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사고 싶은 것'이 아닌 '살고 싶은 곳'이어야 한다.
영혼을 끌어모은 보금자리
집도 직장도 없이 무작정 온 서울은 낯선 곳이었다. 하지만 서울역은 고등학교 때 한번 왔던 기억이 뒤늦게 생각났다.
반 친구 중에 연예인이 되고 싶어 했던 친구가 있었다. 얼굴은 예뻤지만 키가 작았던 친구는 키가 컸던 나를 부러워했고 우린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서울에 오디션을 보러 가겠단다. 하지만 서울이 처음이었던 친구도 혼자서는 겁이 났던 모양이다. 나에게 같이 가자고 했지만 겁이 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둘이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일단 돌아오는 기차표를 사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예매 시스템이 없어서 현장에서만 표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일요일이라 모든 표가 매진이란 소리에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허락을 받고 서울에 온 것이 아니었기에 늦기 전에 집에 들어가야 했던 나는 불안해졌다. 돌아가는 것이 우선이었던 나, 일단 오디션을 보고 생각하자는 친구. 우린 그렇게 실랑이를 하게 되었다. 그때였다. 한 시간 후에 돌아갈 수 있는 취소된 표가 있다는 직원의 말에 나는 그 기차를 타기로 했다. 하지만 서울까지 와서 오디션을 포기할 수 없었던 친구는 강남으로 갔고 난 혼자서 돌아왔다.
그게 나의 첫 서울행이었지만 서울역 밖으로 나가보지도 못하고 돌아온 게 그 기억의 전부였다.
친구 중에 가장 먼저 결혼한 친구의 남편이 서울 사람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그의 친구들을 피로연에서 만났고 그렇게 또 하나의 인연을 만들게 되었다. 낯선 곳에서 그들의 조언은 절실했다. 생활 신문 광고를 보고 집을 구해야 한단다. 연휴 기간은 어떻게 버텼지만 연휴 마지막 날이 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보증금 삼백만 원짜리 전세 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은 개봉동 양지빌라였다. 반지하의 단칸방은 너무나 춥고 으슥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부엌으로 쓰이는 공간과 씻을 수 있는 공간을 거쳐서 방으로 이어졌다. 보일러가 고장 났다며 입주하기 전에 고쳐놓겠다는 주인. 하지만 당장 잘 곳이 필요했던 나는 가진 돈 30만 원으로 계약을 하고 적금 만기날에 은행에서 돈을 찾아 잔금을 치르기로 했다. 하지만 지인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던 난, 눈치가 너무 보여 다음날 바로 들어가 살기로 했다.
집을 구했다고 어머니께 보고하고 혼자서 춥고 어두운 그 집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이불도 없었던 나는 옷이라도 꺼내서 추위를 견뎌보려고 했지만 연휴기간 동안 여기저기 옮겨 다녔던 탓에 캐리어 열쇠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낯선 곳이어도 무섭지는 않았지만 너무 추워서 견디기 힘든 밤이었다. 밤새도록 추위와 싸우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어머니가 당장 오시겠다고 해서 다음날 서울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개봉동이니 영등포역으로 오면 되었을 텐데 서울에 오려면 무조건 서울역에서 내려야 하는 줄 알았던 나는 그렇게 어머니를 모시러 서울역으로 갔다. 어머니는 이불이며 반찬이며 짐을 한 보따리 챙겨 오셨다. 하지만 내가 계약한 집을 보시곤 잔뜩 실망하셨다. 급하게 구하느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내가 가진 돈으로는 이 정도의 집 밖에 구할 수 없었던 게 현실이었다. 집에서는 내키지 않았던 독립이라 어떠한 지원도 없었다. 적어도 어머니가 집을 구하러 함께 다녀주셨다면 천천히 여유롭게 구할 수도 있었고 든든했겠지만 나 혼자 모든 걸 해야 했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할까 봐 두려워 힘들어도 괜찮은 척해야 했다. 애초에 집을 구하는 법을 몰랐으니 부동산 중개사무소란 곳도 알지 못했다. 여기서 어떻게 살려고 하냐며 이 집에선 절대 안 된다며 다시 집을 알아보자고 하셨다. 어머니와 함께 보낸 두 번째 밤은 그나마 이불이 있어서 따뜻했지만 어머니는 고민이 많아졌고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우셨다.
