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내 사랑 마리벨 #21

호라티우스의 맹세 2/2

by 안녕
Épisode 19.


이튿날, 콩테 극장에서는 《시골 처녀 잔느》 의 두 번째 공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평민석이 이상하게 초만원이로군요!"

"아침의 그 브로셔 탓인가?"




그날 아침 파리 전역에는 다음과 같은 브로셔가 나돌았다.

'왜 코메디 프랑세즈는 마리벨에게 사과를 강요하고 출연을 정지시켰는가.

이 무대에 평상복 차림의 신인 여배우가 나타났었다.

그녀야말로 평민의 참모습을 표현한 최초의 배우가 아닐까?

말하자면 마리벨은 우리 평민을 대표하는 배우다!'

그것이 브로셔의 내용이었다.




"연극은 고상한 예술이야. 결코 우스갯거리가 아니란 말이야. 전통을 자랑하는 코메디 프랑세즈에 그런 구질구질한 배우가 나타난대서야 말이나 돼?"

귀족들은 마리벨의 출연 정지 결정에 만족하고 있었다.

"흥! 고운 옷을 입고 연지곤지 찍어 봤자 한 꺼풀 벗기면 다 똑같은 거야. 죽으면 귀족이나 평민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귀족이라고 잘난 체하는 꼴이라니!"

평민 관객들의 기세도 만만치가 않았다.

"마리벨을 출연시켜야 해."

"그래! 우린 평상복 차림의 평민 배우를 보러 온 거니까 말이야."

"오늘 마리벨을 출연시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테야."

연극이 시작되기 전부터 관객들은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당시는 한창 평민의 혁명 열기가 고조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랬기 때문에 에이프런을 두른 마리벨의 출연은 평민들에게는 혁명적 의의가 컸다.

"마리벨을 출연시켜야 할까 봐요."

"잘못하다간 폭동으로 변할지도 몰라요."

극장 측은 근심이 태산 같았다.

"하는 수 없다. 마리벨을 불러와!"

이윽고 단장이 결단을 내렸다. 하찮은 배우 한 사람을 등장시키는 것으로 노한 평민들의 흥분을 가라앉힐 수만 있다면 그쪽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낙심해서 세탁소에도 나가지 않고 우중충한 방에 박혀있던 마리벨은 무대에 출연하라는 전갈을 받고 처음에는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마리벨이 콩테 극장에 도착하자 입구에서부터 평민들은 환호성을 울렸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인기였다.

"에그, 그 옷 기차게 예쁘네요. 나도 죽기 전에 한 번 걸쳐 보구 싶당께."

마리벨의 대사를 듣고 평민들은 환호성과 박수를 보냈다. 그 때문에 연극은 다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도 기가 막힌 사람은 잔느였다. 마리벨을 싹 일 때부터 잘라놓으려던 계획이 도리어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이봐, 마리벨 양."

"네, 단장님!"

마지막 공연이 끝나던 날 단장은 마리벨을 불렀다. 단 한마디의 대사로 주연인 잔느의 인기를 압도해 버린 이 행운의 여배우를 단장은 적절히 이용해야만 했다.

"다음 작품은 《아크로폴리스의 시민》이야. 그대가 헬레나 역을 맡아 줘."

"헬레나를요?"

너무도 놀라서 마리벨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크로폴리스의 시민》의 헬레나 역이라면 분명히 잔느가 코메디 프랑세즈에 데뷔했을 때에 맡았던 역할이었다. 단 한마디 대사의 단역으로 출연했던 마리벨에게 대뜸 잔느와 동격의 대우를 해주겠다는 말이었다.

"해보겠어요! 해보고 말고요."

마리벨에게는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헬레나 역은 2년 전에 잔느가 출연하여 대 호평을 받았던 역할이었다. 그 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아크로폴리스의 시민》을 공연할 때면 헬레나 역은 언제나 잔느가 맡기로 무언 중에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헬레나 역을 마리벨이 맡는다는 것은 사실상 잔느에 대한 정면 도전이 되는 셈이었다.




