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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35

늘 혼자라는 느낌에 시달리고 버려진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얼까?

by 안녕
나는 왜 다른 아이처럼 해맑게 웃지 못했을까?
나는 왜 항상 가슴이 두근댈까?
나는 왜 늘 불안하지?




나는 억울한 상황이 생겨도 나를 위한 변명은커녕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던 조용한 아이였다. 그저 말없이 기다리면 나중에라도 진실을 알아줄 거라 믿었다. 어쩌면 누군가 나를 대신해서 이야기해 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나에게 질문을 하면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아무리 간단한 질문이라도 이렇게 말하면 이런 아이라고 판단할 것 같았고 저렇게 말하면 저런 아이라고 생각할까 봐 무서웠던 것 같다. 어떤 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기다리다 지친 상대는 다음 질문을 던져버려 나를 리셋시켜 버렸다. 그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나는 말없는 아이가 되어있었고 상대는 대답 없는 나를 못마땅해하며 자리를 떠나버렸다. 내가 답을 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이는 없었고 끈기 있게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이도 없었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른들은 다 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만이 있어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른들이 먼저 알아줄 거라 생각했지만 어른들은 그저 나를 이상한 성격의 아이로 몰아붙였다.

초등학생 때 생활기록부에는 '내성적인 아이'라는 글이 항상 적혀있었다. 여자는 얌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그게 무얼 뜻하는지 아무도 관심 없었다. 낯을 가리는 탓에 먼저 나서서 무언가를 하는 아이가 아니었으니 어쩌면 선생님은 내가 어떤 아이인지 기억나지 않아서 그렇게 적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나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뒤늦게 현실 자각을 하고 성격 변화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밝고 씩씩할 때 만난 친구들은 나를 활달한 아이로 기억했고 어둡고 수줍은 성격일 때 만난 친구들은 그저 나를 조용한 아이로 기억했다. 커서 그들을 만났을 때 신기하게도 그들이 기억하는 그때의 나로 돌아갔었다.

각각의 성격일 때 만났던 그 친구들이 우연히 한자리에 모인 적이 있었다. 친구들은 각자 기억하는 내가 진짜 모습이라고 주장했다. 얌전한 아이로 생각했던 친구는 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 두두두둑 총소리를 내고 바닥을 뒹굴면서, 람보 흉내를 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반면 그 모습을 지켜보았던 친구들은 내가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조용한 아이라는 걸 믿지 못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차별은 눈에 도드라졌다. 아무리 시험 성적이 좋아도 난 등수 안에 들지 않았다. 처음엔 다들 나보다 잘한 거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선생님의 등수에 들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선생님이 대놓고 편애하는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 중 과목별 시험을 망친 친구가 있었는데 시험 점수가 매번 나보다 나쁜 걸 확인했는데도 그들의 등수는 늘 변함이 없었다.

교복 자율화와 함께 헤어스타일도 자유가 되면서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엔 머리카락을 기르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6학년 초반까지는 어머니가 내 머리카락을 단발로 자르거나 아님 미용실에 데리고 가서 숏 커트로 잘라버리셨다. 나는 언제나 그게 불만이었지만 어머니의 뜻에 순종했다. '머리빨'을 보겠다는 이유가 아니었다. 곱슬기가 있었던 탓에 묶을 수 있는 긴 머리카락이 관리하기 훨씬 편했지만 어머니는 머리카락이 긴 여자를 극도로 싫어하셨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후반이 되면서 머리카락 자르기를 거부했고 긴 생머리로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머리카락이 내 어깨선을 내려왔었다.

내가 진학한 중학교는 배구로 유명한 학교였다. 중학교에서 배구선수가 되는 학생들은 바로 옆 고등학교로 자연스레 진학했다. 입학과 동시에 키가 큰 학생들은 모두 차출되었다. 그러나 배구 코치는 내 긴 머리카락을 보더니 그냥 가라고 했고 짧은 헤어 스타일의 학생들만 남게 했다. 그때 내가 여전히 어머니의 뜻대로 머리카락을 기르지 않았다면 나는 배구선수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했지만 친한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 다른 학교로 갔고 처음 보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던 나는 중학교에서는 다른 친구들처럼 해맑은 아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내가 먼저 다가가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변하기로 했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밝은 척, 친구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친구들이 많이 생겼고 나도 예전보다 많이 밝아졌다.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좋은 분이셨다. 잘못을 하면 지적하고 잘하면 칭찬하는 그런 선생님이셨다. 학생들이 잘못을 해도 절대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으셨다. 손바닥 몇 대 등 정해진 룰에 따라서만 체벌하셨다. 담임 선생님의 주관적 판단이 아닌 오로지 시험 성적으로 평가를 받게 되자 나는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객관적인 평가로 나는 등수 안에 들었고 어머니의 기대감이 높아졌다.

