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꾸는 것이지 이루는 게 아니었다.
나의 꿈은 간호장교였다.
아버지는 배를 타셨다. 어쩌다 집에 오시는 날엔 맛있는 것을 사주셨고 오랜만에 보는 우리들에겐 따뜻하게 대해 주시는 그저 평범한 아버지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남편의 빈자리까지 채우며 홀로 세 남매를 키우셔야 했기에 남들보다 자식들을 더 강하게 키우셨다. 우리 집에서 사랑의 매는 수도 호스였고 사이즈별로 잘라놓으셨다. 어머니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때렸기 때문에 한번 생긴 피멍은 오랜 기간 사라지지 않았다. 왜 맞는지도 모르고 맞았던 날이 더 많았던 것 같았다. 종아리 한 곳만 공략하시던 아버지는 피부가 터질 정도로 때리셨지만 그렇게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어머니가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버지는 가족이 그립다며 국내로 이직하셨다. 자신의 건강을 끔찍할 정도로 챙기시던 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셨지만 간이 나빠져 직장을 그만두셨다. 오랜 기간 입원을 하셨는데 병간호는 어머니와 나의 몫이 되었다. 그러다 사업을 시작하셨는데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일은 대부분 어머니 몫이었다. 심지어 운전면허 시험에 계속 떨어지자 한 번에 붙은 어머니가 운전을 대신하셔야 했고 조수석에 앉은 아버지는 어머니의 운전 솜씨를 계속 비난하셨기에 어머니는 언젠가부터 운전을 하지 않게 되었고 지금도 끔찍해서 싫다고 하셨다. 현재의 어머니는 차를 타고 다니는 여행이 꿈이라고 하셨지만 그럼에도 운전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하셨다.
계속 비어있던 남편과 아내의 자리가 채워지자 부모님은 서로에게 불만이 쌓여갔다.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기는 날엔 욕설과 폭력이 일상이 되어버렸고 화목함을 내세우던 가훈과는 전혀 다른 집이 되어버렸다. 나에겐 벗어나고 싶은 감옥이 되어 버렸다. 아버지도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거나 물건을 던지셨다. 그때부터 나에게 공포의 대상은 아버지가 되어버렸다. 나에게 폭력을 휘두르실 때면 어머니는 온몸으로 나를 보호해 주셨지만 그런 어머니조차 이유 없이 나에게 화를 내시곤 하셨다. 아버지의 자식이란 이유였다. 하지만 아버지 대신 그동안 악역을 맡아왔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런 어머니를 무조건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빠와 남동생은 이런 상황을 알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일은, 여자들만 집에 있을 때 일어나곤 했었던 거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내가 있을 때만 자신의 존재를 맘껏 드러내셨고 두 아들 앞에서는 철저히 본색을 숨기셨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런 부모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내가 빨리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거였다.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듣고는 그때부터 나의 꿈은 간호장교가 되었다. 자라면서 그 이유는 수시로 달라졌지만 결론은 언제나 집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었다. 스무 살이면 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던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국군 간호사관학교에 갈 거라고 말하고 다녔다. 학기 초, 학부모가 기본사항을 적어야 했던 생활기록부에는 어머니가 나의 장래희망을 대신 적어주셨고 매년 적어주시면서 가끔은 기특해하셨던 것도 같았다.
또래보다 키도 크고 체력도 좋았고 성적도 좋았던 나는, 반에 있는지도 모를 만큼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나서야 할 때는 나설 줄도 알았다. 반장 선거에 나갔을 때는 처음 보는 친구들 앞에서 똑 부러지게 말을 잘해서 부반장에 선출되기도 했었다.
고등학교 1학년, 국군 간호사관학교에 입학한 선배들이 입학 원서를 가지고 홍보차 모교를 방문했었다. 솔직히 어떻게 입학해야 하는지도 몰랐던 나는 그 선배들의 방문이 너무나 반가웠다. 그렇게 홍보자료와 지원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드디어 나의 오랜 꿈이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를 기다린 것은 기특하다는 부모님의 칭찬과 격려가 아닌 아버지의 주먹이었다. 여자가 군대에 가서 어쩌고 저쩌고... 상사의 노리개가 되고 어쩌고 저쩌고... 그날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 몰랐고 죄인처럼 꿇어앉아는 있었지만 그 상황을 도저히 납득할 수는 없었다.