아침 일찍 나가서 어딘가에 전화하고 오시더니 짐을 챙기라고 하셨다. 난 계약금 30만 원이 아까워서 못 나간다고 버텼지만 어머니가 대신 주겠다는 그 약속을 믿고 결국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노량진, 어머니도 그날 처음 보는 지인의 동생 집이었고 그 집에 나를 무작정 맡기셨다. 어머니가 챙겨 오신 반찬은 그 집 냉장고로 들어갔고 난 그 집에서 감시와 눈칫밥을 먹으며 낯선 언니와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취업은 힘들었다. 여전히 백수로 지내게 되자 그 언니와 나는 서로가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어머니가 공짜로 나를 맡기진 않았으니 목돈이 생긴 그 언니의 입장에서 당장은 좋았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자신의 언니에게 불평을 쏟아냈고 그 말을 전해 들은 어머니는 돌아오라는 전화를 계속하셨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러 2주 만에 다시 서울로 오셨다. 집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하셨지만 난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끝까지 버텼다. 그러자 어머니는 신촌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고 하숙집을 찾아 나섰다. 하숙비 한 달 치를 선입금해 줄 테니 계약기간 안에 취업을 못하면 집으로 돌아오라고 선전포고를 하셨다. 처음부터 하숙집을 찾아봤으면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독립이 처음이었던 나는 잘 알지 못했고 어머니도 굳이 알려주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대신 주겠다던 30만 원은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그 일로 인해 또 다른 오기가 생겼고 서울에서 버린 30만 원을 서울에서 다시 찾기 전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식비 포함해서 월 25만 원에 계약을 하고 노량진으로 와서 짐을 챙겨 다음날 신촌으로 갔더니 하숙집 주인은 식비 제외 25만 원이었다며 말을 바꾸어버렸다. 실랑이가 이어지다 아침저녁 포함 28만 원에 합의를 보았다.
신촌에 거주하게 되자 나의 행동반경은 광화문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들고 찾아다녔지만 다단계 회사이거나 이상한 회사뿐이었다. 마음은 조급해졌고 기한 내 취업을 못 할 경우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기에 이르렀지만 2주 만에 드디어 취업을 하게 되었다. 신촌 역에서 2호선을 타고 충정로 역에서 5호선으로 환승해서 광화문 역에 내려 직장까지 걸어 다녔다. 하지만 직장 부근에 3호선 경복궁 역이 있음을 뒤늦게 확인하곤 을지로 3가 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해서 다녔다.
어느 날 퇴근길에 신촌에 가는 직원 차를 얻어 탄 적이 있었는데 사직터널을 지나니 바로 신촌이었다. 그제야 물어보니 버스를 타면 고작 두 정거장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출근은 수월해졌지만 버스비도 아껴야 했고 하숙비 28만 원이 아까웠던 나는 경복궁 역의 경복 고시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창문 없는 방이 15만 원이었다. 침대와 책장만 있는 비좁은 고시원이었지만 불만은 없었다.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끗했기 때문이다. 고시원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이 가격이 저렴한 창문 없는 방을 선택하다 보니 창문 있는 방은 비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 창가 라인 방들을 허물고 휴게실로 만들어서 나름 기대했지만 흡연자들의 아지트가 되어버려 사용할 기회는 없었다.