중학교에는 좋은 선생님만 계신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2학년으로 올라가자 도덕 선생님이 담임이 되었는데 학생들을 감정적으로 대하는 걸로 이미 유명한 분이셨다. 여학생들의 따귀는 물론 발로 차기 일쑤였고 쓰러지면 밟아대는 아주 무서운 분이셨다. 그 선생님은 유혈이 낭자하는 체벌을 수시로 즐기셨고 그렇게 힘을 쓰고 나면 피곤하다고 자율학습을 시키셨다.

1학년 반장 선거 때는 5등까지 후보에 올랐고 득표수 1위가 반장, 2위가 부반장이 되었다. 하지만 2학년 때부터는 1위가 반장, 2위는 학습 부반장, 3위는 생활 부반장을 뽑게 되면서 6등까지 후보에 오르게 되었다. 1학년 성적을 기준으로 6등이었던 모양인지 내 이름도 반장 선거에 후보로 호명되었다.

선생님은 후보 여섯 명에게 '내가 만약 반장이 되면~'을 시키셨다. 원래대로라면 온몸으로 '저는 하기 싫어요'라고 인사만 하고 들어왔겠지만 그때는 용기가 생겼다.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았던 오빠는 늘 임원이 되었다. 그래서 수시로 학교에 불려 가야 했던 어머니는 귀찮다고 하시면서도 은근히 좋아하셨고 주변에 자랑하고 다니셨다. 임원을 못해서 어머니가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으니 나도 용기를 내어보기로 했고 반장선거에 최선을 다했다.

결과는 1학년 때 반장이었던, 나조차도 좋아하는 예쁘고 착한 친구가 반장이 되었고 나는 서너 표차로 2위가 되었다. 반장이 된 그 친구가 같은 반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내가 반장이 될 수도 있을 득표차였다. 처음 보는 친구들이 나를 뽑아주었으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나는 득표수로는 학습 부반장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은 나와 열 표 이상 차이가 나서 3위였던 친구를 갑자기 학습 부반장으로 밀어붙이셨다. 선거 시작 전에 하셨던 말씀을 스스로 뒤집으면서 원래 2위가 생활 부반장을 하는 거라고 우기셨다. 선생님은 하늘이었으므로 말씀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 친구가 성적순으로 2등이었는데 6등이 2위가 되었으니 싫으셨던 모양이다. 내가 만약 1위라도 했으면 큰일 날뻔한 상황이었다. 다른 반들은 2위가 모두 학습 부반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부반장이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활 부반장은 수업 시작 전에 '차렷, 선생님께 경례!' 인사를 도맡았다. 덕분에 다른 교과 선생님들은 나를 기억하셨고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선생님들의 그런 관심은 처음이었다.

학습 부반장이 된 친구는 반장보다 담임 선생님을 더 잘 따랐다. 선생님은 나에게 교실 내에서 잡다한 것들만 시켰고 임원이어야 받을 수 있었던 학습 자료는 오로지 학습 부반장에게만 몰래 챙겨주셨다. 학생에 대한 차별은 눈에 띄었고 선생님의 편애는 사라지지 않았다.

큰 키로 인해 항상 1번이었는데 심지어 배구선수가 된 친구들보다도 더 컸다. 키 순서로 자리를 배정해서 맨 뒷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배구선수가 된 친구들이 나의 짝꿍이 되거나 주변에 있었다. 그들은 평소 훈련에만 매진했고 수업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시험 때만 교실에 들어왔던 그들이 왠지 부럽기도 하고 짠하기도 해서 쉬는 시간에 핵심 포인트를 알려주었더니 매번 60등 안에 들지 못하던 그들이 중간 등수를 하게 되었다. 그 후 그들은 나를 족집게 과외 선생님이라 부르며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시험 때마다 나에게 달려오는 그들이 좋았다. 나중에 보니 그들은 유명한 배구선수가 되어있었다. TV에서 자주 보게 되니 반갑고 자랑스러웠다.