"그만둬, 마리벨! 불필요한 경쟁이야."

다르마는 마리벨이 갑자기 클로즈업되었다가 잔느에게 패배를 당할까 봐 걱정했다. 아무리 마리벨의 인기가 하루아침에 솟아올랐다고는 해도 아직 잔느와 대결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단장은 당신의 연기력을 인정해서 헬레나 역을 시키는 게 아니야. 대중에게 인기를 얻은 당신을 이용해서 자기 자신의 인기를 올려보겠다는 욕심일 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마리벨의 연기력은 아직 잔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해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난 한시라도 빨리 잔느와 나란히 서고 싶어요. 잔느와 경쟁하는 입장이 되는 건 내가 바라고 있던 일이에요. 난 겁나지 않아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듀가 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마리벨은 잔느를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고 있는 것 같군. 어째서 그런가?"

마리벨은 듀가 존에게 레안드르의 죽음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러니까 잔느는 레안드르의 원수입니다."

"흠!"

듀가 존은 한동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연인 레안드르란 배우가 잔느 일당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에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코메디 프랑세즈에..."

어린 소녀가 그토록 열성적으로 자기의 연극학교에 들어오겠다고 했을 때의 그 얼굴을 듀가 존은 기억했다. 그 모든 것이 애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니! 무서운 집념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헬레나 역을 맡아선 안돼. 신성한 무대를 사사로운 앙갚음에 이용하려는 건 당치도 않아!"

다르마는 젊은이다운 정의감에서 마리벨을 다그쳤다.

그때 단장이 세 사람이 얘기하고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곤란하게 됐는 걸, 마리벨. 남자 주연을 맡을 사람이 없어요. 모두들 마리벨과 공연하면 잔느에게 대항한다는 인상을 줄까 봐 피하는 모양이오. 그러니 별수 없이 이 연극은 취소할 수밖에 없겠소."

그 얘기를 듣고는 듀가 존이 기침을 한 번 했다.

"단장! 당신은 적절한 배역을 고르는데 서투른 모양이구먼."

"무슨 말씀을?"

"남자 주인공으로는 다르마가 있잖소!"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다르마 자신이었다.

"하지만 선생님!"

"이미 결정된 일이야, 다르마! 단장, 마리벨과 다르마라면 이보다 더 훌륭한 배역은 없을 거요!"

단장도 불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단장이 돌아가자 다르마는 자기의 의사도 묻지 않고 출연 결정을 내려 버린 은사의 얼굴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전 선생님의 마음을 알 수가 없군요. 무대는 신성한 곳이라고 입버릇처럼 가르치시던 선생님이 제게 이런 일을 시키다니요."

듀가 존은 마리벨과 다르마를 번갈아보며 히죽 웃었다.

"원수를 갚겠다는 마리벨의 그만한 의욕 없이는 지금 코메디 프랑세즈에선 잔느를 능가하는 배우가 나타날 수 없어. 그뿐이 아니야. 마리벨이 오직 앙갚음하려는 일념만으로 코메디 프랑세즈의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마리벨에게는 천부의 재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가 개인교수를 자청했던 것이고요."

"그런 자네가 모처럼 찾아온 마리벨의 무대를 짓밟아 버릴 셈인가?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신인이 주연을 맡을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아. 영원히 기회가 닿지 않아서 재능을 단역으로 썩혀 버린 배우도 얼마든지 있어. 이건 마리벨이란 천부적인 연기자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일지도 모르는 거야."

더 이상 다르마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듀가 존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마리벨, 잔느가 헬레나 역을 어떻게 연기했었는지를 물어보지 않는군. 궁금하지 않은가?"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잔느의 헬레나는 잔느의 것이고 마리벨의 헬레나는 마리벨의 것이니까요."

"저런, 천하의 명배우 다르마 씨 앞에서 상당히 건방진 말투로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듀가 존의 얼굴에는 제자에 대한 사랑과 기대가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아크로폴리스의 시민》은 마리벨에게는 결코 생소한 작품이 아니었다. 생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큼 자신도 있었다.