고시원 생활도 두 달이 지났고 내일이면 재계약을 해야 하는 일요일 밤이었다. 다들 잠들어 있는 깊은 밤, 방문이 딸깍하고 열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작은 소리에 유난히 민감했던 나는 그 소리에 너무 놀라 눈을 떴고 어둠 속에서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남자가 내 방문을 열더니 그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좁은 방 안에 설치해 둔 빨랫줄에 속옷이 걸려 있었는데 그 손이 지나간 후에 내 속옷이 사라지고 없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잠시 후 그 남자가 다시 돌아왔고 속옷을 제자리에 올려두곤 사라졌다. 방문은 다시 잠겨있었다. 그동안 나 모르게 이런 일이 계속 있었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 없었다. 사람이 있어도 이 정도인데 아무도 없는 낮엔 자기 방처럼 뒤지고 다녔을 거라 생각하니 너무도 끔찍했다. 무엇보다 그 남자는 내 방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다시 집을 알아봐야 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던 나는 고시원엔 알리지 않았고 재계약 날짜만 조금 미루어 달라고 했다. 서둘러 집을 구하러 다녔고 다행히도 누하동에서 보증금 150만 원, 월세 15만 원인 단칸방을 얻었다. 할머니가 주인이었는데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줄 알았더니 혼자 사는 할머니 집에 아주머니 가족이 세 들어 살고 있는 거였다. 그들은 주인 할머니와 함께 본채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별채에 딸린 방 두 개를 세놓고 있었다. 욕실과 화장실은 공용이었다. 수요일에 이사 들어가기로 하고 계약을 하고 돌아오니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이사 당일이 되어서야 고시원 책임자에게 털어놓았다. 일요일 밤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나가겠다고 하니 자기가 잘 지켜보겠다며 나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 남자가 열쇠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 번이라도 그 방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지내는 동안 열쇠는 얼마든지 복제할 수 있었다. 솔직히 누구인지 모르는데 책임자가 범인이 아니란 법도 없었다.
그렇게 도망치듯 누하동으로 이사했다.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나는 성당을 찾았고 어렵게 청년 활동을 시작하면서 서울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주방이 없는 단칸방이었지만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주방이 있는 직장에서 식사를 하고 퇴근을 하면 굳이 주방이 필요하지 않았다. 쉬는 날에는 새우깡으로 끼니를 해결했고 나중에는 휴대용 버너를 구해 방 안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1년쯤 지나서 혼자 사는 아저씨 한 명이 옆방으로 이사 왔는데 은근히 신경 쓰였다. 어느 날 퇴근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꽤 긴 골목이었고 샛길이 많았음에도 그 발소리가 집 앞까지 이어지자 너무 무서워서 대문을 쾅 닫고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런데 그 사람도 대문을 열고 따라 들어왔고 내 방문을 사정없이 두드리며 소리 질렀다. 너무 놀라 불도 켜지 못하고 숨어있는데 알고 보니 뒤따라 온 사람은 옆방 아저씨였고 자기가 들어오는 걸 알고도 내가 고의로 문을 닫고 들어갔다고 격노하셨다. 한참을 고래고래 소리 지르자 보다 못한 아주머니가 나와서 대신 얘기해 주셨고 그제야 소란은 가라앉았다.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지만 그 일이 있은 후 옆방 아저씨는 술을 마신 날이면 어김없이 내 방문 앞에서 행패를 부렸다. 그렇게 또 다른 지옥이 시작되고 있었다.
중학교 동창인 친구와 연락이 닿아 가끔 연락했었는데 서울에 살고 있던 그 친구는 최근에 혜화동으로 이사를 했다고 했다. 보증금 500만 원, 월세 20만 원짜리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주방과 화장실이 딸린 집이었다. 혼자 사는 삶에 적응해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있던 때였지만 다시 불안해져서 월세를 아낄 겸 그 친구와 반반씩 부담하기로 하고 같이 살기로 했다. 교통비가 발생하더라도 월 5만 원을 아낄 수 있어서 바로 이사했지만 한 방에서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건 은근히 불편했다. 같이 출마했던 반장선거 때도 그 친구에게 투표했을 정도로 내가 정말 좋아하던 친구였다. 하지만 그녀는 서울에서 망가지고 있었고 옆에서 지켜보기 너무 힘들었다. IMF 시기라 여느 회사처럼 그녀가 다니는 출판사도 불황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월급이 반년 이상 밀려있는 상황인데도 자정 무렵에야 퇴근을 했고 아침 일찍 출근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아기 같던 그녀의 피부는 뒤늦은 여드름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안색은 갈수록 나빠졌다.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도 그런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동경의 대상이었던 그 친구의 추락하는 모습을 더 이상 옆에서 지켜볼 수 없었다.