주변에는 일탈을 꿈꾸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오락실이나 만화방 등 학교에서 가지 말라고 하는 곳에는 가지 않았다. 오락실은 성인이 되어 처음 발을 디뎌봤을 정도였고 만화방과 롤러스케이트 장이란 곳엔 아직도 가보지 못했다. 주말에 남학교 학생들과 함께 롤러스케이트장에 갔다 왔다며 연애 이야기를 들려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나로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일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가 너무도 재미났다. 그 친구들은 도리어 내가 신기했는지 월요일마다 주말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러다 보니 친해져 버렸다. 그들은 일명 일진이었지만 반 학생들을 괴롭힌다든가, 아는 친구들에게 해를 가하는 친구는 아니었다. 그저 외롭고 공부가 따분한 친구들이어서 그들끼리 어울렸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청소년 위해 시설인 롤러스케이트 장에 간 일이 학교에 알려졌다. 선생님은 그 학생들을 교실 앞으로 불러내었고 많은 학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주먹을 쓰고 발로 차고 그들이 넘어지면 짓밟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맞고만 있었다. 선생님이 힘을 다 쓰고 나면 폭력은 멈추었고 그들을 자리로 돌려보냈다. 그 후 그들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냥 놀고 싶었던 아이들이었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작 열다섯 살이었던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무자비한 선생님을 만나 학업을 포기하게 되었다. 2학년 담임 선생님은 나중에 남자 중학교로 전근 가셨는데 하필 그곳이 남동생이 다니는 학교라 그 후로도 소식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더 심한 폭력을 휘두르고 계시다고 했다.

3학년이 되니 '부반장씩이나 했던 아이가 성적이 이게 뭐냐'는 꼬리표가 따라붙으며 질타를 받았고 나는 점점 작아졌다. 그런 나는 주눅이 들었고 다시 나의 성격으로 돌아갔다. 2학년 담임 선생님이 지극히 평범한 분이셨으면 어쩌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부반장이란 감투를 쓰고도 선생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자 나조차도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공부를 잘했다는 사실이 부모님의 기대감을 너무 높였고 결국 그 기대감 때문에 부모님은 나의 오랜 꿈을 꺾어버리셨다. 공부를 못했더라면 포기하는 마음으로 사관학교에 보내주었을지도 모른다.

애써 잊으며 지냈는데 몇 년 전, 어머니의 말에 또 한 번 상처를 받았다.

"간호장교라는 게 나라에서 학비를 대주고 기숙사도 공짜였다며?"

"네."

"그럼 진작 말하지!!!"

사관학교 입학원서를 열어나 보셨으면, 홍보 자료를 읽어보시기라도 했으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선입견에 빠져있던 부모님은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차라리 경제적인 이유라는 핑계를 대셨으면 내가 설득이라도 했겠지만 그때는 다른 이유를 들먹이며 막무가내로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다 집을 지으면서 40년 넘게 방치된 집안 살림살이들을 모두 꺼내서 정리하시다가 내가 애지중지 숨겨놓았던 그 원서 봉투를 발견하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나는 여러 번 성격 변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그런다고 내 삶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나를 지칭하는 말은 많았지만 그런다고 내가 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삶이 힘들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한테서 문제를 찾는 게 괴로워서 그냥 주변에서 찾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내 주변에 상처 주는 사람만 있다는 것이 힘들어서 그냥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이, 잘 되어서는 안 되는 그들이 잘 지낸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배가 아프기도 했다. 미워질 것 같으면 속으로 빌었지만 또 못 지낸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게 또 마음이 아파서 잘 되길 빌기도 했다.

무사히 살아내기 위해 난 그때마다 목표를 만들었다.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솔깃한 제안을 하면서 이 삶을 간신히 붙들고 있다 보면 오늘을 위해 살았구나 싶은 날이 올 줄 알았다. 그래서 '이게 인생이지, 이게 사는 거지.' 그런 말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문득... 지금까지 기회가 없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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