레안드르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노트에는 《아크로폴리스의 시민》의 연출 콘티가 자세히 적혀 있었고 마리벨은 레안드르가 생각날 때마다 그 노트를 펼쳐보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리벨은 이미 이 연극의 세부사항까지를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레안드르는 이 작품을 무척 공연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말로 극단의 연기진을 가지고는 엄두도 못 낼만큼 이 작품은 규모가 컸다. 언젠가 극단이 커지고 이름도 유명해지면 그때 한번 멋지게 무대에 올려놓으리라 별렀던 모양이었다.

레안드르의 노트에는 군데군데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고 무대의상이나 무대장치까지도 서투른 그림이지만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노트에는 마리벨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한 군데 있었다. 그것은 붉은 줄을 두 번씩이나 그어 놓은 《호라티우스의 맹세》라는 구절이었다. 호라티우스의 맹세! 그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 그것이 마리벨의 의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낙서는 아니라는 걸 마리벨은 육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공연 날짜가 사흘 앞으로 다가온 날이었다. 듀가 존은 마리벨의 연습실에 찾아왔다.

"마리벨, 첫 무대를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꽤 있겠지?"

그러면서 그는 봉투 한 장을 마리벨 앞에 내밀었다. 그 속에는 코메디 프랑세즈의 초대장이 다섯 장이나 들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연극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초대장을 살 능력이 마리벨에게는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마리벨에게는 그 초대장은 더없이 반가운 선물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마리벨이 연극을 보여 줄 만한 사람이 사실상 없었다. 로버트, 레안드르, 프로렐 그 모두가 마리벨의 주변에서 사라진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라곤 생활에 찌들어 있는 같은 아파트의 주민들 그리고 세탁소의 직원들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웃돈을 얹어준다고 해도 연극 관람을 할 시간이 없었다.

마리벨은 다르 달랑 공작 부인을 생각했다. 까닭도 없이 배우를 싫어하던 그의 아들 프랑소와도 머리에 떠올렸다. 프랑소와는 초대장이 필요 없다고 했었다. 그러나 마리벨은 첫 번째 무대에 꼭 초대하겠다고 그들에게 약속했었다. 연극을 보러 오든 말든 그것은 상대의 자유고 자기는 약속을 지켜야 할 것만 같았다.




다르 달랑 댁에는 마침 프랑소와가 있었다. 마리벨은 초대장 두 장을 그에게 내놓았다.

"프랑소와 님은 오지 않겠다고 했지만 저는 드리기로 약속했으니까요."

프랑소와는 초대장을 받아 들고는 깜짝 놀랐다. 얼마 전만 해도 엑스트라 모집에 나가기 위해 추천장을 위조하려 했던 소녀가 코메디 프랑세즈의 주연 배우가 되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어머님이 써주신 소개장의 효과가 컸었군요. 불과 석 달 만에 이런 큰 역을 맡게 됐으니."

"그 소개장은 찢어버렸습니다. 난 내 힘으로 듀가 존 연극학교에 입학했고 코메디 프랑세즈에 들어간 겁니다."

그 사실은 아무도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마리벨이 혼자의 힘으로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오늘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을!

마리벨은 다르 달랑 댁을 나섰다.




마리벨이 다르 달랑 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왔을 때 말을 탄 준수하게 생긴 장교 한 사람이 앞을 막아섰다. 그 사람은 마리벨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 낯이 익은데?"

"네, 전 코메디 프랑세즈의 배우거든요."

마리벨은 낯선 장교에게 처음으로 자랑스럽게 자기를 소개했다. 첫눈에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혹시 마리 안느 로비노 드 생 쥐스트라는 부인을 알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장교님.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장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라고요...? 그럼 실례했소."

장교는 말머리를 돌렸다. 마리벨은 웬일인지 호감이 가는 그 사람에게도 자기의 초대장을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장교님, 잠깐만요. 이건 제 첫 무대의 초대장입니다. 시간이 나시면..."

