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지바르, 탄자니아
아프리카의 비행 시스템은 독특하게도 우리나라 버스 체계와 유사하다. 최종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 종종 경유지에 들르듯이 항공기로 자가 환승을 한다. 아디스아바바를 떠난 기체는 킬리만자로에서 승객을 한 차례 쏟아내더니 새로운 손님을 받아 다시 잔지바르로 떠난다. 수요가 적어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다. 문제는 장거리 이동을 하는 탑승객에게 겹쳐오는 피로다. 서울에서 아디스아바바, 아디스아바바에서 킬리만자로, 킬리만자로에서 잔지바르까지 3번의 연속 비행을 하니 도착할 무렵에는 녹초가 된다. 마지막 이륙 때는 약간의 멀미와 기나긴 기다림으로 꽤나 속앓이를 한다.
멋진 풍광에 아득해진 정신을 다독이며 도착한 잔지바르 공항은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의 반의반의 반도 안 되는 규모이다. 직선거리 오십 미터 남짓한 내부 곳곳에는 장애물로 가득하다. 입구에서 심사대까지 양옆으로 바리케이드가 쳐 있다. 세관원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대기하다가 밀려드는 여행자를 붙잡는다.
- 황열병 카드 보여주세요.
탄자니아는 황열병(yellow fever)이 발생하는 국가로 예방 접종이 필수이다. 이름과 꼭 맞는 노란 카드를 보이자 도착비자 서류를 내준다. 방문객들은 펜스 위 부실한 나무판자에 기대 부지런히 펜을 돌린다. 문서 작성을 끝내고 심사 줄을 기다린다. 직원은 단 세 명, 유리창에 부착된 종이부터 가리킨다.
- 비자비 내세요.
일찍 나가고 싶다면 카드 결제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미리 준비한 오십 달러 현금을 꺼내자 그제야 세관 검사를 시작한다. 플래시가 번쩍, 토끼 눈으로 두 방 찍힌다. 옆 칸의 젊은 엄마는 세 아이를 데리고 고군분투 중이다. 무언가 잘못됐나 보다. 하지만 돌아볼 체력도 마음의 여유도 없어 눈인사만 건네고 서둘러 걸음을 재촉한다.
만신창이가 된 짐을 찾는다. 터덜터덜 끌고 나가려는데 또다시 잡아 세운다. 마지막 검사다. 최종 관문을 통과하고 나온 공항 밖에는 승객의 이름이 적힌 종이와 피켓을 든 택시 기사 수십 명이 진을 치고 있다. 찬찬히 읽어 내려간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은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 움직임이 있는가 하면 제발 나이기를 바라는 간절한 눈빛도 있다. 앞줄에는 없는 듯해 사이를 파고든다. 인파를 헤치고 와 코앞까지 글씨를 들이밀며 긍정의 눈길을 기다리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 이름의 주인이 아니다. 두터운 대기 선을 뚫고 나오니 주차장이 나온다. 아, 또 바람맞았다.
첫 숙소를 예약하면서 미리 픽업 신청을 해두었다. 이메일로 확답을 받으면서도 내심 불안했는데 역시는 역시다. 나는 픽업 운이 안 좋기로 유명하다. 지난 1월 자정이 넘는 시간에 인도 공항에 떨어졌다. 작은 도시로 입국하게 되어 공항버스 같은 체계적인 교통수단이 없었다. 호스텔 사장의 전화는 먹통이었고 유심도 없어서 골머리를 앓았다. 겨우 잡은 택시는 위치를 몰라서 간판 하나하나 앞에 멈춰서는 기이한 행동을 보였고 끝끝내 삐끼에게 거금을 주고 찾았다. 정적이 감도는 프런트는 불이 꺼져 있었고 집주인 방에서는 요란스러운 코골이가 한창이었다. 2층 빈방의 문을 열고 에어컨을 틀어주며 여기를 쓰라고 당당하게 안내하던 삐끼는 심지어 직원도 아니었다. 오늘, 황당했던 그 순간을 다시금 맞닥뜨렸다.