두 달 만에 난 다시 이사하기로 결심했다. 매달 나가는 월세가 아까워서 전셋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금액에 맞추다 보니 불광동 언덕까지 찾아가게 되었는데 전세 1,400만 원에 계약한 집은, 현관은 반지하에 있었지만 산기슭 비탈길에 있는 건물이라 방 창문은 골목길 1층에 있어서 채광이 좋았다. 무엇보다 방이 컸고 거실과 주방이 별도로 있고 화장실도 있는 집이었다. 중고 냉장고는 아직 쓸만해서 큰 맘먹고 세탁기를 먼저 구입했다. 지내는 동안 가구도 사서 채우다 보니 짐은 많아졌고 다시 그 집에서 이사 나올 때는 1톤 트럭 한가득 싣고도 모자랄 정도가 되었다.
일 년 후 다시 경복궁 역으로 이사 왔는데 2층 같은 1층에 있는 분리형 원룸이었다. 전세 3,000만 원짜리 체부동 집은 작고 아담했지만 따뜻하고 아늑했다. 성당 언니가 살던 곳이라 자주 놀러 갔었는데 언니가 결혼을 하게 되면서 내가 바로 이어받기로 했었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그 집으로 이사하고 나서 난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00만 원을 기부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오래 살게 될 줄 알았다. 찾아오는 친구들을 위해 에어컨을 설치했고 그동안 쓰던 중고 냉장고를 버리고 새 냉장고를 구입했다. 여기서 반려견도 키우고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며 추억을 많이 쌓았다.
30만 원을 벌기 전엔 절대 서울을 떠날 수 없었던 나는 서울의 첫 번째 직장에서 6년을 근무하게 되었다. 전시회가 있을 때면 주말에도 쉬지 못하다 보니 친구들을 만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나도 남들처럼 평일에만 일하고 싶었다.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는 게 부러웠던 나는 이직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결정은 지금까지도 후회하게 되었다.
새 직장은 도곡동인데 체부동에서의 출퇴근이 힘들었다. 여러 가지 일들로 상처를 받은 후라 새롭게 출발하고 싶었던 나는 그곳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던 중 3년째 되던 어느 날, 집주인이 찾아와서 월세로 전환하려고 한다며 집을 비워달라고 하는데 그럴 사람이 아닌데 왠지 내 눈치를 보는 게 이상했다. 나는 계약기간 도중에 임대인의 사정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 이사비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순순히 집을 비워주었는데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3년 2개월을 살았던 그 집을 떠나 이사를 한 후였다.
강남에서 전셋집 구하기는 너무 힘들었다. 직장에서 멀기는 해도 간신히 구한 6,400만 원짜리 전셋집은 서초동에 있었다. 주택가에 있는 집이었는데 1층과 2층의 원룸은 세를 주고 집주인은 3층에 살고 있었다. 에어컨은 이전 설치했지만 벽에 구멍을 뚫을 수 없어 실외기를 베란다에 두고 문을 빼꼼 열어두었더니 더운 열기가 고스란히 방 안으로 들어와서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2층 같은 1층이라 하늘이 보이긴 해도 옆 건물에 가려져 침대에 누워야 간신히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오래된 그 집은 무언가 수시로 고장이 났고 불편했다. 그 사이 회사는 양재동으로 이전했고 전세기간이 만료되면 직장 근처로 이사하려고 했는데 우아한 척 뽐내던 집주인 아주머니는 돈이 없다며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대신 이사 나갈 때까지 공용 전기요금과 수도요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게 강제로 4년 가까이 살게 되었는데 그사이 회사는 교대역으로 이전하게 되어 회사까지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돈이 궁했던 집주인은 월세로 전환하겠다고 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전세보증금을 돌려줄 테니 같이 은행에 가서 확인서를 써달라고 했다. 세입자의 인감이 필요하다고 하여 난 그때 처음으로 인감을 만들고 인감 증명서를 발급받아 은행에 따라갔다. 덕분에 대출을 신청할 수 있었던 집주인은 고맙다며 저녁을 사주셨다.