"감사합니다."

장교는 초대장과 마리벨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다시 한번 갸우뚱하고는 다르 달랑 댁 쪽으로 말을 달렸다.

석장의 초대장을 쓰고 이제 두장이 남았다. 마리벨은 퐁 뇌프에서 자기를 구해준 일이 있는 줄리앙을 생각해 냈다. 어쩌면 그 사람이야말로 이 초대장을 받을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르고뉴 숲 근처의 사관학교는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웬일이야, 마리벨? 그동안 센 강에는 빠지지 않은 모양이로군."

마리벨이 내주는 초대장을 보고 줄리앙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연극배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래도 받아주세요. 당신은 제 생명의 은인이시잖아요! 그때 죽었더라면 코메디 프랑세즈의 무대 위가 아니라 공동묘지의 비석 아래에 묻힐 뻔했잖아요."

배우를 싫어하는 줄리앙이었지만 마리벨이 그동안 성공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은 축하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말이죠, 당신은 사관생도니까 지식이 많을 거예요. 저... 《호라티우스의 맹세》란 무슨 뜻이죠?"

마리벨은 레안드르의 노트에 적혀있던 수수께끼를 줄리앙에게 물어보았다.

"호라티우스의 맹세? 그건 그림의 작품명이 아닌가? 요즘 한창 인기 있는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호라티우스의 맹세》말이지."

"그림이라고요?"

"관심이 있으면 날 따라와. 우리 집 살롱에 걸려있는 그림이야. 우리 아버진 대단한 그림 수집가시거든."

마리벨은 줄리앙의 말을 같이 타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줄리앙의 말은 생 쉴피스 성당 뒤의 다르 달랑 댁 앞에서 멈췄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마리벨은 놀란 나머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줄리앙이 다르 달랑 공작의 아들이란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다르 달랑 가의 살롱에는 커다란 그림 《호라티우스의 맹세》가 걸려 있었다. 세 명의 로마 병사가 칼 세 자루를 한 노인에게 바치며 굳은 맹세를 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고 그 옆에 로마 시민들의 모습도 보였다.

바로 그 그림이었다. 레안드르의 노트 속에 그려져 있는 바로 그 그림이었다. 그 그림 속에는 로마 사람들의 의상이 모두 나타나 있었다. 시민들, 군인들, 여자들, 어린이들. 그들은 모두 팔다리를 하얗게 드러낸 로마 시대의 의상을 입고 있었다.

그때 살롱으로 누군가 들어서는 기척이 있었다. 돌아다보니 놀랍게도 다르마와 듀가 존이 서있었다.

"마리벨! 어떻게 여기를?"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그림을 보러 왔어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과연 마리벨이로군! 로마 시대의 의상을 살피기 위해서란 말이지? 우리와 같은 목적이로군."

세 사람은 벽 앞에 서서 넋을 잃고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쳐다보았다.

"찾아냈어요, 헬레나를! 턱을 고이고 있는 저 여자가 바로 제가 생각하는 헬레나예요."

"그렇습니다, 선생님. 이것이 바로 로마 시대의 복장입니다!"

듀가 존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이미 나 자신도 느낀 지가 오래야. 그래서 내가 코메디 프랑세즈에 있던 시절에 시대 고증에 충실한 무대의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러 번 제안했었지. 하지만 무대에서 속살을 내보이는 건 비인간적이라고 비웃음거리가 됐었던 거야."

"선생님, 생각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실현할 수 없어요. 누군가 먼저 실행해야 해요. 그 역할을 제가 맡겠어요."

마리벨이 비장한 결심을 했다. 관객들에게 발목의 복숭아뼈도, 손등조차 보이기를 꺼리던 시대에 팔과 다리를 드러낸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선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역할을 마리벨이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자칫하면 세상의 웃음거리가 돼."