복작복작한 무리 너머 나무 그늘 아래로 자리를 옮긴다. 긴 비행과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가는 전개에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하다. 캐리어 옆에 작은 가방을 놓고 털썩 주저앉아 짐보따리에 몸을 기댄다. 일순간 모든 시선이 집중된다. 그럴 만한 게 이 구역에 동양인, 게다가 동양인 여자는 나뿐이니까. 후딱 기사를 찾아 떠나는 게 보통인데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나 궁금한가 보다. 그들끼리 웅성대며 나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아, 그게 말이죠……. 쉬고 있는 거예요. 바로 출발하기에는 기력이 달리거든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닌걸요. 당황하거나 화내거나 슬퍼할 에너지조차 남아있지 않아요. 잠시 자리 좀 빌립시다.’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대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눈을 찡긋거리고 씩 웃으며 엄지 척을 하자 폭발적인 스포트라이트가 꺼진다. 저도 살려고 이러는 거예요!
몇 분이 지났을까. 장난기 어린 눈망울의 청년이 다가온다.
- 숙소가 어디야?
‘삐끼와의 대전쟁’의 서막이 열리나 보다. 앞으로 몇 명이 더 달라붙을 거고 흥정이 시작될 테다. 축적된 노하우를 상기한다. 무게 중심을 뒤로 싣고 팔짱을 낀 채 여유 만만한 표정을 짓는다. 풍부한 제스처와 함께 밀고 당기는 기술을 발휘한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견디려면 짐짓 몸을 돌려 몇 걸음을 이동하기도 해야 한다. 전열을 가다듬고 싱긋 미소를 지으며 거래에 임한다.
- 조금 있으면 데리러 올 거야. 미리 얘기해 뒀거든.
- 호텔 이름이 뭔데? 주소 가지고 있어?
어쩌면 집주인이 나를 까먹고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대안이다. 프린트해 온 종이를 보여주자 통화 버튼을 누른다. 그러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스와힐리어로 상대와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내게 핸드폰을 건넨다.
- 지수 미안해요! 드라이버가 깜빡했지 뭐예요? 금방 갈 테니 기다려줘요.
세상에, 숙소에 연락해 나의 곤란한 상황을 전달해 주다니. 만만한 여행자를 상대로 한탕 해 먹으려는 건 아닌가 의심했는데 머쓱해진다.
- 사실 내가 아는 데야. 쭉 둘러보니까 너네 직원이 안 보이더라고. 잊어버린 거 같아서 전화했는데 다행이야!
초롱초롱한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그득하다. 이름은 무엇인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여기서 무얼 할 건지, 이후에 어디로 갈 건지 온갖 질문 세례를 받는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자 주변으로 하나둘 다가온다.
- 여기 어때?
- 날씨 환상적이다. 겨울인데 햇볕도 적당하고 하늘도 뽀송뽀송해. 한국은 지금 찜통이거든!
- 지금 계절은 먼지가 너무 많아. 조금만 움직여도 뿌옇게 일어나.
다들 영업을 하려 들기보다 이방인에게 관심과 친절을 보인다. 잔지바르를 이모저모 소개하고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지는 않을까 말동무를 자처한다. 자기 손님이 오자 다른 친구를 불러 번갈아 가며 이야기 상대가 되어 준다. 잘 있나 한 번씩 보러 오고 손을 흔들면 고개를 끄덕이며 원래 위치로 돌아간다.
그렇게 30분이 지나자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나를 찾는 게 분명하다. 스프링노트를 한 장 쭉 찢은 종이에 휘갈긴 내 이름을 두 손으로 든다.
- It’s me! 나야 나!
늦잠을 자버렸다며 머리를 긁적이는 픽업 보이를 원망할 까닭이 하나도 없다. 왔으니 됐어, 갑시다. 친구의 말처럼 바퀴가 구르자 유리창이 흙먼지를 끌어안는다. 누런 창 너머 바나나 나무와 사탕수수밭이 펼쳐진다. 히잡을 둘러싼 꼬마 아씨들과 언뜻언뜻 보이는 고기잡이 그물과 코코넛 주스를 파는 상인들이 보인다. 이목을 끌지만 잔지바르의 첫 장면으로 기억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국적인 풍경보다 먼저 만난 아프리카의 첫인상은 계획대로 되지 않은 날것의 맛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무심코 지나칠 뻔한 따스한 환대를 즐길 수 있었던 게 아닐까.