출근할 때마다 지나쳤던 엘리트빌딩 4층의 오피스텔을 전세 8,000만 원에 계약하기로 했고 이사 날짜가 한 달 후인 1월 초라 혹시나 싶어 집주인의 허락을 받으려고 연락하니 괜찮다며 계약금으로 미리 600만 원을 입금해 주셨다. 다음날 바로 계약하러 갔다. 하지만 하루 사이 전세보증금은 9,000만 원이 되어있었다. 고민이 되었지만 관리인이 있는 건물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무리해서라도 계약하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계약하고 나자 집주인은 월세로 들어올 새로운 세입자가 12월 중순에 들어오기로 했다며 그 날짜에 맞추어서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이제 와서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항의해 봤지만 싫으면 이사 나가지 말고 계속 여기서 살라며 되려 큰소리를 쳤다. 이사 갈 곳도 다들 이사날짜가 정해져 있는 상태라 그냥 내가 희생하기로 했다. 가구는 이사 갈 집 복도에 양해를 구해 미리 옮겨두고 박스들은 회사 창고에 보관하기로 했다. 이사 나오게 되자 집주인은 안 받겠다던 공용 전기요금과 수도요금 정산서를 내밀며 자기가 미납한 연체료도 내가 내야 한다며 몇십만 원의 돈을 제하고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었다. 대출이다 뭐다 빠듯했던 내 계산에 또다시 차질이 생겨버렸다. 그 집을 나와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초를 집 없는 신세로 지내게 되었지만 불행 중 다행히 연휴가 많아서 회사에서 지내기로 했다.
2주간을 떠돌다 새 집으로 이사 갔다. 새 건물이라 마음에 들었다. 옷장도 사고 책상도 사고 책장도 샀다. 하지만 겨울에 이사를 해서 몰랐는데 여름이 되자 모기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벌레에 물린 곳은 알레르기 반응으로 염증이 생겨서 더운 걸 참아가며 창이란 창은 모두 닫고 단속해 봤지만 모기는 어디론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작은 소리에 예민했던 나는 모기소리가 들리는 날이면 밤새 잠을 잘 수 없었다. 관리비라는 것이 있는 것도 부담이었다.
그렇게 그 집에서 2년을 살았는데 그사이 회사는 구로디지털 단지로 이전하게 되었고 아침저녁으로 지옥의 2호선을 타고 출퇴근을 해야 해서 다시 집을 알아보고 있었다. 부동산 중개사무소에서 전세 매물을 구하기 어렵다고 대신 아파트를 소개해 주었다. 소형 아파트 전세가 1억 2천만 원이라 애초에 아파트는 꿈도 꾸지 않았지만 구경만 할 요량으로 집을 보러 갔다가 그대로 반해버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좌로 주방이 있고 우측으로 방 하나, 화장실이 있고 안쪽으로 큰 통창이 있는 거실이 있었는데 미닫이 문이 있어서 방으로 쓸 수 있었다. 이상적인 구조라 무리해서라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에게 은행 대출은 문턱이 너무 높았다. 갚을 자신은 있었지만 전세자금 대출은 신청 조건이 너무 까다로웠다. 아니 너무 불합리했다. 여자가 전세 자금 대출을 받으려면 남편이 있어야 하거나 만 35세 이상인 경우에만 대출 신청이 가능하단다. 그래서 그동안 신청 한번 해 본 적이 없었다. 만기 전에 적금을 해약하기 힘든 경우에는 적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이번에도 그렇게 계약을 하기로 했다. 이사 비용을 줄이려 냉장고, 세탁기, 옷장, 책상, 책장 등은 모두 넘기고 이사하기로 했다.
