 있었다. 오래전 폐허가 된 이 병원에는 예수의 상이 있었는데 밭을 갈던 농부가 발견하여 현재는 로그로뇨의 순수미술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곳의 전통 후식은 튀긴 빵인데 특별히 성 요셉을 위해 이 음식을 준비한다.

벤또사에서는 자전거를 빌려 타고 근처를 둘러볼 수 있다. 산따 꼴로마 길에서는 발데 계곡에서 나헤리야 계곡까지 펼쳐진 멋진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다.

또한 벤또사부터 바랑꼬 데 아예도, 엘 에스삐날 산(1,000M), 몬깔비요 산(1,496M)까지 하이킹을 하기도 좋다. 중간 정도 난이도의 등산로에 경치가 매우 좋으며 까메로스까지 숲길이 이어져 있다.

Iglesia Parroquial de San Saturnino
산 사뚜르니노 교구 성당은 벤또사 중심의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다. 사각형 기반에 벽돌로 만든 13세기 후반의 탑이 있다. 탑의 끝부분은 여덟 면으로 피라미드형으로 끝난다. 탑의 16세기의 고딕 양식 현관은 동식물 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위에 올라가면 매력적인 마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내부의 궁륭과 장미창이 아름다우며 14세기에 제작된 누워 있는 그리스도상과 인류를 위해 피 흘린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피를 흘리며 새끼들을 먹이는 펠리컨 조각상이 있다.

블랑까 성모의 춤
7월의 첫 번째 토요일에는 벤또사의 뿌에블로 광장에서 마을의 무용수들이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춤을 춘다. 바로 벤또사의 수호성인 블랑까 성모에 대한 전설로부터 나온 축제다. 산 사뚜르니노 성당에는 블랑까 성모상이 있었는데 하루는 한 소년이 종루로 새를 잡으러 올라갔다가 그만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긁힌 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수호성인 블랑까 성모가 도와주어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또 다른 전설인 블랑까 성모상을 훔치려 한 도둑의 이야기는 나바라에도, 리오하에도 전해진다. 도둑이 성모상을 가지고 도망을 가는데 뿌에블로 광장 근처에서 갑자기 성모상이 너무나 무거워져서 훔쳐갈 수 없어 바닥에 내려둔 뒤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




벤또사를 나서다 보면 가파른 오르막을 통해서 Alto de San Antón에 오르게 된다. 까미노 이정표와 함께 순례자들이 소원을 빌며 원추형 혹은 기둥 모양으로 자갈과 돌로 쌓아놓은 돌무덤이 있다. 이 오르막에서 과거 이곳에 있었던 안또니아노스 수도원의 유적을 지나치며 잠시나마 까미노의 허망함을 느끼게 된다.

산 안똔 정상에서는 편안한 내리막길이 시작되어 멀리 보이는 나헤리야의 계곡과 나헤라까지 축복받은 포도밭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마지막 부분의 급경사를 지나면 순례자는 나헤리야 계곡을 따라 걸으며 까미노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

그러나 N-120 고속도로와 만나게 되는 지점에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계속 걷다 보면 왼쪽으로는 높이 솟아있는 통신용 안테나와 불모지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이내 얄데 강 위를 지나는 보행자용 다리를 건넌다.




나헤리야 강변의 리오하 언덕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중세의 도시 나헤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상당히 불쾌해 보이는 공장지대를 지나야 한다. 가구가 많이 생산되는 도시인 까닭에 까미노 길을 따라 부서진 가구들과 같은 폐기물들이 어지럽게 쌓여있는 창고와 오래된 공장 건물을 지나면 더러운 공장 벽에 써져 있는 시를 보고 생각에 잠기게 된다. 스페인 말을 하지 못하는 순례자에게도 너무 익숙한 이 순례자를 위한 시는 에우게니오 가리바이 신부의 작품이다.

까미노는 다시 N-120 고속도로를 건너야 나헤라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지만 지친 몸을 쉬게 해 줄 알베르게까지는 아직 많이 남았다. 공장지대를 지나면서 느끼는 실망감은 이 아름답고 친절한 도시로 들어오면서 점차 사라진다.

