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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r 14. 2023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60

악인의 눈에 띄지 마라.

절박함이 무기가 될 수 있을까?




제주에 와서 성범죄자 알림e를 ON 했더니 내 주변 2km 이내에 11명의 성범죄자가 있다고 뜨더니 얼마 후엔 14명의 성범죄자가 있다고 떴다. 심지어 바로 옆 건물에도 있었다. 무엇보다 제주시내 치고는 관리비가 저렴해서 눈여겨보고 있던 고층 오피스텔에도 있었다. 내가 숙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1시간마다 알림을 설정해 두었더니 결국 하루 24번의 알림이 왔다. 가까운 곳에 이렇게 많은 범죄자가 있나 싶어서 결국 알람을 꺼버렸다. 그들을 피할 수도 없고, 피할 방법도 없다면 그냥 운에 맡기자!




여행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게스트하우스를 선택했고 나름 잘 적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 명이 사용하는 곳이다 보니 어떤 투숙객이 체크인하느냐에 따라 일상이 되기도 했고 지옥이 되기도 했다.

당연히 혼자 지내는 게 좋겠지만 지금 현재의 내 형편으로는 게스트하우스가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몇 달 지내보고 그럼에도 감당되지 않을 정도가 되면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하지만 겨울에는 난방비를 생각해야 하니 집을 구할 수는 없었고 옮겨봐야 또 게스트하우스였다. 제주시내 게스트하우스 중에서 시설과 가격적인 면에서는 현재의 게스트하우스보다 나은 곳은 찾지 못했다. 그러니 불편해도 참아야 했다.

제주도에서도 출근과 퇴근을 걸어서 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교통비가 오르는 것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교통체증으로 늦었다는 변명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 내에서 숙소를 결정했다.

내가 선택한 게스트하우스는 일하는 곳에서 3km 거리, 걸어서 45분이 걸렸다. 출근 때는 나름 괜찮았다. 하지만 퇴근 때는 달랐다. 하루종일 서서 일을 하고 다시 걸어서 숙소로 돌아오기엔 조금 벅찼다. 유난히 힘들었던 날엔 더욱 그랬다. 약간의 힘듬은 참을 수 있었지만 까미노 때 다쳤던 왼쪽 무릎이 아우성이라 솔직히 좀 불안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번 돈을 병원비로 다 써버리기는 싫었다. 2주가 되기도 전에, 게스트하우스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좀 더 가까운 곳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조금 불편하고 조금 어두침침했던, 그러나 일하는 곳에서 1.5km 정도가 더 가까워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염두에 두고 있었던 Y게스트하우스가 생각났다. 하지만 누구라도 제주에 놀러 온다고 했을 때 그들에게 소개하기엔 다소 난감한 숙소였다. 그야말로 모텔을 개조해서 만든 곳이었기 때문에 시설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여기서도 남들 시선을 생각하고 있는 내가 한심스럽기도 했지만 나에게도 불편한 곳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다른 대안이 없으니 애써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출퇴근 길에 늘 보게 되는 고층 호텔이 있었다. 고층에서는 제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겠구나 싶어 늘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곳이었다. 비즈니스호텔 숙박비가 게스트하우스와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저렴하기는 했다. 거리가 익숙해지고 주변의 풍경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을 때였다. '월세 O만 원부터'라는 전광판 안내문구가 어느 순간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계속된 불경기에 많은 객실을 보유한 호텔로서는 공실로 놔두느니 차라리 단기 임대로라도 수익을 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관리비가 없고 보증금이 없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게다가 지금 게스트하우스 한 달 숙박요금보다 십만 원이나 저렴했다.

아침식사가 없고, 세탁 서비스도 없지만 그래도 출근길이 1km 정도 단축된다는 사실에 설득되었다. 게다가 객실을 오로지 나 혼자 쓸 수 있었다. 며칠을 고민하다 가보았더니 실제로는 십만 원을 더 높여서 불렀다. 전광판을 가리키니 'O만 원이 아니라 O만 원부터'라는 말에 힘을 주어서 말했다. 미끼성 금액이었냐니까 그 가격의 룸도 실제로 있으니 거짓은 아니라면서 다만, 지금은 빈 객실이 없다고 둘러댔다. 빈 객실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니깐 앞으로 계속 나오지 않을 거라며 계속 싱글룸을 추천했다.

그럼 싱글룸을 보여달라니까 다른 층의 객실을 보여주었다. 싱글침대, 화장대, 미니 냉장고, 에어컨 등 있을 것만 있는, 딱 내가 원하던 심플한 싱글룸이었다. 게스트하우스와 같은 금액이지만 선뜻 계약할 수는 없어서 일단 돌아왔다.

호텔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싱글룸은 전광판보다는 5만 원 비싸지만, 부르던 가격보다는 오만 원 싸게 광고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곳에 적힌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하지만 호텔에서 객실을 보여주었던 그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올해부터 가격이 올랐고 홈페이지는 수정이 힘들어서 내버려 둔 거라는데 전광판도 그렇고 처음부터 계획된 미끼성 금액 같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 금액이라고 했어도 요즘 물가를 고려하면 솔깃한 금액이었지만 약간의 괘씸죄가 적용되었다. 그동안 '전세'만을 따지다가 고금리에는 월세도 나쁘지 않았지만 보증금과 관리비 그리고 공과금을 따지니 감당하기 벅찼다. 최저 임금에 최소 근무시간으로 받는 현재 시급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제주에서 생활하는 돈은 제주에서 번 돈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처음 서울에 갔을 때처럼 말이다.