내 꿈이 실현되는 날인 줄 알았던 그날, 내 꿈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내 마음도 함께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두 번째 길은, 고작 결혼이었다. 그 집에서 나올 수만 있다면 상대가 누구여도 상관없었다. 적당히 괜찮으면... 돈이 없으면 내가 벌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의 아이들에겐 좋은 엄마가 될 자신은 있었다. 차별하지 않을 자신, 이유 없이 때리지 않을 자신. 하지만 조급한 마음으로 결혼 상대를 찾았던 내가 처음 만난 남자는, 돈도 없고 직업도 없고 능력도 없었다. 심지어 수시로 사라지곤 했지만 그럼에도 참고 기다렸다. 습관성 거짓말과 잦은 잠수, 거기다 폭력까지 일삼는 모습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고 어머니처럼 살기 싫었던 나는 그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야 했다.
이별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쉽지는 않았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힘들게 이별을 통보하면 어느 날 불쑥 찾아와 용서를 구했고 난 그때마다 흔들렸다. 하지만 그 뒤로도 그 일은 반복되었고 그는 수시로 사라졌다. 결혼 상대를 찾고 있었던 난, 마음 정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빌고 빌어도 더 이상 받아주지 않자 작별 인사를 하겠다며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사정했다. 마지막이란 생각에 만나러 나갔다. 자꾸 어디론가 나를 이끌고 가더니 으슥한 골목 안 어느 모텔 앞에서 본색을 드러냈다. 안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으려 소리 지르자 그는 주먹을 휘둘렀고 그럼에도 난 끝까지 버텼지만 주변의 그 누구도 나를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온 힘을 다해 버텼고 드디어 그는 포기하고 사라졌다. 하지만 어디선가 숨어서 보고 있을 것 같았고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난,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그 사건은 처음 겪은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아무에게 얘기하지 못했다. 가족에겐 더 숨겨야 했다. 내가 어떻게 처신했길래 그런 일을 당했냐는 질타만 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 어머니의 입에서 그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얘기한 적 없는 그 사람을 어머니가 어떻게 알까? 게다가 한 번 데리고 오라는 어머니의 말은 충격이었다. 그 순간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끊질기게 데리고 오라고 요구하셨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기에 이미 헤어졌다고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다시 만나라고 강요하기까지 하셨고 직접 그 사람을 부르셨다.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 사람이 나타났다. 두려움에 떨던 나는 그제야 그날의 일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내 순결을 바치면 헤어져 주겠다고 했었다니까 어머니는 그제야 그 사람에게 사실 관계를 물으셨고 격노하셨다. 하지만 자식 외에는 때려본 적 없던 어머니의 손은 그 사람의 얼굴 부근에서 멈추어 버렸고 그 사람을 쫓아내기만 하셨다. 사실 그 사람이 집으로 전화를 해서 이미 따로 만났었다고 한다. 이미 같이 잔 사이인데 내가 헤어지자고 했다며 자기가 책임지겠으니 어머니가 도와주시면 결혼하겠다고 했단다. 결혼도, 독립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조급한 마음으로 하게 되는 결혼은 또 다른 지옥이 되어 버릴 것이 뻔했다.
그 뒤로도 그 사람은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나타나 여기 사장과 무슨 사이냐, 여기 직원과 사귀냐... 등등 충격적인 발언을 쏟아냈고 정상적으로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옮기는 곳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그 사람이 잠수를 탈 때마다 다독여 주시던 그 남자의 어머니에게 그 사람을 말려달라고 마지막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제는 남이 되어버린 나를 도리어 질타하셨고 잘못이 있으니 자신의 아들이 그러는 것 아니겠냐며 내 탓을 하셨다. 벼랑 끝에 내몰린 나는 더 이상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길고 긴 시간이 흘러 지금까지도 길에서 비슷한 사람만 보아도 숨을 쉬지 못하고 온몸이 얼어붙어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곤 했다.
어머니는 자식을 모두 대학에 보내고 나면 아버지와 이혼하시겠다고 항상 말씀하셨지만 세 남매가 모두 대학을 가자, 우리 모두를 결혼시키고 나면 이혼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말은 더 이상 믿을 수 없었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다.
스무네 살, 대학을 졸업하자 난 기어코 독립을 했다.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입학한 것도 아니었고 결혼을 한 것도 아니었다. 서울에 취업이 되었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부모님은 분명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쩐 일인지 어머니는 알았다며 여행용 캐리어를 사주셨고 아버지도 설득해 주셨다. 대학 엠티도 보내주지 않으셨던 분들이 나의 갑작스러운 상경은 어떻게 허락한 건지 내내 궁금했었다. 대기업에 입사라도 해야 간신히 보내주셨을 분들이 도대체 왜?