아파트로 이사하는 날, 경비 아저씨가 사다리차를 안 쓰면 승강기 사용료를 내야 한다고 했다.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서 하는 이사라 8만 원은 꽤 큰 부담이었다. 대부분의 가전을 두고 나와서 용달차에는 옷 박스, 책 박스 몇 개만 실려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사다리차를 불렀다. 베란다 확장 공사를 마친 집에 김치냉장고가 옵션이라 냉장고는 따로 사지 않았다.
1년 반쯤 살았을 때 집주인에게 연락이 왔다. 결혼하는 아들이 들어와 살 거라며 계약 기간은 남아있었지만 만기 전에 집을 비워달란다. 이제는 알게 된, 이사 비용이란 것을 요청하니 선뜻 주겠다고 했다. 이사 나오면 또 승강기 사용료를 지불해야 해서 같은 동으로 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파트 단지에서 108 동만이 단층의 주택이 펼쳐진 남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살았던 8층은 높은 지대의 초등학교 건물에 가려져 지평선을 보기엔 어려웠지만 10층 정도만 되어도 몇 km 밖의 지평선이 보일 정도였다. 고층으로 알아보고 있는데 어디서나 전세 매물은 구하기 어려웠다. 이미 아파트 생활을 해봤던 터라 일반 주택은 왠지 낯설었다. 결국 길 건너 다른 아파트의 전세 매물을 보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비어있는 집이라 깨끗했지만 20평대라 고민이 되어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했지만 내일 계약하기로 이미 마음을 먹은 참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존 부동산에 들렀더니 방금 막 12층에 전세 매물이 나왔다고 알려주었다. 원하던 확장형은 아니었지만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니라 바로 계약했다. 그사이 그 아파트 전세 보증금은 1억 4천만 원이 되어있었다.
이번에는 층에서 층으로의 이사에다 큰 짐이 없는 상태라 친구를 불러서 짐을 옮기기로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승강기 사용료를 내야 한단다. 다행히도 8층에서 12층의 이사라 절반만 내면 되었다. 8층에선 아파트 1층의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울림이 되어 들렸고 학교의 소음도 들렸었는데 12층에선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뻥 뚫린 풍경이 너무 좋았다. 그러나 이 집은 식기세척기가 옵션이라 냉장고를 사야 했다. 전에 살던 세입자의 가구들이 빠지자 마룻바닥에 젖은 듯한 얼룩이 곳곳에 있어서 이상했지만 몇 달 동안 별문제 없이 잘 살았다.
그러나 겨울이 되자 문제가 생겼다. 현관문에 결로가 생기면서 한 방울씩 물이 뚝뚝 떨어지더니 날씨가 추워지자 더 심해져 현관문 앞엔 항상 물이 첨벙거렸다. 겨울마다 가습기 없이는 살 수 없었던 악건성이었던 나는 피부는 좋아졌지만 스트레스는 날로 심해져 갔다. 건설사에서 나와 갖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정답은 찾지 못했고 결국 제습기 한대를 설치해 주고는 가버렸다. 여름에는 환기라도 시킬 수 있었지만 겨울에는 그마저도 힘들었다.
