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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an 04. 2023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53

스스로 만족한다면 가득 채우지 않아도 된다.

이제부터 난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될 줄 알았다.




한국을 떠나 먼 나라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연말을 거쳐 새해를 맞이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고 낭만적인 상황은 없었지만 이것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최선임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뚜렷해지는 건 추억으로 덧칠하기 때문이다. 좋은 기억은 더 아름답게 칠해지고, 후회되는 기억은 가슴에 돌처럼 내려앉아 있다.'

혹시라도 후회하는 게 있다면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야 한다는 누군가의 외침처럼, 나도 매번 용기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행 전, 잠시라도 무료함을 달래려 수많은 영화를 보았다. 그중에 '언팔로우'라는 영화가 있었다.

운동을 가르치는 유튜버인 조애나에게는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업계에서는 꽤 유능했지만 사람의 감정을 읽는 장치를 개발하는 그런 일에 몰두하는 엉뚱한 면이 있었다. 그녀는 그런 게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싫은 건 아니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녀는 결국 남자 친구와 헤어지기로 했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남자 친구는 상처를 입었는지 아님 깨끗하게 마음을 접었는지 연락조차 없어서 조애나는 내심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누군가로부터의 스토킹이 시작되었다. 몇 번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겼지만 그 스토커는 점점 수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조애나는 자신의 계정이 해킹당하여 구독자들이 자신을 오해하는 일이 생기자 뒤늦게 신고를 했지만 경찰은 아직 심각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그저 방관하고만 있었다. 이런 일은 보통 가까웠던 사람 즉, 전 남자친구가 범인일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지만 그녀는 전 남자 친구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옹호하기까지 한다.

무분별한 스토킹으로 인해 실직까지 당하게 되지만 경찰을 믿고 기다릴 수 없게 된 그녀는 급기야 IT 관련 일을 하던 전 남자친구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한다. 하지만 전 남자친구는 그녀를 돕는 척하며 그녀의 지인들을 멀어지게 만들었고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종용했다. 그동안 그녀를 괴롭히던 스토커의 정체는 바로 헤어진 전 남자 친구였고, 그는 사람의 감정을 읽을 줄 모르는 사이코패스였다. 그 남자는 자신을 떠난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이야기보다는 다른 이의 스토리가 더 기억에 남았다.

조애나에게 운동 강습을 받던 학생 중에는 가정폭력을 당한 주부가 있었다. 남편이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이나마 잠시 자신만의 생활을 하는 것 같았지만 남편이 곧 가석방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내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남편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아내를 찾아와 폭력을 행사했고, 절망에 빠진 그녀에게 조애나는 호신술을 가르쳐준다.

그녀는 결국 남편에게 살해당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녀는 남편에게 맞서 싸웠다고 했다. 피해자 딸은 자신의 어머니가 평생을 아버지에게 맞아오기만 했는데 비록 죽음으로 내몰리기는 했지만 그렇게 한 번이라도 반격을 해보기라도 해서 다행이었다며 호신술을 가르쳐준 조애나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맞기만 하던 그녀가, 그날은 남편에게 반격을 해서 결국 죽음까지 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은 참는 여자를 노린다고 한다. 맞기만 하던 여자가 갑자기 반격을 하니 당황했을 것이다. 거기에서 멈추는 남자도 있었지만 더 큰 분노를 표출하는 남자도 있기 때문이다.

반격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었던 걸까?




극심한 우울감 속에서 비행기를 탔다. 난기류를 만나도 무섭지 않았고 도리어 혹시나 하는 기대마저 있었다. 그 순간에는 비행기가 떨어져도 상관없었다. 아니 떨어지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극심한 우울감이 오면, 나는 평소에 느끼던 그 어떤 공포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평소에는 무서워서 쳐다보지도 못했던, 어둑한 곳에 자리 잡은 검은 그림자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한밤중에는 거울 속에 비친 나조차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런 존재가 전혀 무섭지 않은 순간이 오면, 내가 많이 힘든 상태라고 스스로도 인정하곤 했다.

난 무엇이든 미리 꼼꼼히 챙기는 성향이지만 그럼에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았다. 그래서 더욱더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알아서 미리 대비하곤 했다. 내가 계획한 대로만 하면 별일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나를 믿지 못했던 것 같다. 스스로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여행 출발 당일, 무사히 일어나서 늦지 않게 공항에 가고 무사히 비행기에 탑승하고 무사히 입국 수속을 밟아서 숙소까지 무사히 가는 일, 그 모든 것이 긴장은 되었지만 설렘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자체가 스트레스였고 그 모든 것이 공포로 다가왔다.

숙소에 도착하고 나니 불안해하던 것들 중 몇 개가 일시에 사라졌지만 그래도 불안은 남아있었다. 두 번째 숙소로 이동하기 전날, 도무지 새로운 곳으로 옮기고 싶지 않았다. 심사숙고하여, 나름 여러 이유를 따져 어렵게 선택한 곳이었는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취소가 불가능하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이동하긴 했고, 적응하자마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며칠 만에 그 우울감이 다시 찾아왔다. 그 어느 때도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공포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동안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이번에는 나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으면 좋았을까? 또 후회하고 있었다.

웬일인지 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어디서 오는 불안인지 알고 있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그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잖아! 그런데! 도대체! 왜!"

죽고 싶으면 우울증, 죽을 것 같으면 공황장애?

집에 돌아오면 서둘러 짐을 정리하고 여행의 흔적을 당일에 모두 지웠다. 그래서 하룻밤 자고 나면 여행의 기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여행 같은 일상을 꿈꾸고 싶었나 보다.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닌 특별한 곳에서 일상을, 그것이 혹여 노동을 대가로 지불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또다시 짐을 꾸려야 한다. 이번에는 그저 단순한 여행 짐이 아닌 이삿짐을 싸야 했다. 2주짜리 여행 짐을 싸면서 수만 가지 불안을 겪었기에, 그래서 2년짜리 짐을 싸면서는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설레지만 두려울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면 그 어떤 문제가 아닌, 내 감정의 아픔으로 끝나는 편이 나았던 것 같다. 마음의 상처는 눈에 잘 보이지 않았다. 상처의 흔적이 남지 않은 일이 가장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니, 쉽게 지울 수 있었다. 물론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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