몇 년 뒤 어머니께 여쭈어 봤었다. 이유 없이 맞아도 대들지도 못하고 고분 하기만 하던 딸이 어느 날 갑자기 서울에 가겠다고 하니 어이가 없으셨단다. 그래서 난생처음 점을 보러 가셨는데 그 점쟁이가 무조건 보내주라고 했단다. 가만 놔두면 어차피 한 달 안으로 돌아올 아이니까 괜히 힘 빼지 말고 보내주라고 했단다. 스스로 돌아와야 헛된 꿈을 꾸지 않을 거라고 말해 주었던 그 엉터리 점쟁이에게 두고두고 감사했다. 점쟁이도 몰랐던 건 그때 난 이미 한차례 자살 시도를 한 후였고 죽기를 각오한 나에게 더 이상 무서울 것은 없었다.
스무 살 되던 해였다. 시작은 충동적인 마음에서였지만 더 이상 미련도 아쉬움도 없었다. 그래서 주변정리를 하고 혼자 조용히 죽으려고 커터로 손목을 그었다. 드라마에서는 그렇게 쉽게 그어졌지만 내 피부는, 상처만 났을 뿐이었다. 내 혈관이 강한 건지... 칼이 약한 건지... 어쩌면 용기가 부족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평소에는 그렇게도 눈에 잘 띄던 혈관이 칼만 가져다 대면 사라져 버렸다. 칼날은 혈관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피부만 간신히 잘라냈다. 이왕 각오한 일이라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시도해 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런 내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우아하게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그 일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포기하게 만들었다. 결국 죽는 것도 성공하지 못한 나는 그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웃었던 것 같다. 독한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어이없게 끝나 버린 그날을 꼭 기억하고 싶었던 나는 내 귀를 뚫기로 했다. 두통에 효과가 있다는 헛소문을 들은 엄마가 동네 미용실에 데리고 가서 이미 귀를 뚫어준 전력이 있었기에 두렵지는 않았다. 그저 작은 고통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칼보다 뾰족한 귀걸이가 피부를 뚫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하지만 절반쯤 뚫고는 왠지 모를 구토와 함께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아픈 걸 느낄 겨를도 없이 정신은 아득히 멀어졌고 끝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리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귀를 잘못 뚫어서 시력을 잃었다는 그 헛소문이 사실일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다시 용기를 내어 반쯤 꽂혀있는 귀걸이를 깊숙이 쑤셔 넣었다. 다시 울렁거림이 있었지만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귀 뚫기에 성공했다. 너덜 해진 귀는 지금도 그 흉터가 아직 남아있다. 그날은 한글날이었고 공휴일이었기에 매년 한글날이 되면 그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프지만 한심했던 그날의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 공휴일 지정이 취소되면서 여느 날의 평범한 하루가 되었고 시간이 흘러 다시 공휴일로 지정되었지만 더 이상 그렇게 아프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때 희망은 없었지만 사는 것만큼 죽는 것도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당분간 살아보기로 했던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집에서 도망쳐 나오는 것뿐이었고 이제는 그 사람에게서도 도망을 쳐야 했기에 내가 생각해 낸 마지막 방법은 먼 곳으로 취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먼 곳은 서울이었다.
서울에 살고 있는 대학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취직할 곳이 있는지 물었고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전화로 확인하곤 했다. 한 번은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가기도 전에 그 면접은 다른 이에게 기회가 돌아갔다. 서울에 거주하고 있어야 기회가 있을 때 바로 면접을 볼 수 있다는 선배의 조언에 따라 무작정 서울로 가기로 결심했고 부모님에겐 취직되었다는 거짓말을 했다.
당연히 부모님은 어떠한 지원도 해주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릴 때부터 독립을 위해 차곡 모아 온 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족 외식 때 빠지는 대신 받았던 몇백 원, 명절 때마다 친척들에게 받은 몇천 원 그리고 알바로 조금씩 모아 온 몇십만 원은 한 푼도 빠뜨리지 않고 모조리 저금을 했었다. 이제 거금 오백 만원이 들어있는 통장이 나의 전재산이자 목숨 줄이었다. 그 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난 그렇게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