듀가 존은 용기 있는 소녀를 대견스럽게 바라보았지만 걱정이 더 앞섰다.

"전... 웃음거리가 되는 일 따위는 하나도 두렵지가 않아요!"

"그렇습니다, 선생님. 저도 배우로서의 생명을 걸고 이 혁명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고맙네, 다르마 군! 그리고 마리벨 양!"

듀가 존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할 어린 동지들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앞에서 세 명의 용기 있는 연극인들이 '다르 달랑 가의 맹세'를 하고 있는 장면을 줄리앙은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 내 사랑 마리벨에 등장하는 명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 Le Serment des Horaces》

다비드는 웅장한 로마식 고전 건축을 배경으로 호라티우스 삼 형제가 아버지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순간을 묘사했다. 세 아들은 근육질 팔을 앞으로 펴서 손가락을 뻗는 로마식 경례를 한다. 아버지는 왼손으로 삼 형제에게 건네줄 세 개의 검을 높이 들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올리며 용기를 불어넣는 동작을 한다. 아버지의 단호한 태도와 동작에서 세 아들을 피의 제단에 바치는 영웅적 행동에 따른 어떤 망설임도 없다는 각오가 느껴진다. 오른쪽의 슬픔에 잠긴 여성들과 아이들은 삼 형제의 아내와 누이, 어린 자식들이다. 호라티우스 가문과 쿠리아티우스 가문은 형제자매끼리 결혼하고 약혼한 사이였지만 결투로 인해 서로 적이 돼 싸우는 비극적 운명을 맞은 것이다. 삼 형제는 여성들의 눈물과 애원에도 불구하고 공화국을 구하라는 아버지의 부름에 순종한다.

다비드가 직선을 강조한 남성의 강인한 육체와 곡선을 강조한 여성의 부드러운 육체, 남성의 결연한 자세와 여성의 무기력한 자세를 대비한 의도가 있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가장 근본이 되는 국민의 미덕이자 의무로서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 현실의 삶보다 더 소중하며 심지어 혈육보다 더 우선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다.

다비드는 위대한 예술가이자 급진적 정치 성향을 가진 혁명가였다. 그는 프랑스혁명을 상징하는 인물인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장 폴 마라와 우정을 나누는 정치적 동지였다. 프랑스혁명을 열렬히 지지했던 다비드는 혁명 이후에 세워진 정부에서 정권 선전을 담당하며 혁명정신을 전파하는 선전화들을 선보이는 등 시민을 선동하는 역할을 했다.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프랑스혁명 직전의 격동기였다. 공화주의자들이 시민혁명 운동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며 절대왕정 제도를 무너뜨리려고 시도한 시점이다. 루이 16세는 백성들로부터 충성심을 얻고 도덕적인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이 작품을 주문했다. 하지만 다비드는 고대 신화와 역사를 동시대 정치와 비유해 묘사하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한 자신의 특기를 발휘해 태동하는 혁명정신을 그림에 담았다.

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파리에서 출생하였고, 일찍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하여 1774년에는 로마 상을 받았다. 이듬해 로마로 유학하여 고대 미술에 큰 감명을 받았다. 역사화를 그려 고전주의의 지도자가 되는 한편, 근대 회화의 시조가 되었다. 다비드는 이후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이자 프랑스혁명의 전폭적인 지지자가 되었고, 프랑스 공화국 하에서 사실상 예술의 독재자 역할을 하였다.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자 투옥되었으나, 석방된 이후 나폴레옹 1세의 정치 체제에 협력했다. 프랑스혁명 때에는 문화재 보호에 앞장섰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후 궁정 화가가 되어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그렸으나 나폴레옹 실각 이후 망명 생활을 시작하지만 유럽의 많은 귀족과 중산층은 다투어 그에게 초상화를 주문했다고 하니 유럽인들은 그의 죄는 미워하되 재능은 높이 샀던 모양이다. 그가 남긴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비롯한 ‘마라의 죽음’,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줴드폼의 선서’,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과 같은 작품들은 신고전주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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