마치 거대한 벌통을 연상시키는 구멍이 뚫려있는 붉고 커다란 바위산들을 끼고 있는 나헤라는 라 리오하의 주도였으며 10세기와 11세기를 거치면서 나바라 왕국의 본거지 역할을 했고 그 이후에는 이슬람교도들이 빰쁘로나를 무너뜨렸던 거점이 되기도 했었다. 나헤라는 나헤리야 강을 사이에 두고 8개의 아치를 가진 산 후안 데 오르떼가 다리가 구도시와 신도시를 연결시켜주고 있다. 나헤라는 특히 아름다운 기사들의 회랑과 신비한 왕가의 영묘를 볼 수 있는 산따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을 발견할 수 있다.




나헤리야 강을 중심으로 Nájera (498M)는 Barrio de Adentro 라고 하는 구시가지와 Barrio de Afuera 라고 하는 신시가지로 나뉜다. 나헤라는 과거 기독교 왕국과 이슬람 왕국 사이에 있었다. 로마 시대에 세워진 이 도시를 아랍인들은 바위 사이의 도시라는 의미인 나사라(Naxara)라고 불렀다.

산초 엘 마요르 왕은 나헤라를 왕국의 수도로 삼았으며 까미노 데 산띠아고를 지나가게 함으로써 도시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나헤라에는 산따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 같은 훌륭한 건축물이 많다. 이곳에는 가르시아 엘 데 나헤라, 현명왕 산초, 도냐 블랑까 데 나바라 등 서른 명 가량의 왕의 무덤이 있다.

근교에는 산 미얀 데 라 꼬고야 수도원, 라 리오하의 수호성인인 발바네라의 수도원 등을 방문할 수 있다. 또 가을에는 아로의 포도주 박물관을 방문해 보고 스키 시즌에는 에스까라이 산에서 스키와 스노보드를 즐길 수 있다.

또한 나헤라에는 화려한 축제로도 유명하다. 안기아노 축제는 7월 22일에 열리는데 긴 장대를 가지고 추는 춤이다. 6월 24일부터 29일까지는 사도 요한과 베드로를 기리는 축제가 열리며 9월 16일부터 19일까지는 순교자 요한과 산따 마리아 라 레알의 축제가 있다. 이 중 어느 때에도 이 지역의 맛있는 음식을 즐기기에 좋은데 그중에서 송어, 게, 과일, 포도주가 특히 유명하다.

Monasterio de Santa Maria la Real
산따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은 산초 3세의 아들인 나바라의 왕 가르시아 6세에 의해 11세기에 세워진 클뤼니 수도원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은 흔적만 남아있고 15,16세기에 재건축되었다. 건축 양식은 추리게레스코식 고딕 양식이며 15세기의 아름다운 성모상이 보관되어 있다. 수도원 안에는 성당, 왕가의 영묘, 기사들의 회랑 등이 있다. 이 중 산초 3세의 부인이자 알폰소 8세의 어머니인 도냐 블랑까 데 나바라의 무덤이 돋보인다.

Puente de San Juan de Ortega
산 후안 오르떼가 다리가 처음 건설된 것은 10세기인 것 같지만 12세기에 다시 지어졌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번 보수되었으나 나헤리야 강의 주기적인 홍수를 이기지는 못했다. 1866년에 원래 다리가 있던 자리에 현재의 다리를 다시 지었고 2003년 교통량 증가로 폭을 넓혔다.

Monasterio de Santa Elena
산따 에레나 수도원은 16세기 중반에 도냐 알돈사 만리께 데 라라에 의해 건립되었다. 성당은 라틴십자가형 평면의 네 구획으로 나뉜 신랑으로 되어 있고 토스카나식 기둥 열 개 위에 세워졌다. 주 제단에는 바로크식 제단화가 있고 둥근 처마 장식엔 포도 무늬와 여러 성인, 산따 에레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낮은 합창단 석은 철창으로 닫혀 있고 내부엔 17, 18세기의 다양한 유화들이 있다. 수도원 내부에는 수페룬다의 백작 돈 호세 만소 벨라스꼬 와 또레스가 누이 아바데사에게 선물한 아메리카 인디오를 모티브로 장식한 은세공품 같은 예술품들이 있다. 그는 후에 남미 페루의 첫 번째 부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Real Capilla de la Santa Cruz
산따 끄루스 성당은 1611년에 봉헌되었으나 완공은 1634년에 되었고 그 이후에도 1940년까지 재보수가 계속되었다. 세 개의 신랑이 있는 성당 안에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제단화와 다양한 조각과 유화가 보관되어 있다. 13세기 후반의 고딕 양식으로 된 십자가 상과 17세기의 플랑드르 양식의 구리 십자가, 따라소나의 주교이자 나헤라의 수호성인인 성 쁘루덴시오 데 아르멘띠아와 순례자 요한의 유해도 보관되어 있다.