그때 가습기 메이트가 유행이라 건강을 위해서 꼭 사용하려고 했는데 물난리를 겪으면서 가습기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많은 이들이 이유도 모르고 죽어갔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다는 것을. 결로 덕분에 살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습도가 높아지니 전기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전등도 고장 나고 인터폰도 고장 나 버렸다. 또 뭐가 고장 날지 알 수 없어 그 집에서 사는 내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전세 만기가 되면 이사 나오기 위해 그때부터 부동산에 매물을 요청해 두었다. 하지만 전세 만기가 되도록 매물을 구하지 못했고 그사이 전세는 3,000만 원이 오른 상태였다. 돈은 지불할 테니 일단 3개월만 연장하고 그래도 이사 못하게 되면 2년 연장하기로 했다. 그리고 극적으로 딱 3개월 후, 15층에 전세 매물이 나왔다. 전세가 없으면 매매도 가능하다고 했지만 부동산 아저씨는 수수료를 더 챙기기 위해 월세를 놓으려는 사람에게 매매를 주선했다. 그 사람이 돈이 부족하다고 하니 우선 전세 끼고 매매하라고 했고 그 집을 나에게 전세 놓은 것이었다. 어차피 2년 후에는 집을 비워주어야 했다. 집주인은 3개월 만에 이사 나가는 거니 수수료는 내가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많은 일을 겪으면서 이사했고 이후 건강이 나빠져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108동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홀수 라인이었기에 매매를 놓친 것이 너무도 아쉬웠다. 하지만 그 집에서 사는 동안 입원과 요양 그리고 여행 등으로 집을 비운 날이 더 많았다.
2년이 지나고 집을 비워주어야 하는 시기가 왔다. 하지만 집주인의 연락이 없어 2년 더 자동 연장하나 보다 싶어 속으로 좋아했다. 하지만 만기 두 달을 앞두고 연락이 왔고 월세로 전환할 거라며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석 달도 아니고 지금 통보하면 어떡하냐고 항의해 봤지만 부동산에서도 지금이 적절하다고 했단다. 2년 전, 이 집을 계약하면서 부동산에다 미리 매물을 알아봐 달라고 요청했고 2년이 지나도록 찾지 못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부동산에서 그렇게 말했다니 너무도 야속했다. 두 달 안에 이사할 집은 절대 구할 수 없었다. 이사가 지긋하던 난 본격적으로 매매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직장도 없으니 내가 원하는 지역에 정착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엄청나게 집값이 치솟은 그곳은 강남만큼이나 문턱이 높았고 가진 돈에 맞추다 보니 서울 전 지역을 매일같이 돌아다녀야 했다.
분양 중개인을 만나서 여러 곳을 다니다 목동 쪽으로 알아보게 되었고 결국 신축 빌라를 매매했다. 하루 종일, 매일 같이 돌아다닌 덕분에 한 달 만에 계약을 하긴 했지만 나에게 그 한 달은 길고 길게만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첫 입주인 빌라는 비어있는 상태였지만 전세 만기에 맞추어서 이사 날짜를 잡았다. 그리고 집주인에게 통보했더니 집주인이 당황을 했고 횡설수설했다. 사실은 아직 돈이 모자란 상황이라 2년 후에 월세 전환을 하려고 했는데 부동산에서 먼저 연락이 와서 지금 통보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내가 기한 내에 집을 구하지 못할 것이고 혹시라도 집을 구해서 나가는 상황이 되면 부동산에서 돈을 융통해 주겠다고 했단다. 내가 기한 내 이사를 못하게 되면 나한테는 편의를 봐주는 척 수수료라도 챙길 요량이었던 셈인데 몇 년을 거래했던 부동산의 꼼수에 마음이 상했다. 이사하는 날 잔금을 받기 위해 부동산에 갔더니 부동산 아저씨가 어떻게 이사 갈 집을 빨리 구했냐고 물었다.
"저, 집 샀어요!"
12년을 다닌 직장의 절반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구로디지털 단지를 미련 없이 떠나왔다.