며칠을 고민해 보아도 출퇴근의 무게가 점점 더 가혹해지니 옮겨야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같은 가격이라면 시설이 낡은 Y 게스트하우스 다인실보다는 신축에 가까운 호텔 싱글룸이 훨씬 좋기도 했다. 그나마 고층의 객실을 선택할 수 있을 때 빨리 예약하기로 했다.

다시 호텔을 찾아갔다. 계약하게 될 객실을 보여달라니까 내가 계약하게 될 호실은 아직 투숙객이 있단다. 어차피 내가 계약할 호실이 아니라면 자세히 볼 필요는 없었다.

호텔의 서비스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들어올 때 상태로 나가야 한단다. 당연한 말 아닌가 싶었는데 수건, 침구도 세탁해 놓고 나가란다. 화장지도 채워놓고 바디워시, 샴푸 디스펜서도 채워놓고 나가라는 말에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다 빼고 체크인하겠다고 하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디스펜서, 화장지는 그냥 한 말이란다. 이불치워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추운 날씨라 혹시 몰라서 그냥 두기로 했다.

나름 부동산 임대 계약서를 내밀면서 사인하라는데 대뜸 계좌번호를 불러줄 테니 이체하란다. 사인도 안 하고 한 달 임대료부터 입금하라니! 계약부터 하겠다니까 그럼 계약서에 사인하란다. 읽어보고 하겠다니까 그러란다. 그동안 진상 투숙객이 얼마나 있었는지 몰라도 특약사항이 참으로 특이했다. 죄다 원상복구 조항들뿐이었다. 난방을 틀어놓은 채  창문을 열어두고 외출하는 투숙객이 있었다며 비상식적인 요금이 나오면 따로 청구하겠단다. 계약서에 사인하고 계좌번호를 적어달라고 하니 불러주겠단다. 그래서 이체하려는데 계좌 명의가 호텔 대표자가 아니었다. 누구 계좌냐니까 마지못해 지배인 계좌인데 임대료 받는 전용계좌라고 했다. 심지어 임대 계약자는 옆 호텔명이다. 무슨 이런 황당한 계약이 다 있냐니까 의심되면 이 계약은 못한단다.

탈세를 위해 차명 계좌를 쓰는 곳도 있으니까 그런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계약한 기간 동안 호텔에서 무사히 지내기만 한다면 상관없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계약만기 일주일 전에 연장 의사를 물을 텐데 그때마다 임대료를 선입금하면 자동으로 계약은 연장된단다.

계약서에 사인하고 입금하자 계약서는 폰으로 찍어가란다. 계약서 두 장을 작성해서 한 장을 주는 것 아니냐고 하니까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면서 마지못해 복사를 해준다.

돌아오면서도 계속 찝찝했다. 뭐 이런 계약이 다 있을까 싶었다. 이때부터 멘털 관리를 위해, 최악의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체크인하러 갔는데 호텔이 폐업을 했다거나, 직원이 바뀌어서 이런 계약은 한 적이 없다고 발뺌한다거나 하는 경우였다. 만약 그렇더라도 한 달 치 임대료를 날리게 된 거라 생각하고 정신줄은 놓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 계약이 탈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증명도 할 수 없었다. 호텔 홈페이지의 대표 전화도 이 사람이 받았고 프런트에도 항상 이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 따로 확인할 길이 없었다.

각종 호텔 후기에서 직원의 불친절함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은 오랫동안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였다. 내가 체크인하기로 한 날엔 자신이 쉬는 날이라 다른 직원이 있을 거라며 전날에 와서 먼저 카드키를 받아가라는 걸 보면 이 사람이 지배인일 수도 있었다.

체크인하기까지 남은 기간 동안 내내 불안했지만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계약할 룸에 문제가 있을까 봐 걱정되었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도 없었다.




제주 시티 투어를 하고 호텔로 갔다. 쉬는 날이라더니 계약했던 그 직원이 있었다. 룸 소개 없이 그냥 올라가란다. 그래도 호텔이 폐업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렇게 신속하게 무사히 체크인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객실이었다. 룸 컨디션은 걱정했던 것보다는 나았지만 여기저기 먼지가 보였다. 침대를 옆으로 치우고 바닥을 닦아내자 먼지가 잔뜩 나왔다. 사용하기 편하도록 침대 방향을 바꾸고 화장대 위치도 옮겼다. 짐을 둘 수납공간이 없어서 화장대 아래에 들어가 있는 미니 냉장고를 꺼내고 대신 가방을 놔두었다. 미니 냉장고화장대 옆으로 나란히 배치했다.

방에 욕실이 딸려 있어서 방 전체가 습했다. 난방을 켜도 여전해서 욕실 문을 닫아두니 밤새도록 욕실이 마르지 않았다. 이제 이 룸의 성향을 알아야 했다. 가장 최적의 상태를 알아내기 위해 며칠 동안 테스트를 했고 다행히 지금은 최상의 룸 컨디션으로 지내고 있다.

실제 출근길은 많이 짧아지진 않았지만 가장 길었던 직선 코스가 절반으로 줄어드니 심적으로 부담이 줄어들어서인지 가깝다고 느끼게 되었고 실제로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뜻하지 않게 제주도에서 비즈니스호텔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곳에서의 삶을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이야기할만한 것이 딱히 없었다. 제주에서의 또 다른 쳇바퀴 삶이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욕심을 버리고, 기대를 버리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니 한결 나아졌다. 이곳에 어떤 마음으로 왔는지만 기억하기로 마음을 먹자, 모든 것이 편해졌다.

'아무것도 바라지 말자! 지금은 그냥 살아있으면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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