기사단을 둔 성모
나바라의 왕 돈 가르시아의 매가 비둘기를 쫓고 있었는데 매와 비둘기가 숲으로 사라져 버렸다. 매를 기다리다 지친 왕이 직접 매를 찾아 나섰다가 동굴을 발견했는데 그 동굴에서는 신비로운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왕이 동굴에 들어가자 찬란한 빛을 내는 백합 화병과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상이 있었는데 그 옆에는 매와 비둘기가 마치 좋은 친구 사이처럼 나란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왕이 이 자리에 성소와 수도원을 지으라고 명령하여 땅을 파기 시작했는데 이곳에서 수많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유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왕은 이곳을 나바라 왕의 묘지로 쓰기로 결정했는데 이 전설이 산따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의 기원이며 성모상을 발견했을 때 성모상을 장식하고 있던 떼라사(Terraza; 화병)를 기념하여 라 떼라사 기사단이 결성되었다.

롤랑과 페라구뜨의 전투
나헤라는 샤를마뉴의 조카 롤랑과 골리앗의 후손인 거인 페라구뜨의 전투에 관한 전설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롤랑과 페라구뜨의 싸움은 피가 낭자하고 치열했으며 승자가 가려지지 않았다. 롤랑은 휴전을 제안하고 페라구뜨를 만나 그의 친구가 되고 싶다고 가장하며 거인에게 술을 먹였다. 거인은 술에 취해서 자신의 약점은 배꼽이라고 고백해 버렸다. 다음날 롤랑은 그를 화나게 만든 다음 그와 맞붙어 싸우다가 배꼽에 창을 찔렀고 그리하여 롤랑은 승리를 거두었다. 이들의 싸움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을 까미노 데 산띠아고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이 나바라 왕궁의 주두에 있는 것이다.




12시쯤 나헤라에 도착했다. 궂은 날씨에 쉴 곳이 마땅치 않아서 끊임없이 걷기만 했더니 빨리 도착했다. 보통은 여기서 머물지만 난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마을 끝에서 잠시 쉬기 위해 어느 건물 앞에 있는 벤치에 잠시 앉았다. 그런데 건물에서 나오던 아주머니가 앉아있는 나를 보더니 뭐라 그런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표정에서 감정이 느껴졌다. 걱정이 담긴 찌푸린 얼굴이라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아 그냥 일어섰다.




나헤라를 빠져나오면 까미노는 산따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의 가장자리를 돌아 Peñaescalera의 비탈길로 가는 포장도로로 이어진다. 조용하고 한적한 오래된 도로를 따라오면 붉게 물든 바위산 사이의 소나무 숲을 통해 비탈길로 된 통행로를 거쳐 마을을 빠져나올 수 있다.

마을을 나오면 답답한 가슴을 씻어 줄 라 리오하 평원이 펼쳐진 것을 볼 수 있다. 까미노는 포도밭 사이로 이어진다. 왼쪽에는 데만데 산맥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또로뇨의 하얀 언덕이 멀리 보인다. 가슴 벅찬 풍경을 옆에 꿰차고 쉽고 즐거운 여정이 이어진다.

리오하에 들어서면 땅의 빛깔이 붉게 물들어 있다. 석회암과 충적토가 많은 이 땅은 잡초를 억제하는 동시에 포도나무의 성장을 촉진해 준다. 스페인의 태양을 닮은 이 붉은 황토와 포도나무는 레온의 황무지까지 계속 이어진다. 평소에 먹는 포도보다 훨씬 알이 작고 단맛이 강한 포도가 생산되는 포도밭을 지나다 보면 중세 아랍인들의 마을이었다고 전해지는 아소프라에 도착한다.

아소프라에는 2인 1실의 단층 침대를 가진 알베르게가 있다. 만약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면 천사들의 성모 성당 이외에는 특별히 볼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을의 오른쪽으로 나있는 마요르 거리를 따라가는 것이 좋다. 마을에는 두 개의 바르가 있어서 나헤라에서 아침 일찍 출발한 순례자가 아침을 먹기에 좋다.