나의 계약 덕분에 두둑한 수수료를 챙긴 분양 중개인이 소형 트럭을 지원해 주겠단다. 많은 것을 줄이고 가진 것이 별로 없어서 정말 필요 없을 줄 알았지만 미리 예약해 두었던 1톤 트럭은 어느새 가득 찼고 분양 중개인의 소형 트럭에도 가득 싣고 목동 새 집으로 이사했다.
일단 짐을 옮겨 작은방에 몰아넣고 다시 집을 나서야 했다. 셀프 명의 이전을 하기 위해서다. 계약 당시 미리 서류를 요청해 둔 상태였지만 잔금을 치르러 가니 서류는 누락되어 있었다. 자기네 법무사에 위임할 때 필요한 서류로만 챙겨주었고 심지어 집에 걸려있는 대출이 납부되지 않아 담보가 아직 해제되어 있지 않았다. 잔금을 치르면 바로 해제시킬 수 있다고 했으나 잔금으로 대출을 갚고 등기를 해제하는 거라 애초에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다. 날짜에 민감한 내가, 생애 처음으로 집을 가지는 날이라 굳이 12월 1일로 날짜를 맞춘 거였는데 서류도 누락되었고 대출 변제와 확인까지 꼬박 하루가 걸렸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명의 이전 신청을 할 수 있었고 일주일 후, 드디어 내 명의의 집이 되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의무도 생겨났다.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집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집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전셋집을 구하지 못한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집을 사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은 잘한 결정이었다고 믿고 있다. 자의든 타의든 살기 힘든 곳이 아니라면 가급적 이사는 안 하는 편이 좋았다. 이사 비용도 생각해야 했다. 몇백만 원씩 하는 포장 이사조차 전문가의 도움에는 한계가 있어서 난 지금까지 줄곧 직접 포장했고 운반만 도움받는 용달 이사만을 이용했다. 그래서 이사하기 몇 달 전부터 이사한 몇 달 후까지 계속 정리를 해야 했다. 이사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혼자만의 이사는 너무나 힘들었다.
6년 동안 살았던 아파트에 익숙해졌는지 빌라로 이사오니 그동안 누렸던 여러 가지 당연한 일상에서도 제약을 받게 되었다. 정해진 날에만 생활 쓰레기를 내다 버릴 수 있다는 점도 그랬다.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으니 어느새 적응했고 지금은 그다지 큰 불편은 없다.
물론 지금도 어머니는 그때 왜 아파트를 사지 않았냐며 질책하시곤 한다. 하지만 가격이 오르는 아파트는 나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팔고 차액이 있어야 이득인 거지, 나처럼 팔지 않을 거면 가격이 오른다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더구나 앞으로도 계속 수입이 없으면 매달 지출되는 부분을 신경 써야 했다. 소형 아파트라 그나마 관리비가 적긴 했지만 그마저도 해마다 오르고 있어서 나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몇 년 살다 보니 서울에 집 하나 있다고 각종 혜택에서 역차별을 받는 경우가 생겼다. 그 부분도 억울했지만 세금과 지역 건강 보험료 부담에 집을 팔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전셋집 구하기는 여전히 어려웠고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아파트 가격만 오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세 가격과 매매 가격이 동일한 빌라는 전세 수요에 따라 집값도 오르고 있었다. 어렵게 고르고 고른 집을 팔아서 시세 차액을 챙기기는 싫었다. 난 단지 살기 위한 집이 필요했을 뿐이다. 더구나 비혼이자 무직인 나에게 작은 집조차 없다면 그나마 남아있던 자존감은 어쩜 아예 사라질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불편함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나에게 안전한 집이다. 집을 보면 사람이 보인다는데, 나 때문에 소중한 내 집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려서부터 난 누구의 눈치도 받지 않고,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제대로 된 내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공간을 얻기 위해 내 힘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다.
어쩜 내 인생에서 서울에서의 내 집 마련이 가장 쉬웠는지도 모른다. 사고 싶은 것 사고, 먹고 싶은 것 먹어가면서는 결코 이룰 수 없겠지만 절실함이 있으면 누구든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