Azofra (546M)는 뚜에르또 강의 비옥한 계곡에 자리 잡은 아랍인의 마을이었다. 기사도의 전통과 중세의 유물, 오래된 집, 특히 에르비아스 백작의 저택 등이 있다. 8월 15일에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축제가 열린다. 1168년에 도냐 이사벨은 순례자를 위한 병원과 성당을 세우고 성 베드로에게 봉헌했다.

또한 까미노 데 산띠아고에서 죽은 순례자들을 위한 묘지도 만들었다. 이 병원은 19세기까지는 운영되었고 오늘날엔 폐허만 남아있다.

병원 건립을 알리는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깔라오라와 나헤라의 주교인 나 로드리고는 도냐 이사벨에게 아소프라 마을에 순례자만을 위한 병원과 묘지를 세우는 것을 허락한다.”

Iglesia Parroquial Nuestra Senora de Los Angeles
천사들의 성모 교구 성당은 하나의 신랑과 세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는 17~18세기의 성당으로 루네트가 있는 궁륭으로 덮여 있고 제단 쪽 돔은 별 무늬가 있는 16세기 양식으로 건축되어 있다.

Rollo de Azofra
아소프라의 원주는 마을을 빠져나오면 시루에냐로 가는 까미노의 오른쪽에 있다. 이 원주는 땅에 정의를 세우는 칼을 연상시키며 악당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경고하는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14시쯤, 아소프라에 도착했다. 다시 비가 쏟아져 둘러볼 여유 없이 서둘러 들어갔다. 이곳 알베르게는 2인실이고 더운 날, 지친 발을 담글 수 있는 작은 수영장이 있다고 해서 왔으나 비가 오고 있어서 크게 의미는 없었다. 등록을 하고 세요를 받는데 리셉션의 글귀가 눈에 띈다.

《The Tourist Demands, The Philgrim Thanks.》

현대식 알베르게 건물은 긴 복도의 오른쪽엔 수영장이 내려다 보이는 통창이 이어지고 왼쪽엔 싱글 침대 두 개가 들어가 있는 방들이 이어진 구조였다. 방 안에는 침대가 좌우로 벽에 붙어있고 안쪽에는 작은 베란다가 딸려 있었다. 입구 쪽에는 커다란 수납장이 좌우로 있는데 방문이 수납장의 문이 되기도 하는 구조다. 방문을 닫으면 수납장이 열려있고 방문을 열면 수납장이 닫힌다고 해야 하나?




어깨끈을 타고 빗물이 들어가서 배낭 속 물건들이 대부분 젖었다. 옷은 지퍼백에 넣어두어서 괜찮았지만 배낭을 말리기 위해 짐을 모두 꺼냈다. 꺼내고 보면 짐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이게 왜 무거운 걸까? 빈 배낭을 복도 창가에 널어서 말렸다. 날씨는 다시 개어있었다. 다행히 신발은 다 마른 상태였지만 조금이라도 뽀송하게 말리고 싶어서 방에 딸린 베란다에 내다 두었다. 수납장이 커서 배낭이 마를 동안 짐은 따로 보관할 수 있었다. 룸메이트는 프랑스인이었고 세 자매가 함께 걷고 있는데 두 동생은 옆 방에 묵고 있단다. 착하고 조용한 그녀는 같이 지내는데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




취사 가능한 주방이 있었지만 무언가 어수선했다. 수시로 배낭을 체크하다 어스름해질 무렵 방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오늘도 일찍 자리에 누워본다.




Navarrete→Azofra 22.6km

○Navarrete (510M)
■Sotés (580M) 3.5km
●Ventosa (596M) 2.1km/6.6km
-Iglesia Parroquial de San Saturnino
-Poyo de Roldan
-Alto de San Antón
●Nájera (498M) 16.9km/10.3km
-Monasterio de Santa María la Real
-Puente de San Juan de Ortega
-Monasterio de Santa Elena
-Real Capilla de la Santa Cruz
●Azofra (546M) 5.7km
-Iglesia Parroquial Nuestra Señora de Los Ángeles
-Rollo de Azofra

577.4km/775.0km




Albergue Municipal de Azofra -7.00€




Cocina
Refrigerador
WI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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